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됐든 잘됐든 걸리지 마세요

한마음 공부를 하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요

문) 좀 어리석은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한마음 주인공 공부를 하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요.

답) 여러분의 생각이 구태의연하게, 즉 말하자면 관습에 의해서 매달리고 앨 쓰고 돌아간다면 그게 바로 운명이고 팔자인 것입니다. 팔자 운명이 어디 붙어 있습니까? 모두가 생각하기에 달린 겁니다. 그러니까 그 팔자 운명에 매달리지 말고 남이 말하는 데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 “내년에 죽는다.”, “내년에 잘못된다.”, “삼재가 들었다.” 한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믿고서 내 중심을 상실하고 그렇게 한다면 그냥 주인이 없는 빈집이 돼 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우주와 더불어 리드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가질 수 있느냐.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으로 핑계를 대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이라는 것은, 즉 말하자면 공생·공심·공용·공체·공식화할 수 있어야만이 그게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벌레로부터 나 아님이 없느니라. 부처님 마음에서 태어난 천백억화신은 바로 응신으로 화해서 여러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여러 벌레들이 원하는 대로, 짐승들이 원하는 대로 모두 나투어서 응신으로서 응해 주신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아픔이 하나도 없고,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자리 아님이 없고, 늙으나 젊으나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름이 부처인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이 그런 능력과 더불어 우리가 실천을 할 수 있느냐. 지금 우리 마음이 소소한 거를 가지고 해 본다면 이런 거 뭐, ‘안 된다, 된다’ 이런 거에서 여러분은 그만 매달리고 말죠. 그러나 안 되고 되는 것은 다 그 가운데 있는 겁니다. 안 되는 거, 되는 거 그 가운데 있는 겁니다. 이 안 되는 것 되는 거를 다 아귀에 쥐고 있잖습니까, 자기가. 자기 자신이 쥐고 있는 겁니다.

잘못됐더라도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닙니다.
순간 돌아가니까 겁내지 말고
그냥 그냥 놔 버리세요.

그러니까 주인공이라는 뜻은 움죽거림과 마음 내는 거와 근본과 그렇게 해서 세 가지가 한데 합쳐서 여러분 개개인이 돌아가는 거를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그럼 여러분이 다 주인공이죠, 모두가. 여러분이 다 부처님이시듯. 그러면 그 주인공은 시공을 초월해서, 안에도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거니와, 더불어 같이 말입니다. 여러분 육신 속에도 천차만별로 모습이 돼 있고, 천차만별의 의식에다가 생명들이 헤아릴 수 없죠. 그런데 이 개체 하나가 세계와 같다 이겁니다. 이 개체, 몸 하나가. 이 몸속에도 세계가 지금 돌아가고 있습니다. 공장이 돌아가고 세계가 돌아가요. 그런데 그 한 공장이 만약에 침체됐다, 부도가 났다 이런다면은 사람의 몸, 집 자체가 쓰러지게 되죠.

그러니까 그런 거를 한번 냉정하게 판단을 해 보세요. 몸뚱이 자체가 나만이 사는 내 것인가. 더불어 같이 사는 한 개체죠. 그러고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그래서 고정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주인공이다. 이렇게 모두가 이름이 주인공입니다. 여러분이 수억겁 전부터 진화돼서 온 그 모습이…, 자기 육신 속을 들여다보면은 다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인과로 인해서 바로 자기한테 인연이 돼서 자기 영혼 근본과 더불어 부모의 정자 난자를 빌려서 날 때에 바로 같이해야만이 이게 한 개체의 덩어리가 되니깐요.

또 한 가지를 빼놓을 수 없는 게 뭐냐 하면, 그렇게 작으냐 크냐, 많으냐 적으냐 이런 것에 따라서 자기가 과거에 살아나온 그 차원에 따라서, 이 몸속에 인과성이 많으냐, 영계성이 더 많으냐, 유전성이 더 많으냐, 아니면 세균성이 많으냐, 업보성이 많으냐. 이 다섯 가지의 문제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작으냐 크냐에 따라서 다를 뿐이지 누구나가 다 있습니다. 왜냐. 과거에도 이렇게 살았으니까요.

