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의 길 시코쿠] 23. 시코쿠 최남단 땅끝에 서다
[정진의 길 시코쿠] 23. 시코쿠 최남단 땅끝에 서다
  • 박지산 자유기고가
  • 승인 2019.06.20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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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번 사찰 순례 여정
38번 콘고후쿠지 참배 후 사찰 앞 전망대에서 바라본 태평양. 콘고후쿠지는 시코쿠의 최남단 도량이다.
38번 콘고후쿠지 참배 후 사찰 앞 전망대에서 바라본 태평양. 콘고후쿠지는 시코쿠의 최남단 도량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배낭을 안고서 차에 올라 있었다. 뜬금없는 자동차 오셋타이를 받아 편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지난번에 차로 태워 주겠다고 할 땐 트럭이었는데, 이번에는 평범한 자가용이다. 그래도 차 내부가 큰 편이라 넉넉하게 앉을 수 있었다.

“그 삿갓이 참 특이해서 말이지. 그런데 한국 사람일 줄이야!” 할아버지는 지금껏 여러 순례자들을 태워줘 봤지만 외국인은 처음이라며 신기해했다. 시만토시 근방에 산다는 할아버지는 소일거리삼아 88개소에 들어있는 사찰들을 참배하고는 한다며 종종 순례자들을 “주워서” 태워주고 있다고 했다. 과연, 나는 오늘 할아버지가 붙잡아다 차를 태워 주셨으니 그 표현이 적절했다.

“이왕에 88개소를 도는 거, 조금 돌아가지만 순례길을 따라 가보자구.”

할아버지는 최단거리를 일러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무시하고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원래의 도보 순례길은 이도로 옆의 인도를 따라 하염없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해안도로를 타고 가는 조용한 길, 에어컨을 틀어놓은 차 안에서 배낭을 안고 있으려니 졸음이 솔솔 몰려온다. 그래도 긴장을 풀고 조는 것은 아무래도 실례이니 눈을 부릅뜨고 애써 잠을 쫓아낸다. 할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을 봤는지 피로가 많이 쌓였을 터니 눈을 붙이라고 했다. 그래도 먼 거리를 태워주는데 실례가 된다고 하자 예전에 한 순례자는 차를 타자마자 코를 골며 잤다고 웃어보였다.

현지인 제공한 자동차 오셋타이
25km거리 38번 사찰 쉽게 도착
처음엔 자가용 이용 순례 비판적
운신 어려운 어르신과의 만남 후
“순례수단보다 진정성 중요” 확신
 
마음 바꾸니 다양한 순례자 만나
인연 모여 땅 끝에 설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졸음이 좀 가셨다. 차는 구비진 순례길을 따라 달렸다.

“원래 이렇게 바닷가를 끼고 걷는 길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었어요. 나 어릴 때엔 순례자고 마을사람들이고 모두 산을 넘어 다녔지.”
“그래서 순례길 지도에 길이 여러 갈래인 거군요?”
“원래 이 길은 짐승들이 다니던 오솔길이었어요. 옆을 봐요. 모두 해변이나 낭떠러지 아닌가.”
“근데 왜 지금은 다들 여기를 순례길로 아는 거죠?”
“그거야 차도가 놓이고, 길이 편해졌기 때문이죠. 반대로 원래는 순례길이 아닌데, 관광객이나 순례자들을 모으려고 ‘옛날부터의 순례길’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곳도 있습니다.”

차로 그렇게 30분가량 달리다가 길가에 야트막한 순례자 휴게소를 지나친다. 역시 순례자들이 묵을 수 있는 젠콘야도(善根宿), 카네히라안(金平庵)이다. ‘첫 순례 때에는 저곳에서 묵었지’하고 추억에 잠겨 있으려니 할아버지가 고개로 슥 가리키며 이야기를 한다.

“저기가 젠콘야도라고 순례자들이 묵을 수 있는 휴게소입니다.”
“네, 첫 번째 순례 때 저기서 묵었어요.”
“아, 그런가? 그땐 집주인 할머니가 계시던가요?”
“아니요. 편찮으셔서 병원에 계셨고, 아드님이 대신 운영하셨습니다.”
“그러면 꽤 예전에 다녀갔군요. 지금은 다른 사람이 대신 살면서 운영하고 있어요.”

아프셨던 할머니는 결국 별세하시고, 한때 문을 닫고서 없어지나 했는데 한 만화가가 외지에서 와서 인계 받았다고 한다. 그 후로도 카네히라안에서 묵었다는 후기들이 꾸준히 올라오는 것 보면,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듯하다.

38번 콘고후쿠지 본당의 모습. 본존은 천수관세음보살, 비사문천, 부동명왕의 삼존불이다.
38번 콘고후쿠지 본당의 모습. 본존은 천수관세음보살, 비사문천, 부동명왕의 삼존불이다.

