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는 ‘공’, 실천이 ‘중도’

그림. 강병호

내 나이 스물아홉에 집을 떠나/ 유익함을 찾기 어언 51년/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고/ 조용히 사색하며 살아왔다네/ 이 길을 떠난 수행자의 삶은 없는 것이네/ 길은 팔정도 진리는 사성제/ 욕망을 다스림에는 법이 최고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이 길 뿐 다른 길은 없네

이 시는 부처님이 45년 동안 전도를 마치시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면서 읊은 것이다. 우리도 매일의 삶을 팔정도를 생각하면서 되돌아봐야 한다.

팔정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부처님과 마지막 제자 수바드라와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께 45년의 전도를 마무리 짓고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있었던 사건이다.

밖으로 향했던 나침반을
자기 자신의 내부로 돌려
내면 인식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진정한 보배창고인
‘중도’란 가르침 보게 된다

이 때 늙은 수행자 수바드라가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평소 품고 있던 의문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라쌍수의 숲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아난은 부처님께서 지금 매우 피곤하고 병을 앓고 계시니 번거롭게 해선 안 된다며 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수바드라는 큰 소리로 부처님을 만나야겠다고 했다.

그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진리를 알고자 찾아온 사람을 막지 마라. 내 설법을 듣고자 온 것이다. 그는 내 말을 들으면 곧 깨달을 것”이라고 말하며 열반에 드는 순간에 찾아온 수바드라에게 법을 설했다. 법을 들은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이 때 부처님께서 수바드라에게 “1천 년 후나 1만 년 후에도 부처되는 방법은 팔정도의 수행밖에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생에서 수행 정진을 하지 않고 한평생 살아갈 때 본전치기 밖에 되지 않는다. 수행과 정진을 통해서만 지금의 생보다 더 나은 삶이 보장된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고집멸도의 사성제에서 실천방법이 바로 팔정도이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과 바른 실천이 팔정도를 이루고 있는 덕목이다.

우리의 삶은 쾌락도 아니고 고행도 아닌 가장 안정되면서 바른 생각에 의해서 매일매일이 이뤄져야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설한 중도는 쾌락도 버리고 고행도 버린 바로 그 길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바른 길이라는 것이다.

실천적 중도는 무엇인가
부처님은 중도에 대해 이와 같이 설한다.
“벗들이여, 그대들은 두 극단(고행과 쾌락)을 달려가서는 안 된다. 그 둘이란 무엇인가? 온갖 욕망에 집착함은 어리석고 추하다. 범부의 소행이어서 성스럽지 못하며 또한 이로움이 없느니라. 또 스스로 고행을 일삼으면 오직 괴로울 뿐이며 역시 성스럽지 못하며 이로움이 없느니라. 나는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과 중지와 등각과 열반을 돕느니라.”

부처님은 모든 고행과 수행을 해보니 결국 양 극단을 버리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임을 설명한 것이다.

인식능력이 맑고 깨끗해져 선정에 들어야 하는데 육신이 고통스럽다면 온갖 잡념만이 일어난다. 산란한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극단을 버리라고 한 것이다. 마음 상태를 적정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산란해도 안 되고 번뇌망상이 일어나서도 안 되고 무기력해져도 안 되기 때문에 극단을 버리라는 것이다.

사상적 중도란
천태지의가 주장했던 ‘쌍차쌍조(雙遮雙照)’에서 사상적 중도를 볼 수 있다. 이는 마음이 깨끗하게 해 바르게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천태지의는 중국 교종(敎宗)을 확립하는데 정점에 있었던 스님이다. 그는 <묘법연화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천태종을 확립한다. 또한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법을 설하시면서 어떤 경전을 어느 시기에 설했을까’하는 5교8시의 교상판석을 완성한다.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원교란 중도를 나타내니 양변을 막느니라. 마음이 이미 맑고 깨끗해지면/ 양변을 다 막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면/ 두 법을 다 비추느니라.(心槪明淨 雙遮二邊, 正入中道, 雙照二啼)”

실질적으로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면 쾌락과 고행을 막고 또 바르게 중도에 들어갈 수 있어서 두 법을 다 비춘다. 어떤 쾌락도 어떤 고행도 다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천태지의는 중도를 ‘쌍차쌍조’라고 설명하면서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 중도라고 하였다.

선불교에서의 중도
마조의 제자인 대주 혜해는 중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에 이미 양변이 없으면 가운데도 또한 어찌 있을 것인가? 다만 이렇게 얻은 것을 중도라고 이름하니 참으로 여래의 길이니라.” 


