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으로 이끄는 ‘열려진 초대’
깨달음으로 이끄는 ‘열려진 초대’
  • 김원숙 미학자
  • 승인 2019.03.14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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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의 미학
어느 봄날의 료안지. 석정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단순한 공간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상당수의 현대 작가들은 석정에서 동양적 서정성을 체험했고, 선불교의 정신적 특질을 그들의 작품 세계에 차용하기도 했다.

료안지를 찾아 나선 아침은 고요하고 심심했다. 요시다 겐코(吉田兼好, 1283~1352)가 쓴 수필집 <도연초> 2백44단의 절제된 표현과 함축적인 글 속에는, 칼날 번뜩이는 전국시대를 살았던 일본 중세인들의 인생무상 정신과 자연, 인생, 생활, 학문, 정치, 예능, 풍속 등 다채로운 모습들을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첫 머리로 시작하는 ‘무료하고 쓸쓸한 나머지’는 일본 고전 중에서도 가장 멋있는 서두라고 알려져 있다. 료안지(용안사, 龍安寺)는 일본 불교 임제종의 사찰이다. 일본 임제종은 간화선 수행을 중시하는 점이 우리의 조계종과 같다. 료안지는 기요미즈데라(청수사, 淸水寺)나 킨카쿠지(금각사, 金閣寺)에 비해 관광객이 적어 상대적으로 한적한 곳이다.

겸양과 배려의 아름다움
일본 미의식 함축 표현
선불교 특징 ‘지족’ 반영

료안지 인근의 땅은 원래 명문 후지와라 가문 소유였다. 헤이안 시대 말기인 11세기에 후지와라 사네요시가 쿄요지(鏡容池) 연못을 조성하였고 그 옆에 다이주인(大珠院)이라는 사찰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후일 전국시대에 이르러 호소가와 가츠모토가 이 땅을 얻어 1450년 료안지를 건립하였는데 전란 중 소실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료안지는 그 아들인 마츠모토가 1488년에 중건한 건물이다.

료안지의 석정과 같은 정원을 흔히 가레산스이(枯山水)라고 부른다. 연못이나 개울처럼 물과 관련된 요소들을 배치하지 않고 바위, 돌, 모래 등을 사용하여 자연의 경치를 표현하는 전통적인 정원 양식으로, 주로 선불교 사찰에서 조성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담양 소쇄원처럼 개울을 두고 형성한 원림이나 궁궐 건축에서 연못이 있는 정원을 볼 수 있듯, 일본 역시 세도가의 정원은 주로 물을 가운데 두고 주변을 돌면서 감상하는 치센카이유(池泉回遊) 형식의 정원이 흔하다. 그러나 일본의 미를 대표하는 정원으로는 가레산스이 정원, 특히 료안지의 석정이 유명하다. 가레산스이가 당초 선종 불교의 사찰에 기원을 둔 정원 양식이기에 서양에는 ‘선의 정원(Zen Garden)’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방장 건물 주변에 만들어진 회랑을 돌아 석정에 이르면, 아담한 네모꼴의 뜰에 곱게 깔린 흰 자갈과 여기저기 무심히 놓여진 여러 개의 바위들을 볼 수 있다. 빗으로 머리를 빗은 듯 가지런하게 고무래질 된 흰 자갈은 마치 바다의 잔물결과 같고, 그 물결치는 흰 자갈 뜰에 놓인 바위들은 물 위에 떠있는 섬들을 연상하게 한다. 뜰에는 물이 없고, 화초도 없다. 오래된 누런 흙담과 살짝 드러난 바위 밑 땅에 드문드문 이끼가 끼어 있을 뿐이다. 툇마루에 앉아서 보면 얼른 느끼기는 힘들지만 이 정원은 관찰자 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다고 한다. 이것은 배수를 좋게 하기 위해서다.

이 정원에 놓은 돌은 모두 열다섯 개다. 그러나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돌 하나는 다른 돌에 숨겨져 열네 개의 돌만 보이도록 놓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관람객 중에는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돌의 개수를 세는 사람도 있다. 왜 유독 열다섯 개인지, 왜 한 개는 안보이게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있으나 정설은 없는 듯하다. 음력을 주로 사용하였던 동양에서는 15는 보름 즉, 완전을 뜻하는 숫자인 반면, 14는 하나가 부족한 숫자이며 결핍 또는 부족을 의미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에서는 ‘사물의 완성 뒤에는 붕괴가 시작된다’는 사상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불완전한 숫자인 14를 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정도 크기의 정원에 여기 저기 돌을 놓다보면 하나가 겹쳐서 안보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라며 석정의 돌 배치는 순전히 우연의 산물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방장 건물의 뒷편에는 우리나라 사찰의 감로수 물확과 비슷한 지소쿠노 츠쿠바이(지족의 준거, 知足の準距)라는 것이 있다. 맷돌처럼 둥근 돌의 가운데를 네모꼴로 파서 대롱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두는 것인데, 다실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입을 깨끗하게 씻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 ‘지족의 준거’는 네모꼴의 물받이를 입구(口)자로 하여 오유지족(吾唯知足)이라는 네 글자가 합자되어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조선시대 엽전과 흡사한 형태이다. 오유지족은 ‘만족함을 알라’는 의미이다. 또 이것은 바닥에 낮게 설치되어 있어 몸을 구부려야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제의적 정화의식의 형식과 아울러 자기를 낮추는 겸양의 의미도 있는 듯하다.