이렇게 자동적으로 입력이 된 대로 나오는 거를 팔자 운명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팔자 운명이 없다 이런 거죠. 나오는 대로 거기다가 되입력을 하니까,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니까 팔자 운명이 붙을 자리가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진짜 우리가 이런 공부 하는 것이 천 년에 한 번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는 공부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 자체가 어떻게 해야만이 그런 실천을 하면서 갈 수 있나를 얘기하기 이전에 이 소리를 안 하면 안 되겠기 때문에 이 소리를 지금 한 겁니다. 왜냐하면 내 몸속에 있는 모든 생명의 의식들이 내 마음을 따라 줘야 할 수 있는 겁니다. 우주가 별성을 수없이 낳듯이, 블랙홀이 수없는 그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 근본만 들여서 다시 생산을 시키듯이, 우리 인간은 인간대로 이 마음 자체가, 이 모든 더불어 같이 사는 이 개체의 의식들이 다 내가 마음을 내는 대로 따라서 하는 거니깐요. 내가 마음만 제대로, 거기다가 나오는 대로 되놓을 수 있다면 또한 그 헤아릴 수 없는 의식들이 따라 주니까요.

그래서 예전에 이러한 문제가 있었죠. 나라가 쇠퇴해서 망하게 되니까 싸움이 벌어졌더랍니다. 이거는 방편상 얘기하는 겁니다. 싸우는데, 부처님 경계에는 급할 때에만 그거는 쓰는 거지 급하지 않으면 쓰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쉽게 말하자면 ‘이원대법’이고, 예전에는 ‘이보경계’라고 했습니다. 이보경계. 그 대원법칙. 이 모두가 이원대법으로 얘기를 하든지, 이렇게 쓰인 겁니다.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여러분이 한마음, 이 속에 들어 있는 그 의식들과 더불어 안에서는 안대로다가 모든 그 의식들을 다, 급하니까 내보내서 그 군사들한테 전부 투입한 겁니다. 투입을 한 거예요. 여러분, 이해가 안 가죠? 마음은 체가 없는 거라 영에다가 영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죠. 그래서 이원대법이 가능하다는 얘기죠. 그러면 그 능력이 몇 배로 솟아나죠.

그래서 이렇게 싸우는 데에 모두 군사는 적고 그러니깐 저쪽 군사들한테 안이한 마음을 투입을 했단 말입니다. 너무 또 적으면 적은 대로 저런 나무 이파리도 군사로 쓰였다 이겁니다. 얘기를 하려면은 말로 어떻게 다 할 수가 없어요. 이제 두고두고…. 그렇게 하는 데에 왜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만약에,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별성은 못 되겠소, 태양이 못 되겠소, 우주가 못 되겠소? 블랙홀이 못 되겠소, 다른 혹성이 못 되겠소?

날아다니는 새도 마음이 하나가 되면 ‘앉아라!’ 하면은 앉게 되는 거예요.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도 내 마음이 하나가 되면은 망하게 하려면 망하게 하고, 흥하게 하려면 흥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이 도리예요. 그러니까 이 도리를 배우는 사람은 항상 남을 이익하게, 내 몸과 같이 이익하게 하라 이런 뜻이죠. 이 마음공부를 해 가지고 나쁜 마음으로써 자기 원한심을 품고 톡톡 건드리면 손오공밖에는 더 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 살아나가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우주 세계도 문젭니다. 그냥 허탕하게 볼 게 아니에요. 우리는 지금 중세계예요. 승진을 하느냐 내려가느냐 문제가 달린 중세계예요. 하세계는 따로 있느냐? 하세계도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기 그냥 하세계도 살고 있어요. 우리가 보죠? 육식 동물이나 저 채식 동물이 그냥 서로 살면서 서로 잡아먹고 하는 거 보시죠? 그것이 하세계예요. 우리 인간은 중세계다. 그럼 또 상세계는 뭣이냐. 상세계는 마음으로 자유자재할 수 있고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세계가 바로 상세계예요. 이 우리 혹성에만이 이렇게 중세계가 살고 있는 건 줄 알지 마세요.

우리가 상세계로 차원이 그만큼 이 세상에서 올라간다면 모두 하세계 상세계를 다 이렇게 접근할 수가 있고, 이심전심으로써 통신할 수가 있죠. 그건 왜냐. 그렇게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거든요. 우주의 생명, 하세계의 생명들이 전부 중세계의 생명들과 같이 이심전심으로 통하게끔 다 이렇게 중심에는 다 돼 있어요. 가설이 다 돼 있다고요. 딴 데서는 찾아볼 수가 없죠. 근본끼리는 다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남을 아무리 속여도 나는 내가 못 속인다는 속담의 말이 있죠? 내가 나를 못 속이듯이, 그렇게 속일 수가 없는 자체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마음공부를 할 때에 심사숙고하게 정신 바짝 차려서 해라 이 소립니다. 왜? 못 믿어 봤자야 자기를 자기가 깎아 먹는 거와 같고 무시하는 거와 같으니까요. 자기가 자기를. 누가 대신해 주는 게 없거든요. 이 도리를 완전히 알아야만이 서로 한마음으로 통해서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에는, 그때는 누가 뭐랍니까? 그때에는 말마따나 참 대장부로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도 남는 주먹을 쥘 수도 있죠.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가려면

문) 요즘 저의 남편이 하는 일이 잘 안돼서 그런지 괜히 짜증을 부리고 그러는데 처음에는 이해를 하고 잘 대해 주었는데 이제는 저도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애들은 애들대로 또 아빠를 멀리하게 되고요. 가정을 다시 화목하게 이끌어 가려면 결국 제가 죽어야 되겠죠?

