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너대로 있지 않고 전부가 더불어 같이 산다

공부가 여일했으면 좋겠어요
질문 :
마음공부를 하다 보니 처음에는 환희심도 생기고 관하면 되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어떤 때는 관해도 안되는 것 같고 답답해서 다른 수련원 같은 데 가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중심 잃지 않고 여일하게 정진할 수 있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쓰라림을 겪어 오면서,
또 잘못하면서, 잘못한 거를 회개해 가면서
살아가는 도중에 부처가 나는 것입니다.

답변 : 우리가 내가 나를, 자신이 자기를 이끌어 가고 자기는 자신을 믿고 이렇게 가다 보면 어떠한 게 잘되다가도 딱 멎고선 안될 때, 또 답답할 때 이런 때가 생기기도 하는데 그럴 때에는 반드시 그걸 공부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불도 꺼졌다 켜졌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저거 하지, 항상 켜고 사는 것도 아니고 항상 밤낮이 없이 사는 것도 아니고, 항상 바다가 잔잔하기만 한 것도 아니에요. 파도가 일죠. 그러니까 파도와 잔잔한 물이 같이 동등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동등한 이치를 알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한테 알리기 위해서 자꾸 그런 일이 생기거든요.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알맞은 일들이 생겨요. 그거는 그냥 즉, 배우가 영화 하고 나면, 한마디 하고 나면 괜찮듯이 그런 거와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거를 빨리 수습하려면 ‘어, 날 공부시키느라고 이렇게 답답하게 만들고 이렇게 모르게 만들고 끄달리게 만드는구나.’ 하고 그냥 바로 직접 저거 하면 그게 다 없어지거든요.

그런 건데 얼마 동안은 되더니 지금은 잘 안된다고 하면서 그렇게 답답하게 굴어요. 그래서 하는 소립니다. 답답하게 하지 마시고, 답답하고 모르고 그러는 것이 도니깐 모르고 답답하고 말도 안 되고 하더라도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공부했어도 이게 뭔가?’ 하고 한탄하지 말고 모든 걸 거기다 맡겨요. ‘한탄하게 하는 것도 너고, 답답하게 것도 너고, 모두가 너다!’ 하고선 거기다 맡겨 놓을 때, 인제 그게 습관이 돼서 어떤 거든지 다 거기다 놓고선 가게 되면 실험을 통하고 또 체험을 하게 되고, 이러면 자연적으로 그것이 문이 열리는 그런 이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깨치고 안 깨치고, 벌써 본래 깨치라고 돼 있는데 그렇게 여러분이 딱 막아 놓고는 안 하니까 그렇죠. 그래서 살아생전에 그 도리를 알아야,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내가 죽어서도 절대로 떳떳하고 꿀리지 않는다. 꿀리지 않아야 어디든지 내 자유껏 갈 수가 있는 거고, 내 자유껏 건질 수가 있는 거고, 내 자유껏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즉 말하자면 살아서 인가가 됐기 때문에 죽어서도 인가가 돼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차원에 따라서 이 공부를 해서 간 사람들이요, 이 세상에 또 나와서 고생하기가 싫으니까 자원해서 나간다는 사람이 없었더랍니다. 그랬는데 “그러면은 구지비끼리 해라.” 이렇게 해서 뽑아서 여기 내려오는 사람, 이런 사람이 더러더러 있다 합니다.

그러니깐 여러분도 언제나 이 중세계에서만 뒹굴면서 그 불쌍한 그 모든 생명들을 보고 살고 또 그 생명으로 다시 떨어지고 이렇게 하는 중세계에서만 살 수는 없거든요. 여러분들이 차원이 높아서 참 한 세계의 한 도량으로, 제불의 도량으로 한데 모여서 참 그, 요새 은비까비? 은비까비처럼 그렇게 나오란 말은 아니지만요, 알지 못하게 모든 것을 거기 앉아서 알고 다 도와 줄 수 있고 건져 줄 수 있고 이럭하게끔 한다면 자기네 자손들도 건질 뿐만 아니라 자기 부모 대대 종손들도 다 건질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일 지금 내가 급하게 생각하는 것은요. “여러분이 자기 뿌리를, 자기 선장 주인공을 진짜로 믿고 맡겨 봐라.” 그런 거죠. 벌써 그러면 맡기고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렇게 돼서 이렇게 됐습니다.” 그러고는 그냥 “거기다 놨습니다.” 이럭하고 말하고 가는데 어떤 사람들은 거기다 놓질 못하고 부지런히 와서 그냥 그 사단을 얘길 다 하는 거예요. 그 얘기하는 것도 공부하는 사람들은 본론만 얘기하고 가는데, 이런 사람들은 그냥 자기가 겪는 모든 얘기를 쫙 다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벌써 그건 거기 자리가 잡히지 않았다는 결론이거든요. 자리가 잡히지 않았는데 방방 뛰지, 어떻게 안 뛰겠습니까? 자리가 잡힌 사람은 그런 걸 해결을 하고 가거든요.

