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앙산지설화 2

[評唱 2]

仰山有如此?人手段. 所以 一日指雪獅子問云 “還有過得此色者?” 且道 他意在什?處. 莫是明一色邊事?. 且得沒交涉. ?不明一色邊事 又明箇什?. 所以道 “鷺?立雪非同色 明月蘆花不似他” 巴陵鑒和? 僧問 “如何是提婆宗” 鑒云 “銀椀裏盛雪”

앙산에게는 이와 같이 사람을 위하는 솜씨가 있었다. 그래서 하루는 설사자(雪獅子)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색을 뛰어넘는 것이 있는가?” 라고 물었던 것이다.

자, 말해보라! 저 뜻이 어디에 있는가? 이는 일색변사(一色邊事, 절대평등=공)를 밝힌 것이 아닌가? (만약 이렇게 안다면) 전혀 관계가 없다. 일색변사를 밝힌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밝힌 것인가? 그래서 이르기를 “해오라기가 눈에 서 있어도 같은 색이 아니요, 밝은 달과 갈대꽃이 서로 같지 않네” 라고 하였던 것이다.

파릉 감(巴陵鑒, 파릉호감 생몰연대 미상) 화상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제바종(提婆宗)입니까?”

호감이 말했다.

“은 주발에 눈이 가득하다(銀椀裏盛雪).”

雪竇拈?杖 示?云 “把斷世界 不漏絲毫 還?得也無 所以 雲門道 ‘直得乾坤大地 無絲毫過患 只是轉物 不見一色 猶?半提 直得如此 更須知有全提時節’ 諸上座 翠峯若是全提 盡大地人?須結舌 放一線道 轉見不堪” 以?杖一時打散.

설두가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말했다.

“세계를 꽉 쥐니 실 끝만큼도 새지 않는다. 알겠는가? 그래서 운문이 말하기를 ‘건곤대지에 실 끝만큼의 허물도 없게 되었더라도 다만 경계에 굴림을 당할 뿐이다. 일색(一色)도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직 반만 들었을(半提) 뿐이다. 이와 같이 되었을지라도 다시 모름지기 온전히 드러내는(全提) 시절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여러 상좌들이여! 취봉(翠峯, 운문)이 만약 전부 드러낸다면 온대지 사람들의 혀가 모두 굳어져버릴 것이고, 한 가닥 길을 터주더라도 지견만 굴려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는) 주장자로 쳐서 한꺼번에 흩어버렸다.

雪竇悟到這般田地 方可?人. 老僧道? 諸人作?生會. 雲門應時應節 但與推倒用 拈仰山意 又被雪竇拈道 “他只解推倒 不解扶起” 且道 雪竇意在什?處.

설두는 깨달아 이런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사람을 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승이 말하기를 “눈이 멀었다(?)!”고 했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가? 운문은 시절인연에 응해서 다만 밀어 넘어뜨리는 것(推倒) 만을 써서 앙산의 뜻을 염했고, 또한 그래서 설두가 “그는 다만 밀어 넘어뜨릴 줄만 알았지, 부축해서 일으켜 세울 줄은 을 몰랐다”고 염했던 것이다.

자, 말해보라! 설두의 뜻(雪竇意)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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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鷺?立雪非同色 明月蘆花不似他와 관련해서 전등록 제 29권, 동안(同安) 찰(察) 선사의 십현담(十玄談) 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枯木巖前差路多 行人到此盡蹉? 鷺?立雪非同色 明月蘆花不似他 了了了時無所了 玄玄玄處亦須呵 慇懃?唱玄中曲 空裏蟾光撮得?”

마른나무 바위 앞에 갈림길 많아 / 길 가는 사람들 여기에 이르면 모두 미끄러져 넘어지네. / 해오라기가 눈에 서 있어도 같은 색이 아니요 / 밝은 달과 갈대꽃도 서로 같지 않네. / 분명하고 분명하게 알았을 때엔 안 것이 없고 / 지극히 현묘하고 현묘한 곳에서도 모름지기 꾸짖어야 하리라. / 은근히 (그대를 위해) 현중곡(玄中曲, 현묘한 노래)를 부르는데 / 허공속의 섬광(蟾光, 달빛)을 집어 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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