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수연불변(隨緣不變)

‘수연불변(隨緣不變)’은 인연에 따르지만, 본질·근원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화엄경〉과 〈대승기신론〉에 있는 사자성어로서 앞뒤를 바꾸어 ‘불변수연(不變隨緣)’이라고도 한다. 진리의 본질은 변함이 없지만, 인연, 즉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융통성), 대응한다는 뜻이다.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갖고 변화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금 어려운 주제이기도 하다.

초기불교와 〈아함경〉 등에서 진리는 연기(緣起)·삼법인·사성제 등이다. 〈화엄경〉과 〈대승기신론〉 등에서는 ‘진여(眞如)’라고 한다. 진여를 다른 말로는 법성·불성·법신·공(空)·여래장이라고도 하는데, 연기가 곧 공(空)인 것처럼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의미가 다른 것은 아니다.

진리는 불변(不變)이다.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 인연에 따라(隨緣) 삼라만상이 연출되는 것처럼, 진리도 하나의 가치관에 고정되어 있으면 그것은 무용지물이 된다.

〈금강경〉에는 “고정된 법(진리)은 없다(無有定法). 그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올바른 깨달음)”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고정관념(不變)에 구속되거나 사로잡히면 깨달음이나 해탈을 이룰 수가 없다. 고정관념의 굴레 속에 갇히면 그로부터 고(苦)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은 ‘천수천안’으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구제한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의 괴로움과 고난을 구제해 준다. 또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에는 고난 속에 있는 중생을 건지기 위하여 관세음보살이 33가지 몸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씀이 있다.

때론 국왕의 모습으로, 때론 돈 많은 부자의 모습으로, 때론 미녀의 모습으로, 때론 영화배우 같은 남성의 모습으로, 그 밖에 귀신의 모습 등 33가지 모습으로 변화하여 나타나지만 관세음보살 자체는 변하는 것이 없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필요에 의하여 변화신을 나타낼 뿐이다. 요즘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보면 갖가지로 변화한다. 그러나 다시 맞추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와 같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염불문에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이라고 한다.

불변과 수연은 ‘원칙과 융통성’이라고 할 수 있다. 원칙과 융통성은 어느 하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두 가지가 모두 중요하다. 국가운영이나 기업운영, 개인의 인생에서도 원칙이 없으면 그것은 철학이 없는 것과 같다. 철학이 없으면 목표가 없는 것이고 목표가 없으면 성공할 수가 없다. 남이 하면 덩달아 뒷북을 치다가 끝난다.

그렇다고 융통성이 없으면 발전하지 못한다. 너무 자기 생각과 고집이 강하면 망한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고, 기업운영이나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유명한 필름회사 코닥필름이 문을 닫은 것은 메모리 개발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망하는 것은 모두 과거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자기가 최고로 옳다는 생각과 자신의 주장에 빠지면 모순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성장이 멈추게 된다. 철학이나 사유세계는 물론 한 인간의 성장과 발전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융통성이 너무 과다하게 많으면 편의주의, 기회주의자가 된다. 우선은 발전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두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

원칙은 본질이고 불변이다. 본질은 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너무 원칙만 고수하면 그것은 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인간이 된다. 시대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자칫 무의하게 된다.

불변과 수연, 원칙과 융통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그렇지 않다. 타인에게는 각박할 정도로 원칙의 잣대를 들이대다가도 내가 필요할 때엔 융통성을 앞세운다. 너무 원칙을 고수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너무 융통성이 많아서도 안 된다. 원칙과 융통성 사이에서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불변(不變)과 수연(隨緣), 수연과 불변을 잘 적용할 때 여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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