우리가 고등 동물이 되고 그래서 우리는 사람 중에도 진짜 사람이 돼야 부처님 한도량에 태어난다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이렇게 살면서 우리가 고를 고라고 생각하면 고가 되는 거고, 고를 고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니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고다’ 하고선 집착을 한다면 그건 멸이 되질 않아요. 그래 도를 이루지 못하죠. 그러니깐 여러분의 생각에 따라서 도가 되느냐, 도의 길을 걷느냐, 그렇지 않으면은 망상의 길을 걷느냐 이거예요. 그러니 이 한 철 나면서 ‘어떻게 공부를 해야 우리가 부처님, 제불 한도량을 이루나.’ 하는, ‘이렇게 해 가지고는 되지 않지.’ 하고 그렇게 하세요, 뭐든지.

왜냐하면 지금 사는 거 한 철 그저 ‘배고프다, 못 입는다, 돈이 없다, 뭐, 어디 취직이 안 된다, 취직해서 다니다가 떨어졌다’ 이런 거를 가지고 그냥 벅석거리면 오히려 그것이 제동이 걸리질 않아요. ‘그거 떨어지게 한 것도, 굶기게 하는 것도, 살게 하는 것도 바로 네가 하는 거니까 너만이,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그냥 놓고 편안히 살 수 있는 대로 편안해야 해요. 그건 뭐, 몸뚱이가 펄펄 뛰고 그런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한 찰나에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가는 마음의 부처 속에서 나오는 그 보살들이 전부 응신이 돼서 돌봐 주시기 때문에 그거 자기 몸뚱이가 이끌어지는 거죠.

그리고 인제 또 때로는 이렇게도 되는 수가 있죠. 이 한군데를 믿고, 모든 거를 이렇게 한 뿌리를 믿고 그냥 의지하고 해야 나무가 크게 자라는데, 그러지 않고 이 나무에서 저거 하다가 ‘에이그, 또 저기 가서 한번 또 해 봐야겠다.’ 저기 가서 한번 해 보고 저기 가서 한번 해 보고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못 되죠. 정말 진짜로 바다로 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자기가 이 세상에 형성돼서 나온 구녁도 그 구녁이고 들어갈 구녁도 그 구녁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죽어서 들어가는 거보다도 살아서 들어가서 모든 걸 지금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겁니다. 깨치지 않았어도 그렇게 자꾸 닿는단 말입니다. 관하면 자꾸 닿아요. 닿아서 모르는 게 없어요. 그런데 그걸 못 참아서 그냥 이렇게 관해도 이렇다고 하면서 그냥 모두 그러거든요.