답) 인간은 누구나가 다 자기를 자기가 무시하지도 말고 올려 치켜세우지도 말고 중도에 항상 놓으면서 항상, 어지러운 걸 봐도 내 모습으로 보고, 아주 모르는 사람을 보더라도 ‘저것이 내가 모를 때 내 모습이로구나.’이렇게 본다면 원망도 안 들어가고 무시하지도 않게 돼요.

여러분은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형제나 이렇게 잘못하면 잘못하는 대로 ‘어이구, 저렇게….’ 그냥 그러니까 미운 생각이 들고 말이 좋게 나가질 않고 얼굴부터 찌푸려지고 이러죠? 얼마나 총총걸음을 걷는다고, 얼마나 가을에 낙엽 떨어질 때가 멀다고 그렇게들 야단들을 하고 싸우고 옹옹거리고 그냥 얼굴을 찌푸리고 그러고 삽니까? 예? 모든 게 나로 인해서 생긴 거 아닙니까. 나로 인해서 부인이 있고, 부인은 나로 인해서 남편이 있는 거고, 나로 인해서 자식이 있는 거 아닙니까? 형제가 있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기다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거기서밖에는 우릴 화목하게 돌아가게 할 수 없다. 우리 가정을 좋게 할 수 있는 거는 거기밖에 없다.’ 하고는 놓고 “여보! 이제 들어왔소?” 상을 찌푸리고 신경질을 내더라도 “여보! 어디서 뭐 속상한 일이 있소?” 하고 이렇게 웃으면서 말을 해 주면 얼마나 그 마음이 아늑하냐 이겁니다. 신경질 내다가도 안 낼 겁니다, 아마.

그런데 그 신경질을 내는 걸 보면 벌써 한번 “으이그, 괜히 신경질이야!” 이러면서 그때서부터 나오는 거죠, 이제. 그러니 어떻게 이 세상을 화목하게 살아가며 어떻게 자식들에게도…. 이것이 거죽만 그런 게 아니에요. 사람은 마음먹는 대로의 그 마음의 초점이 이끌어지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말을 안 해도, 좋게 말을 하고 여기다가 맡겨 놔도 그냥 금방 돌아서서 마음이 착해지면서 “여보, 이러고저러고 이러고저러고 했어.” 하고서 그냥 이렇게 돌아가거든요. 그런데 이 육체, 말 그것이 자기인 줄 알아요.

그러니까 말로 남을 웅크려 뜯지 말고, 웅크려 뜯을 일이 있더라도, 사람을 죽이고 들어왔더라도 부부니까, 부부 아니더라도 그래요, 모든 게. 죽이고 들어왔더라도 “여보, 그걸 어쩌다가 그랬소? 그래도 너무 상심 말아요. 아이, 죽으면 죽지, 뭐. 같이 죽읍시다.” 이렇게 웃으면서 해 나가고 여기다 다 놓는다면 그 사람이 그냥 잘 이끌어지고 그것이 잘돼요. 자식도 그래요. 나가서 계집질을 하든, 나가서 노름을 하든, 나가서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그건 내버려 두고 들어오면 따뜻하게 대해 주는 겁니다. 그게 최선의 방법이에요. 말 잘못하거나 말을 해서는 안 돼요. 그게 상전이라고…. 부처님 모실 때 부처님을 잘 모시려면 효도하고 충성하고, 자식을 잘 이끌고, 부부지간에 화목하게 이끌고, 형제지간에 잘 끌고, 이렇게 지혜가 넓어야 이것이 바로 불법을 잘 이끌어 가는 거기 때문에 불법을 빨리 승화를 시킬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 이 불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명확한 것은, 만약에 내가 이론적으로만 여러분한테 이렇게 말을 한다면 여러분에 이익이 하나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말을 하면서도 말은 이것이 법이 되는 법이죠. 그것이 정확하게 떨어지니까. 난 이론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으니까, 애당초부터.