카네히라안을 지나쳐 10분 정도 더 달리자 38번 콘고후쿠지(金剛福寺)에 도착했다. 차를 탄 편의점에서 38번 사찰까지 25km. 꼬박 하루를 걸어야하는 거리를 단 40분 만에 도착한 것이다. ‘문명이 정말 편리하구나’라고 생각한다.

실제, 자가용으로 순례를 하면 열흘 정도로 88개소를 모두 돌 수 있다고 한다. 또 순례를 하다보면 종종 캠핑카를 끌고 순례하는 순레자들이나, 차에 텐트를 싣고서 캠핑장들을 돌며 순례하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처음 순례 할 때에는 이 같이 관광이나 레저처럼 순례를 하는 이들을 그리 곱게 보지 않았다. 도보 순례자들은 온갖 고생을 하면서 순례를 하는데 반해, 편하게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다니는 게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할머니 두 분을 만나고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 중 한 분은 바로 다음 사찰인 39번 엔코지(延光寺)를 향하던 중에 만났다. 

그 할머니는 무거워 보이는 장바구니를 안고서 애써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도와 드리려다가, 그만 말을 건넬 기회를 놓쳐서 도와 드리지 못했다. 마음에 죄송스러운 마음이 커서 계단을 내려가신 후에나 말을 할 수 있었다.

“무거운 짐을 들고 내려가시는 걸 뒤에서 보고 있었는데, 그만 도와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할머니는 느닷없는 순례자의 사죄에 놀란 듯하면서도,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아이고, 아니에요. 순례자님이 도와주시려 한 것 만 해도 감사하지요.”

할머니는 공손히 손을 모아서 나를 향해 합장 반배를 했다. 나도 황급히 합장하고서 반배로 답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고개를 드신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다. 할머니는 합장을 하신 채로 울먹이며 말했다.

“감사하게도, 오늘 오래간만에 제가 대사를 뵙습니다. 괜찮으시면 지팡이(오츠에)를 만져볼 수 있을까요?”

할머니의 작은 목소리에,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라 나는 지팡이라는 단어를 다른 말로 알아들어 동문서답을 했다.

“네? 제 동료(오츠레)와는 39번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목소리를 가다듬곤 다시 지팡이를 청하시기에, 그제야 바로 알아듣곤 황급히 지팡이를 건넸다. 그러자 두 손으로 공손히 지팡이를 받쳐 들고 허리를 숙여서 예를 올리며 기도를 했다.

“코보 대사님, 코보 대사님. 감사합니다. 이리도 오래간만에 대사님을 길 위에서 뵙습니다. 앞으로도 대사님을 종종 뵙게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돌려주면서, 나이가 들고 다리가 불편해 단체 순례도 못가는 몸이라고 한탄했다. 다만 할아버지와 코보 대사의 묘가 모셔진 고야산만 두 번 참배했는데, 죽기 전에 한 번 더 고야산에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장을 하고 말했다.     

새파랗게 젊은 순례자를 보고 눈시울을 붉히며 하시는 말씀이 가슴이 참 먹먹히 와 닿아서, 나도 두 손을 모으곤 허리를 숙였다. “살림이 부족한 순례자입니다만. 부디 그 소원이 이루어지길 꼭 기도하겠습니다.”

내 말에 할머니의 눈시울이 더욱 붉어졌다. “그 말씀이 너무나도 행복해서, 이 할멈이 눈물이 날거 같네요. 순례자님도 조심해서 순례하셔요.”

그래. 이렇게 걷고 싶어도 걷지 못하는 분들은 버스를 탈 수도, 전차를 탈 수도, 자가용을 탈 수도 있다. 순례를 하는 방법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저 순례를 하고 있다는 그 마음  가짐이 중요한 것을.

이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서 보니 더욱 다양한 순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노숙 대신 자가용인 경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순례자,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길을 이동하던 순례자, 반려동물들에게도 흰 백의를 입히고 같이 오는 순례자 등. 이 시코쿠 88개소는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가 모여서 완성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시코쿠의 최남단을 알리는 지표.
시코쿠의 최남단을 알리는 지표.

 

여러 상념들 속에 도착한 38번 콘고후쿠지는 822년, 이곳을 방문한 코보 대사가 천수관세음보살과 인연이 있는 땅임을 알고 불당을 세운 것이 그 시작이다. 그와 동시에 시코쿠의 최남단에 자리 잡은 도량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땅 끝이다.

아열대 기후가 강한 지역이 되다보니 사찰의 분위기도 다른 곳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조경수로 야자나무가 여기저기 보이고, 햇볕도 강하게 내리쬐어 마치 열대지방에 자리한 사찰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참배를 마치고 사찰 앞의 전망대로 나아갔다. 등대 앞의 지표는 이곳이 시코쿠 최남단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앞으로 보이는 바다에는 어떤 섬이나 바위도 없어 너른 태평양이 멀리 수평선까지 한 눈에 보였다.

‘아! 내가 여길 왔구나. 시코쿠의 땅 끝을 밟았구나.’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이내 코를 슥 문지르고, 다시 다음 순례길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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