여러분들과 내가 다른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지금 이렇게 죽는다 하더라도 모든 걸 내버렸어요. 내버린 건 왜냐하면, 우리가 항상 얘기하죠. 봐도 본 게 없고 들어도 들은 게 없다. 만나도 만난 게 없고 또 가고 와도 가고 온 게 없고, 모두 제자리걸음이고, 모두 하나도 한 게 없다. 내가 먹은 것도 없고. 내가 어떤 걸 먹었을 때 내가 먹었다고 할 수 있으랴. 그러니까 먹은 것도 없고 한 것도 없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그것이 바로 큰 변하지 않는 금덩어리가 돼서, 그게 자불이 통한다는 얘깁니다. 여러분들은 당장 죽는다 하면 거기에 푹 그냥 ‘이거 어쩌면 좋은가.’ 하고 야단법석들을 하시는데, 친척들이 죽는다 이래도…. 그래서 내가 친척들한테도 식구들한테도 모두가 미리미리 관하는 도리를 알려 주라 하는 거죠. 급하면 그래도 나올 테니까, 안 하다가도. 그러니 때로는 얼마나 답답한지 몰라요. 자식들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왔을 때에 제일 내가 답답한 거예요. 본인도 잘 모르는 데다가 그것도 또 자손들한테 가르쳐 주질 않아서, 그것이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고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안 가르쳐 주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항상 자기가 그대로 자기 자불을 알아서 여여하게 살아라.” 이랬는데, “너희들한테는 다 갖추어져 있고 만법을 들이고 내는 것도 다 그대로, 그대로 여여하니라. 그러니 너희들이 그렇게 하지 말고 네 자신을 발견해라.” 때로는 “시자야!” 불러서 “예.” 그러면 “응, 알았다.” 이러곤 고만두고 하는 예전의 선지식도 있었다는데 말입니다. 이 사계절이 오는 거 다 보세요. 이게 전부 여러분들의 스승이자 저의 스승도 됩니다. 하나도 스승 안 되는 게 없는데 마음이 들떠 가지고, 빨리 좀 해 보려고 저기 가서 해 보려고 하고 저기 가서 해 보려고 하고, 이러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거는 들떼기지 그거는 부처님의 길을 가는 게 아닙니다. 말이 아무리 좋았던들, 이론이 아무리 좋았던들 그 몸 떨어지면 입도 떨어지고 입 떨어지면 말도 떨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마음공부를 위해 실천해야 하는 것은

질문 : 이제 마음공부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제대로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 있는지요?

답변 : 나는 항상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다.” 그런 말을 하죠. 법당에 들어오면 부처님의 모습이…, 노래도 있죠? ‘일체제불의 마음’ 그 노래를 가만히 들어 보면 거기에서 다 나와요. 그래서 요만한 거라도, 법당에 들어와서 일체 모두 예의를 갖추는 것도 그렇고 모두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갖춰져야 되거든요. 노래고 예법이고 모든 거를요.

그러니깐 부처하고도 둘이 아니요, 모든 사람하고도 모습만 달랐다 뿐이지 둘이 아니다 하는 것은 공생이기 때문입니다. 공생! 생명은 다 똑같죠? 벌레의 생명도 생명이 있는 거니까. 공생이고 모두 모습은 달라도 마음은 같단 얘기예요. 잘하든 못하든 마음이 있다는 얘기죠. 그러니깐 공심이고, 공체라는 건 모습은 다르나 체는 다 삶에 의해서 살고 있는 체가 다 있으니까. 하다못해 물에서 노는 고기도 체가 있으니까 그, 공체다 이겁니다. 그리고 먹는 것도 우리 전체가 어떠한 물건이든지 다 먹고 산단 말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공식이다 이거예요. 어떤 거든지 다 움죽거리고 하니까 공용이고, 내 몸으로부터도 더불어 같이 공용이고 또 공식화하고 있습니다. 왜냐. 몸뚱이 속에 생명들이 많이 들어 있는데 내가 어떤 걸 먹었을 때 내가 먹었다고 하며 어떤 걸 했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부 자기 주장자의 영원한 자기의 근본이 여기에서 자기 몸을 움죽거리게 리드하고 가는데 어떤 거 먹었을 때 내가,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떤 걸 했을 때, 어떤 걸 봤을 때, 어떤 걸 들었을 때에 내가 들었다, 내가 봤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몸뚱이가 공했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 하는 것도 공식이죠. 그래서 “가는 거 잡지 말고 오는 거 막지 말아라.” 그러는 것은 모든 것이 둘 아닌 까닭에 그런 것이에요. 배우는 사람은 특히 더 그렇게 해야 하고요. 진리가 그러해요. 그대로 너가 너대로 있지 않고 전부가 더불어 같이 살고 있는 그 자체기 때문에….

전생에 무슨 업을 지었기에

질문 : 지금까지 제 인생을 돌아보면 어려서부터 고생이 끊이지 않고 이제 살 만하다 싶으면 계속 일이 터지고 터지고,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좀 쉬고 싶은데 대체 전생에 무슨 업을 많이 지었기에 이런 인생을 살게 된 걸까요?

