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보다 더 서글픈 망각의 장소
수난보다 더 서글픈 망각의 장소
  • 김경집 교수
  • 승인 2019.02.0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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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성 제일 가람이었던 원각사
보호각 속의 국보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 근현대사의 수난을 그대로 보여준다. 더욱 큰 문제는 수난의 역사를 망각하고 있는 우리들이다.

한양 천도와 흥복사(興福寺)
서울 성동구에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이 있다. 한자를 풀어보면 십리를 더 가라는 뜻이다. 도성을 세울만한 곳을 찾으라는 태조의 명을 받은 무학대사가 전국을 살펴보았다. 이곳에 이르러 도성을 세울 만한 곳을 찾았다고 기뻐하였다. 그러자 그곳에서 땅을 갈고 있던 노인이 게으름 피는 소에게 무학같이 어리석다고 책망하였다. 의아해하는 무학에게 십리를 더 가면 궁을 세울만한 좋은 자리가 있는데 이곳에서 헤맨다고 일러주면서 사라졌다. 무학이 그 말을 듣고 십리를 가니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도달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국사 시책의 장소
배불정책에 점차 쇠락해
불자들조차 ‘원각사’ 의미 망각

이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대략 경복궁까지 십리가 되는 이곳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울은 고려시대 남경으로 칭하면서 중요시 하였다. 고려 숙종은 이곳으로 천도할 생각으로 궁을 지었으나 옮기지는 않았다. 
고려시대 남경인 서울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불교가 국교인 까닭에 사찰도 많았다. 이곳에 있던 사찰이 흥복사였다.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는 7년 5월 오래 동안 가뭄이 들자 이곳에서 운우경(雲雨經)을 강설하며 기우재를 지냈다. 8월에는 첫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대상재(大祥齋)를 흥천사와 흥복사에서 지냈다. 많은 국행불사를 이곳에서 봉행되었다. 국가를 위한 국행불사 관례는 불교배척이 심했던 태종과 세종 때에도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흥복사는 도성 안에 있었던 탓에 국사시책에 필요한 장소로 이용되는 일도 많았다. 세종 4년 봄에 삼남에 가뭄이 들었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대중들은 일거리를 찾아 무작정 한양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도착해서 죽는 자들이 속출하자 세종은 8월 이곳에 진제소(賑濟所)를 두어 굶주리는 자를 모아 구휼하였다. 지금으로 보면 무료급식소이다. 그 덕분에 생명을 보전하여 살아난 자가 많았으니 이 또한 부처님의 가피이다.
조선조 배불정책은 흥복사의 사격을 점점 축소시켰다. 세종은 7년 호조에서 장차 집터가 나날이 줄어들고 집이 나날이 허물어지는 폐단이 있을 것이므로 이곳을 중부(中部)라는 명칭을 붙이고 관리자를 두자고 하였다. 세종이 그 안을 받아들여 행한 덕분에 얼마간이라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도성 안에서도 요충지였던 까닭에 각 관청이 탐을 내었다. 세조 3년(1457) 경에는 이곳에 관습도감청(慣習都監廳)이 들어섰다. 10년(1464)에는 악학도감(樂學都監)이 들어서면서 사찰의 경계가 점점 줄어들었다. 11년(1429) 1월에는 중국 사신들이 오면 묵는 태평관을 고쳐 지으려 할 때 이곳이 거론되는 등 수난은 계속되었다.

원각사 창건과 사격
흥복사는 많은 수난을 겪으며 대중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당우가 사라지고 토지마저 유지하기 힘든 때 원각사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은 효령대군 이보 덕분이다. 세조 10년 대군이 회암사에서 원각 법회를 베풀 때 여래가 출현하고 감로가 내렸다. 승려 3인이 탑을 돌며 정근할 때 그 빛이 번개와 같고 대낮과 같이 환하였다. 무지개가 공중에 가득 찼다. 사리가 수백 개로 분신하는 이적도 일어났다. 그 사리를 함원전(含元殿)에 공양하니 또 분신하여 수십과가 되었다. 
