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3.1운동 불교적 의미와 과제
[3.1운동 100주년] 3.1운동 불교적 의미와 과제
  • 신성민 기자
  • 승인 2019.03.01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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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평등’ 외친 함성, 기억해야 이어진다
그림. 김홍인
그림. 김홍인

191931일 오후 1시 태화관. 만해 한용운, 백용성 스님을 비롯한 33인의 종교인들이 모였다.

33인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담당한 이종일이 가지고 온 선언서를 돌려 읽고, 만해 스님의 식사(式辭)를 들었다. 식사는 최린이 만해 스님에게 부탁했다.

우리는 신명을 바쳐 자주 독립국이 될 것을 기약하고자 여기 모인 것이니 정정당당히 최후의 일인까지 독립 쟁취를 위해 싸웁시다.”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에 맞춰 만해 스님의 선창으로 대한독립 만세가 제창됐다. 이내 첩보를 듣고 태화관으로 달려온 일본경찰대 80여 명이 민족대표 33인을 체포했다. 그와 동시에 탑골공원에서는 독립의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민족대표들이 일본경찰에 압송될 때 시내 곳곳에는 시민들이 몰려나와 독립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만해 스님은 경찰차 안에서 본 그 광경에 깊은 감회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만해 스님은 193218조선일보에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태화관 당시 명월관 지점에서 독립선언 연설을 하다가 경찰에 포위돼 한쪽에서는 연설을 계속하고 한쪽에서는 체포돼 자동차로 호송돼 가게 됐습니다. 그때입니다. 12~14세 돼 보이는 소학생 두 명이 내가 탄 차를 항해 만세를 부르고 일경의 제지로 개천에 떨어지면서도 불렀습니다. 그때 그 학생들이 누구이며, 왜 지극히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본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하였습니다. 그때 소년들의 그림자와 소리로 맺힌 나의 눈물이 일생 잊지 못하는 상처입니다.”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은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으로 폭발했고, 이는 한반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만세’
5월까지 전국서 들불처럼 번져
만해 따르던 중앙학림 학인들
지방 내려가 사찰만세운동 주도
3.1운동, 임정거쳐 현재로 계승

불교 독립유공자 서훈 104명뿐
근현대사 연구 통해 발굴 필요

불교, 3.1운동 촉발·확산 주역
이렇듯 3.1운동이라는 거국적인 평화 저항운동에는 종교인들의 노력이 있었다. 민족대표 33인에는 불교 2인을 비롯해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이 참여했다. 당시 신도 300만 명으로 최대 교세를 자랑한 천도교는 자체적으로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불교 역시 1918년 제주 법정사 투쟁을 비롯해 전국 사찰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으로 나아가는 역량이 갖춰져 있었다.

여기에 만해 스님과 백용성 스님이 독립선언을 위한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하며, 불교계의 항일운동 동참을 유도할 수 있게 했다. 실제 만해 스님은 3월 1일 하루 전 자신의 종로 계동 유심사로 자신을 따르던 중앙학림(동국대 전신) 학생 승려들을 불렀다. 유심사에 모인 10여 명의 학인들에게 만해 스님은 비밀리에 추진 중인 3.1만세운동 준비 소식을 알렸다. 당시 현장에 있던 김법린은 잡지 〈신생〉 창간호(1946)에 만해 스님이 발언을 이 같이 소개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 찬란한 문화를 가진 우리 민족이 자주 독립을 중외에서 선언함은 당연한 일이다. 군 등은 우리 뜻을 동포 제위에게 널리 알려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 특히 군 등은 서산, 사명의 법손임을 굳게 기억해 불교청년의 역량을 잘 발휘하라.”

이렇게 당부한 만해 스님은 천도교 측으로부터 가져온 선언서 3000매를 학인 스님들에게 전했고, 서울 시내와 전국 사찰에 배포토록 했다. 이들은 현재 인사동 소재 범어사 포교당에서 향후 활동 계획을 논의했고,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 직후 시가행진하며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또한 불교계 운동 조직체 결성과 사찰을 중심으로 거족적 독립만세운동 전개, 동지 규합 등을 결의했다.

중앙학림 학인 스님들의 결의는 자연스럽게 전국 사찰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만세 운동의 기반이 됐다. 이들은 자신의 연고 사찰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독려했고, 지방학림에서 수학하고 있던 학인들과 사찰 대중들도 긴밀히 호응했다.

실제 현재 만세운동이 확인되는 14곳의 사찰들 중 적지 않은 사찰이 중앙학림과 지방학림 학인 스님들의 연계로 이뤄졌다.

해인사의 경우 도진호·김봉신·김용기 등이 해인사 학승들에게 선언서를 보냈고, 중앙학림 학생인 김봉신은 시위를 권유키도 했다. 이에 따라 지방학림 30여 명은 선언서 수천 매를 인쇄하는 등 사위를 준비했다. 이를 바탕으로 3월 31일 해인사 홍하문 만세 시위가 진행됐다. 당시 시위에는 해인사 승려 200여 명과 주민 200여 명이 참여했다.