답변 : 숱한 사람들이 남녀를 막론해 놓고 아늑하고 따뜻한 일생이 있는가 하면 아주 춥고 몰아치는 추운 바람에 쌩쌩하게 살을 에어 가는 일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따뜻하게만 일생을 보낸 사람들은 울안에서 핀 꽃과 같아서 험악한 데 내놓으면 어쩔 줄을 모르고 얼어 죽기 똑 참하고 바람에 쓸려서 뿌리까지 파여서 아주 죽기가 일쑤죠. 그러나 험하게 내버려 던져진 그 어떠한 꽃송이라든가 풀잎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어디다가 세워 놔도 그건 죽는다 안 죽는다 또는 쓰러진다 그런 것도 없습니다. 버려졌기 때문에.

그러니 누구나가 다 생각할 때 작고 크고 그것뿐이지 여자나 남자나 그렇게 살을 에어 가는 일생이 있는가 하면 아주 따뜻한 일생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생들에 같이 끼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 여러분들의 눈물을, ‘내가 만약에 그릇을 비우지 않았더라면 여러분들의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내가 담을 그릇이 없었을 텐데…. 그 눈물 한 방울의 그 창고로서 그 그릇을 비웠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눈물을 다 담아도 두드러지지 않고 그 눈물을 다 퍼내도 바로 줄지 않는 그 그릇을 얻지 않았는가? 그 그릇도 세울 게 없는 것을….’ 하면서 중얼중얼하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모두 여러분들의 그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저한테 보여 주지 않으셨더라면 저는 그릇을 비우지 못했을 겁니다. 여러분들의 그 아픔을 바로 나한테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렇게 아픈 줄 몰랐을 겁니다. 바로 내가 아파 보지 않았더라면, 바로 참다운 눈물을 흘려 보지 않았더라면 그 눈물, 그 참다운 눈물, 참눈물을 몰랐을 것이며 그 쓰라림을 아마도 상세히 몰랐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일생을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이 남의 말만 듣고, 또는 이렇게 그냥 보고 넘기고 듣고 넘기고 하는 거하고 실천에 옮겨서 그렇게 아주 이어지게, 그 살을 에듯 다져 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놓은 실천은 아마 그것은 더없이 자기의 교훈일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문제가 나를 용기를 얻게 했고, 또 한 가지는 ‘아하, 그렇게 에어 가는 그 사람네들의 아픔을 같이하고 그 배고픔을 같이할 수 있다면 내 이 몸뚱이가 보이지 않고 가루가 된들 어찌 같이 안 하리.’ 하고서 나는 거기에서부터 용기를 얻었고, 자면서도 잠이 안 오고 바로 그 궁리, 꿈꾸느라고 밤을 새우기를 수차에, 잠자는 거와 마찬가지로 새웠고, 그래서 가다 보면 쓰러지기도 하고 또 한참 어느 때나 됐는지도 모르게 또 일어나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인생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렇게 참답게 나갈 수도 있는가 하면 마구 나갈 수도 있는 거거든요, 아무렇게나 그냥.

그래서 그 참다운 내 주장심이 아주 무서운, 사람 죽인 살인자가 될 수 있는 칼이 될 수도 있는가 하면 그 무서운 칼이 아주 연하고 잘 드는 칼이 돼서 여러분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칼이 될 수도 있죠. 그래서 우리는 그 중심으로서 중력을 잃지 말고, 남의 말을 들어서 거기에 끄달리지 말고 자기 중심에 의해서 살아라 이겁니다. 언제나 내 중심, 그 한마음 한 점 속에 일체 만물만생이 다 거기에 있고 그 일생이 거기에 다 들어 있어요. 또 부처님이 돼 봐야 보살의 행을 할 수 있지, 부처님이 되지 않고야 어떻게 보살행을 하며 법신의 행을 하며 모든, 즉 말하자면 자비의 행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이거는 업이고, 네가 한 것이 이렇게 업이 많으니까….” 이렇게 따진다면 바로 보살행을 못합니다. 이것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줄 수만 있는 거. 업이 많아서 주지 못한다는 그것도 걸리지 마시란 얘깁니다. 업보가 많으니까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그런 것도 걸리지 말고, 업에도 걸리지 말고, 그 법에도 걸리지 말고 아무것도, 아무것에도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알면 죄를 짓겠습니까? 또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느 누구가 한 발짝 한 발짝 떼어 놓는 대로 본래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본래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게 그게 업이라면 바로 부처가 어디서 났겠습니까?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쓰라림을 겪어 오면서, 또 잘못해 가면서, 잘못한 거를 회개를 해 가면서 살아가는 도중에 부처가 나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인간이 되려면

질문 : 불교에서는 창조론보다는 진화론을 주장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짐승들이 인간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답변 : 부처님께서 ‘내 자리 아님이 하나도 없고 또 나 아님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생이 다 불성이 없는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 생명이 있고 다 움죽거리고, 식물도 모두가 다 생명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성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선법 도리에는 불성이 있다 없다 그걸 다 떠나서 이르는 거죠.