이적을 체험한 세조가 10년 5월 2일 승정원에 명하여 이곳에 원각사를 세우고자 하였다. 조성도감을 두고 종친과 주요 대신들과 창건을 의논하였다. 세조는 때때로 이곳에 가 공사의 진행을 살필 정도로 관심을 기우렸다.
그런데 흥복사가 터가 좁아진 탓으로 인근 민가를 매입할 수밖에 없었다. 세조는 승지를 영의정 신숙주에게 보내 의견을 물었다. 도성 안에 있는 곳을 감안해서 가격을 세 곱을 쳐서 지불하라는 의견을 따라 근방 인가 2백여 채를 매입하였다. 이렇게 든 액수가 정포(正布)가 4천 4필(匹), 쌀이 수백 석(石)이고 보리가 1백여 석이었다.
세조는 원각사를 크게 세우면서 사격을 갖추기 위한 불사를 행하였다. 먼저 11년(1465) 1월 16일 5만근이 되는 범종이 먼저 조성되었다. 한양에 있는 동이 부족해 개성부, 경기, 충청, 경상, 그리고 전라에서 동을 보내와 조성할 수 있었다. 그해 4월 7일 원각사가 낙성되었다. 법당의 기와는 청자로 조성하였는데 8만장이 들었다. 12년 7월 15일에는 백옥의 불상이 조성되자 함원전에 모셔와 점안식을 하였다. 원각사에 내려진 전지가 3백결이었다.
마지막 남은 불사가 탑이었다. 불탑조성은 13년(1467) 3월 6일 이전에 완성되었다. 일본의 승려 도은(道誾) 등이 세조를 뵙고 “원각사의 탑이 천하에서 제일이라 하니 원컨대 오늘 구경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세조는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에 가서 볼 수 있도록 예조에 명하는 것으로 볼 때 이 무렵 탑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각사 10층탑은 높이가 12m에 이르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석탑이다. 대리석으로 조성한 까닭에 탑신에 표현된 변상도가 정밀하다. 기단과 탑의 3층까지는 ‘아(亞)’자 모양이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지붕과 공포를 표현하여 목탑 형식을 띠고 있는 조선 석탑의 백미이다. 그래서 조성과 함께 중국과 일본에 그 아름다움이 알려져 조선에 오는 승려들은 이 탑을 보고 싶어 하였다.
외형적으로 아름다움을 간직한 탑이지만 10층탑의 가치는 1층에서 3층까지 동서남북과 4층 남쪽에 조각된 13회의 변상도에 있다. 남쪽 1층부터 삼세불회, 2층 화엄회, 3층 소재회, 그리고 4층 원통회이다. 동쪽을 보면 1층 미타회, 2층 다보회, 3층 약사회이다. 북쪽은 1층 용화회, 2층 법화회, 3층 능엄회이며, 서쪽은 1층 영산회, 2층 원각회, 3층 전단서상회이다. 대략적으로 보더라도 과거 현재 미래 삼세부처님과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생각이 표현되어 있다. 
이런 13회 변상도 가운데 좀 특별한 것은 먼저 3층 소재회 변상도와, 4층 원통회, 북쪽 3층 능엄회, 그리고 서쪽 3층 전단서상회를 들 수 있다.
남쪽 3층 소재회는 모든 어려움에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먼저 죄를 멸하고 삼재팔난과 일곱 가지 어려움을 없애 궁극에는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는 밀교적 의식인 네 가지 호마의 하나로 신라 말에 들어와 고려시대 크게 유행한 의례이다. 이런 소재회에 의해 10층탑은 현교와 밀교를 아우르는 탑임을 알 수 있다.