벌이 어쩌다가 방에 들었는데 창이 문인 줄 알고 쪼다 보니까 몸 떨어지니까 입도 떨어지더라고 말이에요, “입 떨어지니까 말도 떨어지더라.” 하고 노래를 부르니까, 은사가 미워하고 그러다가 다시 자기 자리에 앉혀 놓고 절을 했단 말이 있죠.

또 어떤 스님네들이 셋이 가다가 지네가 이만한 게 가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네 발이 오죽이나 많습니까? 지네 발이 많은데 지네더러 이랬다는 거예요. “아이고, 저 지네 좀 봐. 저렇게 다리가 많은데도 걸리지 않고 가는 것 좀 봐.” 하니까 지네가 딱 서 가지곤 가질 못하더라는 거예요, 걸려서. 그 말에 걸렸거든. 걸려서 가질 못하니까 거기에서 고만 세 스님네들이 깨쳤다는 겁니다.

여러분! 잘 생각하세요. 우리가 잘 걸어가다가도 말을 하면 거기에 걸려 가지고 아주 옴패부득을 못해요. 그러니까 어디 가서 무엇을 보고 걸리지 마시란 얘기예요. 잘못됐더라도 걸리지 말고, 잘됐더라도 걸리지 말고. 그게 잘못됐더라도 그게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닙니다. 순간 돌아가니까 겁내지 말고 그냥그냥 놔 버려요. 그 기운, 힘 있는 보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기다 놔 버려요. 내가 만약에 이 오신통이, 기계가…, 보물이 여기 있는데 이 보물한테다 자동적으로 하게끔 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만약에 이거 여기다가 다 맡기지 않고선 내가 가지고 할 양으로 모두 간섭을 하면 뒤죽박죽이 되는 겁니다. 그 컴퓨터고 탐지기고 뭐, 뒤죽박죽이 되는 거죠. 거기서 할 걸 믿지 못하니깐, 거기다가 뒤죽박죽을 만들어 놓는 겁니다.

저를 시기하는 동료가 있어요

문) 직장 동료 중에 제 앞에서는 친한 척하면서 뒤에서는 저를 시기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은근히 나쁘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딱 뭐라 하기도 그렇고 그냥 내 탓이려니 하다가도 은근히 화가 납니다. 이 마음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답)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사시면서 나쁘다 좋다 하기 이전에, 나쁘다는 생각이 들면 ‘나쁘지 않게 생각을 하게 하는 것도 주인공 너 아니냐?’ 하는 거죠. 또 좋게 했으면 ‘아이휴, 감사하구나.’ 이런 뜻으로 생각하는 것. 어떠한 일이 과거로부터 인과로 닥친다 하더라도 ‘음, 과거에 입력이 된 거고 입력이 된 것도 네가 한 거니까, 입력을 없애는 것도 네가 하는 거다.’ 하고 다 맡겨 놓고, ‘주인공! 당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을 해 주는 것도 너밖엔 없다.’ 하고 거기다, 생활 속에서 용도에 따라서 괴로움이 있다 할지라도 ‘괴로움을 준 놈도 너니까 안 주게 하는 것도 너다.’ 하고 놓고, 상대에서 모두 나쁘게 나를 묘략을 하고 들어올 때도 그 사람을 탓하기 이전에 나를 한번 돌아다보고 모든 것을 거기다 맡겨 놓고 ‘그 사람의 주인공이나 내 주인공이 둘이 아니니 당신밖에는 해결할 수 없어.’ 할 때에 그 상대방의 마음이 스스로서 녹아져 버리고 내 마음과 같이 착해지고 의리가 있게 되고 서로서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싹트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언제나 평등한 마음으로서 웃으면서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상대를 대하고 아무리 마구니라 할지라도 마구니라는 생각을 말고 모자란다는 생각을 마세요. 모든 것은 내 모자랄 때 내 모습이요, 내가 나쁜 일을 할 때 내 모습이요. 지금만 내가 살았던 게 아닌 까닭이죠. 그럼으로써 모든 잘못, 가정에서도 자식이나 모든 형제나 잘못됨이 있으면 모든 건 내 탓으로 돌리고 부드럽게 말을 해 주고 주인공에다 맡겨 놓는 그러한, 그 주인공에서밖에는 해결 못한다는 그런 믿음을 진실하게 가질 수 있어야 형제하고도 자식하고도 잘 똑바로 나갈 수 있고 공부도 머리가 잘 트여서 잘될 수 있고, 또는 뿌리를 돋워 주니까 뿌리가 썩지 않으니 가지가 썩지 않을 것이고, 열매가 크게 열려서 만 가지 맛을 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무르익어서 말입니다.