이하는 대주 혜해와 마조와의 일화다. 대주 혜해가 처음 마조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자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대주 혜해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라고 답하자 마조는 무엇을 구하려고 왔는지 되물었다.  “불법을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답한 마조는 답답하다는 듯이 대주 혜해를 책망했다.

“너는 어째서 자기 자신의 보배 창고는 살피지도 않고 다른 곳을 찾아 방황하며 다니느냐? 도대체 너를 떠나 무슨 법을 구하겠다다는 것이냐? 나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그러자 대주가 어리둥절해 “‘무엇이 이 혜해의 보배 창고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마조는 이 같이 답했다.

“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그것은 일체를 다 갖추었으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작용이 자유자재하니 어찌 밖에서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마조의 답에 대주는 더 이상 의심함이 없이 직관으로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 후 6년 동안 마조 곁에서 수행을 한 대주는 돌아가 <돈오입도요문론> 1권을 지었다.

밖으로만 향해 있던 나침반을 자신의 내부로 돌려 내면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진정한 보배창고인 ‘중도’를 보게 된다. 우리의 육신도 현상세계도 내면으로부터 울리는 자기 소리의 인식, 이것을 터득하는 것이 ‘중도’를 인식하는 것이다.

용수가 설명한 중도
용수보살이 설명한 팔불이 중도는 연기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팔불이란 불생불멸·불상부단·불일불이·불래불거로서 연기가 곧 공이며, 공의 실천이 중도라 표현한 좋은 명문이다. 

“생겨나지도 않으며 없어지지도 않으며, 영원하지도 않으며, 단절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으며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는다.”

이것이 용수가 중론에서 표현해 놓은 중도, 연기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여기서 용수는 연기의 본성은 무자성이다. 그러므로 연기를 공이라고 하였으며, 공이기 때문에 가명이며, 이것 또한 중도라고 하였다. 위대한 연기에 대한 공의 철학이 성립된다. 대승불교로 체계화되면서 ‘연기가 곧 공’이라는 내용이 확립된다. 그래서 팔정도가 바로 중도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팔정도가 무엇인가? 실천을 바탕으로 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들은 팔정도이다.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들을 보면 연기, 무아, 무상 또는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로서 조금씩 양이 늘어간다. 부처님께서는 불교를 아주 묘하게 가르친다. 팔정도를 보면 정견·정사·정어 등 순서에 따라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순서대로 외워놓으면 실천하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좋다.

정견에 대해서
팔정도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정견(正見)이다. 정견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정견은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는 순간 생기는 견해이다. 우리는 정견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견의 의미는 이와 같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여 사성제와 연기법의 도리를 바로 이해하며 선악을 구별하고 인연 따라 나타나는 법을 보는 것이고, 정법을 지키는 것이며 정견을 가지는 것이다. 진리와 진실을 바탕으로 한 보편타당하고 편견이 없이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정견이 중요한 것이다. 무아와 무상과 연기가 바로 정견이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연기를 이해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함께 일어나는 생각이 정견인 것이다. 사성제는 정견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느냐’를 끊임없이 생각하다보면 원인을 정확하게 판단하게 되고 이에 대한 처방을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정견이 생길 때 가장 적절한 처방이 나오게 된다. 정견이 안 되면 다른 사람에게 상담을 받아 정견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하여 정견이 생기면 모든 것이 다 이뤄진다. 정견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중국 선불교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조주의 이야기다. 조주는 선불교의 천재이다. “뜰 앞에 잣나무니라”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 “무”등 지금 알고 있는 화두 중에 조주에게서 나온 것이 많다.

조주가 젊은 시절에 스승인 남전 선사 밑에서 열심히 수행하고 있을 때다. 조주는 유머가 넘치는 젊은이였다. 그 당시 조주 스님의 직책은 부엌에서 불을 때는 화부였다.

하루는 저녁공양을 한다고 불을 떼면서 부엌에 불을 냈다. 연기가 자욱하다가 이내 불길이 솟아오르자 사람들이 “불이야”라고 외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조주 스님은 부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이에 조주는 “부엌 안에 앉아서 바른 말 한마디 일러주면 나갈 테니까 나를 밖으로 끄집어내려면 바른 소리를 한마디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조주를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 온갖 이야기들이 나왔고, 조주는 전부 다 아니라고 했다.

보다못한 스승 남전이 “조주야 받아라”면서 돌멩이를 던졌다. 그러자 조주 스님이 “쓸모있는 놈이 하나 있구나”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도 일상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세상에는 행복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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