남쪽 4층 원통회는 관세음신앙이다. 관세음보살은 모든 중생의 소리를 듣기 때문에 원통교주라 한다.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한 탑의 13변상도 가운데 관음보살을 상징하는 원통회가 들어간 것은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관음신앙의 중요성 때문이다.
북쪽 3층 능엄회는 〈수능엄경〉을 설하는 법회이다. 일체의 선정을 깨닫기 위해 정진하는 선종에서는 대중의 안거를 기원하기 위해 아침에 능엄회를 행하였다. 그런 까닭에 〈수능엄경〉은 진위여부에도 불구하고 한국선종에서 중요시 했던 경전이다. 
서쪽 3층 전단서상회는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마야부인을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설법할 때 지상에선 부처님의 행방을 몰라 제자와 신도들이 우왕좌왕하였다. 그러자 우다야나왕이 전단향 나무로, 파사닉왕이 자마황금으로 여래상을 조성하면서 진정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세조 13년 4월 8일을 기해 원각사에서 연등회(燃燈會)를 베풀고 탑의 조성을 대대적으로 축하하였다. 

원각사의 계속된 수난
이렇게 세워진 원각사였지만 오래지 않아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윤씨는 죽으면서 성종에게 “비록 부처를 좋아하지 않으나 내가 죽은 뒤에 더럽혀지고 허물어지게 버려두지는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성종 14년(1483) 8월 사람의 출입을 전혀 금지하지 않아 불좌(佛坐)의 채단(彩段)이 도둑맞고 찢겼다.
연산군 11년(1505) 2월에는 이곳에 장락원(掌樂院)을 두어 기생 천여 명과 악사 천여 명을 두었다. 중종 1년(1506)에는 도성 안의 절을 다시 세우지 말라는 명에 의해 중창되기도 어려웠다. 국가가 방치하자 인근 백성들이 원각사의 기와를 가져다 쓰고, 관청에서 목재를 가져다 썼다.
대종도 수난을 당했다. 중종 28년(1533) 성 밖에 사는 관리들은 집이 도성에서 멀어 새벽 종소리와 저녁 북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이 관아로 출근할 때 지각을 하자 정릉의 종을 남대문에 옮기고, 원각사의 종을 동대문에 옮겨 새벽과 저녁에 쳐서 들리도록 했다. 그 후 두 종은 중종 36년(1541) 6월 1일 남대문의 종은 군자감, 동대문의 종도 둘 만한 곳이 없어 훈련원에다 옮겨 놓았다. 그렇게 방치되다가 명종 18년(1563) 11월 두 종을 내수사로 보냈다.
사격은 급속도록 쇠락해졌다. 이렇게 쇠락한 원각사는 근대에 이르면 10층탑 옆까지 민가가 들어선 모습이다. 사찰의 모습으로 볼 때 탑의 북쪽 어딘가가 대웅전이었을 것인데 흔적조차 알 수 없다. 그런 모습에서 공원으로 변모하여 지금의 모습을 유지한 것은 영국의 J. M. 브라운이다. 탑이 있어 탑골이라 불렸던 이곳이 서울 최초의 근대식 파고다 공원이 된 것이다.
근대에도 수난은 이어졌다. 1902년 군악대가 서쪽 부지에 세워졌으나 1907년 7월 통감부의 명령으로 이 군악대가 해산되면서 건물은 방치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공원의 관리권도 총독부로 넘어갔다. 총독부는 매년 예산을 책정하여 관리하였다. 1919년 9월부터 경성도서관으로 사용되었다.
원각사의 수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92년 5월 탑골공원으로 개칭된 원각사 터에 가면 10층 석탑이 유리창에 갇혀 있다. 비바람과 새의 분뇨에 취약한 대리석 탑신을 보호하기 위한 문화재청의 고육지책이다.
이런 형식적인 수난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곳을 오고 가는 불자들도 탑이 국보 2호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망각의 정신적 수난이 더 큰 재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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