그런데 그 축생이 있기 이전에, 제가 항상 그러죠. 미생물이 나기 이전은 억겁을 통해서 거쳐 오면서 그 모습 모습, 갖가지 모습을 우리는 다 가지고서 화해서 살면서 구르면서 이날 인간이 되기까지 그렇게 어려웠노라고요. 그래서 살면서 순간순간 진화돼서 창조가 되고 하는 그 찰나찰나가, 우리가 금방 마음이 변해서 이 마음이 들고 이 마음 변해서 저 마음이 들듯이 모습도 그렇게 찰나찰나 변화한 거죠. 그리고 마음이 진화돼서 우리가 차원이 높아지니까 바로 진화율도 커진 거죠.

어느 무신이, 즉 말하자면 어떠한 그 물질적이 아닌 어느 귀신이 사람의 형체를 보고야 자기가 그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나왔다 합니다. 사람의 모습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사람으로서 태어날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옛날뿐만 아니라 어떠한 짐승이라도 사람의 탈을 봐야만이 진화된다고 합니다. 또 백 년을 묵은 구렁이도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을 타고 나야만이 부처님의 뜻을 알 수 있을 텐데, 사람의 모습을 타고 날 수가 없어서 사람이 사는 데 내려와서 간장을 먹고 사람을 보고, 숨어서 사람을 해치지 않으면서 백 년을 또 공부해야 사람의 모습으로서 탄생을 한다 합니다. 백 년이 꼭 백 년이 아니라 한순간도 백 년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가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이 어떻게 생각이 납니까? 그래서 인간은 그 생각 자체가 그 생각이 날 수 있는 무한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짐승이나 축생이나 이런 것들도 인간을 보고서 인간이 하는 대로 눈여겨 보고 듣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가까이 하지 않는 짐승들은 사람 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얘깁니다. 또 그 모습을 가지고 연방 굴러야만 하니깐 말입니다. 그래서 빨리 진화되는 그러한 축생이나 짐승들, 즉 말하자면 소, 말, 돼지, 개 이런 거는 사람 될 확률이 상당히 아주 많은 거죠. 그래서 ‘소는 조상’ 이라고, 사람하고 너무 접촉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개고기도 먹지 마라.” 한 것도 개하고 사람하고도 아주 가까운 거죠. 고양이도 그렇고 모든 게 그렇습니다. 제일 우리 사람 가까이에 있는 것이 축생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축생이 그 사람 될 확률이 높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것이 머리가 아둔해서 진화가 늦으면 늦는 대로 그 모습을 가지고 또 떠돌고 떠돌고 떠돌다가 어느 때 한순간 ‘아! 이 고통 때문에 난 못 견디겠다. 저 사람들은 우릴 가지고 이렇게 마음대로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사람의 모습을 갖겠죠. 이 마음에 모든 게 달려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 축생을 축생이라고 보지 마라. 사랑하라. 내 생명과 같이 아껴라.” 남의 생명을 내 생명으로 알아야지 만약에 그것을 살생을 한다면 곧 살생이 되는 거죠, 죽인다면. 그러나 우리가 이 도리를 알아서 그 축생 그 자체도 바로 나 아님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바로 우리도 예전에 억겁을 거쳐 올 당시에 바로 우리의 몸도 그렇게 축생의 몸을 타고 나서 굴러왔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축생도 나의 몸이요, 내 마음이요, 내 생명이라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자비를 베풀 수 있을 때 비로소 부처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죠. 보살이라고 하고요. 법신이라고 하고.

그러니까 우리가 남남인 것이 하나도 없어요. 남의 몸이 하나도 없고요. 우린 한 번씩은 다 거쳐 왔으니까요. 우리가 높게 이렇게 됐다고 해도 만약에 얕은 게 없다면 높은 게 없듯이 축생이 없다면 큰 짐승들도 없거니와 인간도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있다 하면 없는 것이고 없다 하면 있는 것이니, 이것이 모두가 다 우리들의 살림살이요, 진리요, 불법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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