그러니 모든 문제가 바로 우리한테 있다는 거죠. 그러니 누구를 나무라기 이전에 나부터 돌아다볼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이 모두가, 삼라만상 대천세계 이 모두가 전부 공존하고 공용하고 있습니다. 공심입니다. 그리고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랬으니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이란 말을 했죠. 그 한마디에 두 가지 세 가지가 붙어 돌아갑니다. 공이 색이고, 색이 공이기 때문에. 그것은 둘이 아닌 까닭이요, 내가 있는 까닭이요, 나를 찾으면 나 자체도 없이 공했다는 까닭이요, 또는 둘이 아니게 이 세상이 공심하고 공용하고 공체로서 공식까지도 한다는 뜻이죠. 그래서 한마음은 그 대가 없는 것이 한마음이요, 그 한마음은 부처라는 이름도 가질 수 있고 그 한마음은 결국은 길이죠. 그러니 우리 자체가 무엇을 탓하기 이전에 우리부터 돌아볼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남을 탓하기 이전에.

마음의 힘이 약해질 때가 있어요

문) 처음에 이 마음공부 할 때는 신심 있게 했는데 어떨 때는 마음의 힘이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항상 여여하게 공부해 나가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답) 우리의 근본 자리에는 그런 ‘약하다, 힘 있다’ 이런 게 붙질 않아요. 만약에 이 진리가 프로펠러와 같이 돌아간다면, 지구도 그렇고 그런다면 거기에 무슨 힘이 없다, 있다 그게 붙을 수가 있나요? 그런 도리를 넘어서는 공부라고 볼 수가 있겠죠.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요. 그런 게 붙지 않는답니다. 그러나 약해질 수 있죠, 마음이라는 게. 고정되지 않고 항상,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되지 않고 먹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만남도 듣는 것도 보는 것도 다 고정된 게 없죠. 그렇기 때문에 뭐, 약하다는 것도 생각이 들고 그러겠죠. 그러나 약하다 하는 그 생각마저도 거기서 나오는 거지 따로 자기가 그냥 둘이 돼서 약한 거 따로 있고 약하지 않은 게 따로 있는 게 아니죠. 한군데서 나오는 거니까 한군데다 넣고 한군데다 맡기고, 한군데서 나고 든다 하는 거를 실험하고 체험하는 것이 이 공부 아니겠습니까.

여직껏 살아오신 거 누가 살아오셨습니까? 상대가 많다 하더라도 그걸 받아서 자기가 결정짓고 자기가 하고 그러고 자기가 살아왔죠. 약하든 약하지 않든 말입니다, 자기 운전수가. 기름을 조금 넣는 것도 거기요, 많이 넣는 것도 거기요, 가득 채운 것도 거기요, 또 기름이 없어서 못 넣는 것도 거기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운전수 알아서 할 탓이에요, 모두가.

꿈에 신경이 쓰여서 마음이 불편해요

문) 저는 꿈을 자주 꾸게 되는데 자꾸 꿈에 신경이 쓰여서 마음이 불편해요.

좋은 꿈을 꾸면 좋지만 좋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되면 찜찜하거든요. 이렇게 꿈에 끄달리는 마음을 벗어나고 싶어요.

답) 당신이 당신을 못 보니깐 꿈에라도 모습을 해서 이게 공부거리를 줬으면 공부거리나 받을 것이지 왜 그 모습에 끄달리십니까. 아이, 부처님의 모습은 개로도 모습이 됐다가 돼지로도 됐다가 소도 됐다가, 말도 됐다가 그냥 나무도 됐다가, 이렇게 자꾸자꾸 여자로 됐다가 남자로 됐다가 거지도 됐다가, 이렇게 바뀌는데 그럼 바뀔 적마다 탈을 할 겁니까. 붙잡고 늘어질 겁니까.

그러니까 꿈을 꿔도 그냥 거기다 놓고 가세요. 그리고 공부거리가 있어서 그걸 이해를 하면은 ‘아, 그건 그런 거구나.’ 그러고 놓고, 또 이해가 안 가는 거는 ‘이해가 가게 하는 것도 주인공 너뿐이야.’ 그러곤 그냥 놔 버려요, 그냥. 그러면 언젠가는 알아져요. 이거 사는 게, 전부 지금 사는 게 수시로 바뀌면서 가는 건데 다 붙잡을 거예요, 그걸? 환상을 붙드는 겁니다, 그게. 당신이 하고 가는 그 환상을 붙드는 건데 그게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다 놔 버리세요, 용광로에 넣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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