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이해의 길 2

중고등학교시절 교회를 열심히 다닌 적이 있다. 그때는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 막연히 윤리나 철학 정도로 생각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불교에서는 신(神)을 거론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 없는 종교를 종교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종교의 본질이 신에 있다는 생각은 오늘에도 여전히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다.

물론 ‘신’은 서구 종교를 이해하는 핵심적 요소지만, 종교 전체를 아우르는 관념은 아니다. 본래 종교의 영어 표현인 릴리전(Religion)은 ‘다시(again)’를 의미하는 ‘re’와 ‘결합(take up)’의 뜻을 지닌 ‘ligion’의 합성어다. 이 둘을 연결한 ‘릴리전’은 신과 인간의 재결합이라는 뜻이 된다. 여기에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로 신과 이별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신과 인간이 다시 결합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즉, 그리스도가 신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중계 역할을 했으며, 그것이 곧 서구 중세 사회에서 이해한 릴리전의 전형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에게 종교는 기독(基督,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거의 전부였다. 교회에서 기도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로 마치는 이유도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신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하지 않고 직접 신과 만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신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주장한 이들이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기독교는 신의 종교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자 원죄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구원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구원은 오직 신의 은총에 의지하고 죄를 회개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절대 타자인 신에 의존해서 구원을 이루려는 신앙이 지금까지 줄곧 말해왔던 타력종교(他力宗敎)다.

릴리전의 기준에 따르면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를 비롯한 동양의 종교 역시 신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다. 그런데 ‘신과 인간의 만남’이 종교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

서구의 종교학자들이 동양의 종교와 만나면서 느낀 근본적인 문제의식이었다. 신과의 관계 속에서 종교를 정의하면 동양의 종교를 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은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신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기존의 종교 정의를 폐기한 것이다. 벌써 2백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폐기처분된 관념에 얽매여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고 떼쓰고 있는 것이다.

종교학자들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새로운 판을 짜야만 했다. 깊은 고민 끝에 그들은 ‘성(聖)’과 ‘속(俗)’이란 개념을 중심으로 종교를 새롭게 정의하였다.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러한 인간의 유한성을 ‘속’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하였다. 그런데 인간은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종교적 욕구를 가진 존재다. 그들은 영원한 삶을 ‘성’이라는 용어로 정리하여, 종교는 유한한(俗) 삶에서 벗어나 영원한(聖) 삶을 추구하는 신앙체계라고 정의하였다. 각각의 종교는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이를 충족시키는 교리를 체계적으로 갖추고 있다.

종교는 이제 ‘거룩함’이라는 새로운 상황과 만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서구 사회에서 뿌리 깊게 내려온 창조주로서 신의 관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 성스러움은 신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신’이라는 절대 타자를 배제한 채 종교를 거론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기독교 안에 신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전통도 존재하지만, 이는 소수 의견이기 때문에 여기서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종교학자들이 자신의 전통을 포기하면서까지 동양의 종교를 인정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불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는 오늘의 행태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그들은 다른 이의 선택을 존중하고 예의를 아는 기독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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