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믿음 편 10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가 남긴 삶의 흔적들을 더듬어본다. 그를 추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때론 함께 자주 갔던 공원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있기도 하고, 미치도록 보고 싶을 때는 사진이나 유품을 꺼내놓고 펑펑 울기도 한다.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49재(齋)를 지내기도 하고 떠난 날이 다가오면 제사를 모시기도 한다. 이렇게 고인을 추억하면서 산 자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런데 떠나간 이의 사진이나 그림이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면 어떨까? 무척이나 아쉬울 것이다. 이때는 무덤을 찾거나 그의 체취가 배어있는 유품을 보면서 아픈 마음을 달래는 수밖에 없다. 보통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그러한데, 위대한 성인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석가모니 붓다가 바로 그랬다. 붓다가 열반에 든 후 사람들은 그를 추억하고자 했으나, 그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불상은 만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리를 완전히 깨달은 위대한 성인은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전통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붓다를 추억했다.

붓다는 80세의 나이에 열반에 들었다. 그때 붓다의 유훈에 따라 재가자들이 다비식을 거행했는데, 여덟 섬 너 말의 사리(舍利)가 나왔다고 한다. 다비식에 참석한 여덟 나라의 임금들은 서로 붓다와의 인연을 강조하면서 사리를 자기네 나라로 모시겠다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결국 공평하게 여덟 등분으로 나누어 각자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탑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봉안하였다.

물론 붓다의 직접적인 숨결이 남아있는 가사나 발우 등도 그를 추억하고 숭배하는 주요 물건이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설법을 상징하는 진리의 수레바퀴인 법륜(法輪) 등도 그를 추억하는 상징물이었다. 붓다의 사리를 모신 탑이 세워지고 난 후에 사람들은 그곳을 찾아 꽃과 향 등으로 예경하고 진리의 스승을 추억하였다. 불탑이 이제 신앙 공간으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당시 탑은 오늘날과 달리 사원 안에 있지 않았다. 탑이 사원으로 유입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절은 비구, 비구니들이 관리하였고 탑은 별도의 장소에서 재가자들이 운영하였다. 공부와 수행의 공간인 사원과 붓다의 사리를 모신 탑이 각자 독립된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싶으면 절을 찾았고, 그가 그리울 때면 탑을 찾아가 추모하고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이처럼 자유로운 불탑신앙이 가능했던 것은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소카 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인도 전역에 8만 4천의 탑을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편안하게 순례할 수 있도록 도로를 정비하고 휴게소를 만드는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오늘날로 보자면 국책사업으로 선정해서 수많은 불탑을 조성한 것인데, 무리한 재정투입으로 국가의 위기를 초래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불교에서 그를 전륜성왕(轉輪聖王), 즉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성스러운 임금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인도 전역에 불탑이 조성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성지를 순례하는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다. 그들은 탑에 꽃과 향, 일산 등의 공양물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저마다의 소망을 빌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참배객들에게 붓다의 생애와 가르침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로 보자면 종교문화해설사 역할을 한 셈인데, 그들이 곧 법사(法師)의 원형이다.

붓다는 자신의 장례를 승려가 아닌 재가자에게 맡겼다. 그들은 불탑을 조성하여 붓다의 사리를 모시고 추모하였다. 그리고 훗날 불탑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붓다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는데, 그것이 곧 대승불교 운동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불탑은 대승불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장례를 재가자에게 맡긴 붓다의 마지막 유훈이 그저 우연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