석정을 만든 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지족의 준거’를 비롯해서 료안지의 여러 모습을 살펴볼 때는, 석정의 돌에는 욕심을 버리고 만족함을 아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의 마음가짐으로 깨달음을 향해가기를 일러 주는 보다 큰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한편으로 석정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상당수의 현대 작가들은 석정에서 동양적 서정성을 체험했고, 이를 통하여 선불교의 정신적 특질을 그들의 작품 세계에 차용하기도 했다.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는 연주 활동을 목적으로 교토를 방문한 이후, 여기에서 영감을 받은 여러 작업을 남겼다.

지나치게 정돈된 작품은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기 어렵고, 반대로 자연스러움을 너무 강조한 예술 작품에서는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렵다. 이 정원은 시각적으로는 정돈된 균제미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균제와 자연미의 개념만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독특한 미적 특질 또한 지니고 있다.

문예, 극예술, 회화, 정원, 다도 등 예술미에 관련되는 많은 영역에서 일본의 미의식을 함축한 미적 개념으로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가 있다. 모노노아와레는 바로 옮기자면 사물에서 느껴지는 애상, 비애의 감정을 가리키지만, 모노(物)라는 말은 일본어에서는 단순히 특정한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하고 불특정한 사람, 사물, 사건, 사실들을 함축하여 사용되는 어휘다. 18세기 일본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견해를 인용하자면, 모노(物)는 객관적 대상세계를 뜻하는 의미지만, 인간의 주관적 정념인 아와레(哀)를 매개로 상호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독특한 정취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즉, 예술적 대상과 그것을 향수하는 주체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전체로서 물심여일의 세계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일본 미술계에서 한국 태생의 미술가로 주목받는 이우환 작가는 일본 현대미술의 중요한 사조 중의 하나인 모노하(物派) 그룹의 주요한 한 사람이기도 하다. 모노하 미술운동의 바탕에는 모노노아와레의 미적 사상이 있다.

또 다른 하나의 미적개념으로 유겡(유현, 幽玄)이 있는데, 이를 최대한 한자의 원래 뜻에 가깝게 옮기자면 ‘그윽하고 어두운’ 그 무엇을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말의 ‘멋’에 해당하는 개념을 외국인이 파악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유겡의 개념도 일본의 문화, 예술에 익숙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모노노아와레와 마찬가지로 유겡도 일본의 예술을 이해하는 주요한 개념 중 하나다.

“유겡은 사념에 잠긴 슬픔으로 물들어져 포착하기 어려우면서도 의미있는, 다시 말해서 절반이 드러나거나 암시된 미(美)라는 의미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오로지 돌과 자갈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정원이 있다. 그 정원은 한 조각의 물질적 자연이지만 우리들을 정관적(靜觀的) 존재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비교미학연구>, 엘리엇 도이치, 민주식 옮김, 미술문화)

정관(靜觀) 즉 ‘고요히 바라보기’는 석정의 미적 특질이다. 응시하는 사람의 시선은 반짝이는 하얀 자갈과 켜켜이 세월이 쌓여 풍화된 몇 개의 돌들을 향하고 있으나, 그것은 동시에 자신의 내면세계를 관조하는 하나의 명상이 된다. 이것이 석정의 모노노아와레이다.

말로 이야기할 수 없으며, 말을 넘어선 ‘포착하기 어려운 아름다움’ 이것을 석정의 유겡이라고 할 수 있겠다. 료안지의 석정은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열려진 초대’와 같다. 어딘가에 있을 열다섯 개의 돌 중 보이지 않는 하나를 찾으려고 애썼으나 결국 나는 보지 못했다. 벚꽃 흐드러지게 지는 어느 봄날, 교토 료안지의 석정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지는 벚꽃 가지로 돌아간다 보았더니 나비로구나.
아라키다 모리타케 (荒木田守武, 1473~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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