범어사 만세운동은 김법린과 김상헌이 내려와 권유하며 이뤄졌다. 현재 3월 18일 동래장터서 만세운동이 이뤄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시기는 논쟁 여지가 있다. 분명한 것은 학승 및 지방학림, 명정학교 학생 30여 명이 결사대를 조직했고, 태극기 수백여 개와 격문·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운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100명의 학인이 체포됐고, 이들 중 34명이 실형을 받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4월 4일 표충사 입구 단장면 장날 만세운동도 주목할만 하다. 표충사 만세운동은 통도사 학승 5명이 3월 20일 표충사를 방문에 운동을 권유했고, 이를 받아들인 이장옥·구연운·오학성·손영식·김성흡·이찰수 등 표충사 사중 승려가 운동을 주도했다. 표충사 만세운동에는 승려 50명과 주민 1500명이 참가했다. 이중 364명이 검거돼 71명이 일본 검찰에 송치됐다.
지방학림 학인들의 적극적인 만세운동 참여에 대해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3.1운동의 불교적 전개와 성과’에서 “중앙학림 승려들의 시위 촉구 영향이 컸으며, 이에 지방학림 청년 승려들의 자생적 결단도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주지 계층의 참여는 미비했다”며 “지방 사찰의 만세 시위는 불교의 만세운동에 그치지 않고 지역 만세운동으로도 파급됐다”고 평가했다.

또한 주목할 것은 불교계 인사들의 옥중 항쟁이다. 만해 스님은 선언식 당일 대표들에게 변호·사식·보석 금지라는 3대 옥중 원칙을 제시했고 이를 철저하게 솔선수범해 지켰다. 또한 일제가 주관하는 재판정에서 독립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이는 1919년 7월 10일 제출한 ‘조선독립의 서’에서 잘 알 수 있다. 만해 스님은 한국이 독립해야 하는 이유, 독립운동의 당위성,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시인 조지훈은 이를 최고의 명논설로 꼽기도 했다.

백용성 스님은 옥중에서 불교 혁신 및 대중화의 서원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조선어로 된 경전 번역 불사를 다짐했는데 당시를 백용성 스님은 이렇게 회고했다.

“(옥중에서) 각각 자기들의 신앙하는 종교서적을 청구해 공부하며 기도하더라. 그때에 내가 열람해보니 모두 조선글로 번역된 것이오. 한문 서적은 별로 없더라. 그것을 보고 즉시 통탄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큰 원력을 세운 것이다.”

1921년 3월 출옥한 백용성 스님은 삼장역회를 구성해 민중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경전 한글화 불사를 이어갔고 10종의 경전을 한글화 했다.

김광식 교수는 이 같은 불교 근대화·자주화와 현실 인식 제고 등이 불교계에 거시적 성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3.1운동 이전부터 성장한 불교 청년층은 3.1운동을 주도하고 조선불교청년회 등을 조직해 불교 제반 문제를 민족의식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했다”면서 “교단적으로는 종단 건설 운동을 추진해 자주적 자생적 종단이 부재한 현실을 극복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3.1운동 임정 그리고 불교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백암 박은식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1919년 3~5월까지 3개월 간의 독립만세운동 집회는 1542회가 이뤄졌으며, 참가인원 202만3098명에 달한다. 이중 4만6948명이 왜경에 붙잡혔으며, 부상자는 1만5961명, 사망자는 7509명에 이른다. 거족적 민중 만세운동에 대해 일제는 폭력 등을 동원해 억압했다.

불교를 비롯한 독립운동지도자들은 3.1운동 직후 입헌민주공화제 국가를 표방한 임시정부 수립을 노력했고, 그 성과는 1919년 9월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나타났다.

상하이 임시정부에는 적지 않은 불교 인사들이 참여했다. 특히 3.1운동에 참여했던 중앙학림 출신 승려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성욱·김법린·신상완·김대용이다. 또한 월정사 승려 이종욱·송세호도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들은 국내 불교계와 연계해 독립자금을 지원·연계하는 데 일임을 담당했고, 〈혁신공보〉라는 비밀 항일신문을 만들어 국외 항일 소식을 국내 각처에 전했다. 봉선사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운암 김성숙은 사회주의 운동과 항일운동에 매진해오다가 1942년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참여했다.

또한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있어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백초월 스님이다. 스님은 3.1운동 직후 서울로 와서 중앙학림에 민단본부를 결성하고 중앙학림 학인들을 승려들에게 보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게 했다. 백초월 스님은 이를 불교계 루트를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사들은 ‘의용승군제’를 추진하기도 했으며, 이를 위해 대한승려연합회가 구성돼 1919년 11월에는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가 발표됐다.

'불교계 임정 참여와 지원활동'를 발표한 이동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장은 “대한승려연합회의 선언서는 1919년 10~11월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한 승려들의 주도하에 작성됐다. 이에 따라 3.1운동에 참여한 불교사상을 극명하게 표출하고 있다”며 “3.1운동 이후 불교계의 민족의식은 한층 고양됐다. 운동을 경험하면서 사회 전반에 파급된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숨은 역할 불교 인물들 발굴해야
3.1운동 직후부터 해방까지 민족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한 스님들과 불교계 인물들은 적지 않다. 하지만 불교계 항일인물은 만해 스님, 백용성 스님 등 몇몇 스님들에 집중돼 있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사람은 1만 5000여 명으로 이중 불교 인사는 104명이다.

김성연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원의 ‘독립유공자 현황으로 본 불교계 독립운동 양상’에 따르면 현재 불교계에서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진하는 사례는 2015년 우봉 스님과 석전 박한영·오성월 스님 정도다.

이에 대해 김성연 연구원은 “불교계 독립유공자들은 국가 공헌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현 조계종단 건립의 일등공신으로 칭송할만 하며, 종단 차원에서 적극적인 발굴 작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면서 “객관적 자료의 수집과 구술 자료의 검증을 철저히 보완해 불교계 독립운동의 실상과 자랑스러운 역사를 간직할 수 있도록 정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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