몇 해 전, 일곱 살이었던 아들이 바닷가재를 사온 적이 있었다. 그릇에 옮겨 놓으니 기포를 만들며 숨을 쉬었고, 손으로 잡기라도 할라치면 꼬리를 거세게 파닥거리며 버둥거렸다. 집게발은 1cm 너비의 빨간 고무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아들이 바닷가재를 사온 이유는 단순했다.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바닷가재를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아이다운 호기심이 전부였다. 그러나 바닷가재의 움직임이 약해지면서 아이의 관찰이나 관심이 시들해질 무렵이면 그 바닷가재는 내 차지가 되었다. 살아 있는 것을 내 눈으로 지켜 본 그 녀석을 수돗물로 헹구어 씻고 찜 솥 위에 올려놓은 뒤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는 것이 내 몫이 되는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나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이 생명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산골에서 자랐다. 집에서 직접 가축을 길렀고 그 가축 중에서 일부를 양식으로 취하기도 했다. 직접 키워 왔던 것들이기에 그것을 취할 때는 그것들을 향한 측은지심과 고마움은 각별했다. 내가 키우던 생명을 먹는다는 자각은 그 음식을 모든 이웃과 골고루 나눠 먹음으로써 그 생명의 가치를 최대로 높이려 노력했다.

그런데 요즘 나의 식탁에 오르고 있는 음식은 어떠한가? 나는 내 앞에 놓인 음식이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수많은 과정을 거의 모른다. 나처럼 뜻하지 않게 살아 있는 것을 요리해 본 적이 있다면 한 번쯤 생각해 봤을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잡고, 죽이고, 다듬는 과정까지는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준다. 말끔하게 손질되어 제품화되고 포장된 쇠고기나 생선에서 생명력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퍼덕거림, 살고자 하는 몸부림의 과정은 모두 생략된 음식을 무감각하게 먹기가 쉽다. 바빠진 일상에서 인스턴트식품을 먹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미세하게 쪼개진 생명은 그저 포장지 속의 상품일 뿐이다.

사는 동안, 어떤 음식을 얼마나 먹으며 살 것인가?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어떤 음식을 선택하면 오늘 내가 먹는 한 끼의 밥상에서 생명 존중과 지구 환경 보전의 덕목까지 챙겨갈 수 있을 것인가?

그 답은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채식이 좋다거나 하는 명제보다 모든 음식에 깃든 생명에 눈을 뜨는 감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감성이 살아나면 욕망에 의한 폭식과 과식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다. 음식을 골고루 나누어 그 가치를 최대화하는 일에도 관심이 갈 것이다. 나눔과 절제, 건강한 음식을 생산하기 위한 지구 환경 보전의 큰 그림 속에 자신의 좌표를 찍을 수 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하는 자문으로 시작하는 공양 게송이 요구하는 자각도 그런 것이리라.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들과 함께 식탁 앞에 앉으면 수도 없이 해 온 이야기가 있다. “양배추야, 고마워. 내가 너를 먹고 지혜롭게 잘 살게.” “생선아, 고마워! 네가 나를 위해 생명을 줬으니 너 대신 지혜롭게 자라서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할게.”

매 끼니마다 음식이 되기 전의 생명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품 있는 식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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