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산보적(盤山寶積)(마조도일의 제자) 선사가 걸음걸음 화두를 놓치지 않고 시장을 지나가다가 식육점 앞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어떤 사람이 정육점에 고기를 사러와서 말했다.

“깨끗한 고기 한 근만 주시오”

주인이 들고 있던 칼을 내려 놓고 양손을 모으고 차수(叉手)하면서 말했다.

“어떤 것이 깨끗하지 못한 고기입니까?”

깨끗함과 더러움, 옳고 그름, 선과 악등의 범부와 성인, 부처와 중생이라는 모든 차별상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광경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보적 스님의 마음이 활짝 열린 것이다. 그후 어느날 마을 동구 밖을 지나가다가 상여꾼들을 만나게 됐는데, 요령을 흔들면서 소리 하기를 “청천(靑天)의 붉은 수레는 서쪽으로 기울어 가건만, 알지 못하겠구나, 오늘의 이 영혼(靈魂)은 어디로 가는고?”라고 하니

뒤따르던 상주들이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하였다. 보적 선사가 이 곡(哭) 하는 소리에 확철히 깨닫고, 그 길로 마조 선사를 찾아가 인가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

보적 선사의 전(前)과 후(後)의 깨달음이 각기 어떤 경지인가? 이는 향상일구(向上一句)의 기틀을 갖춰야 분명히 밝힐 수 있는 것이다.

향상일로천성불전(向上一路千聖不傳) 학자노형원착영(學者勞形如猿捉影)이라는 말이 있다.

“향상의 일로는 일천 성인도 전하지 못하시거늘 학자들이 공연히 애씀이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죽음이란 모든 형상(形相)에는 자체성(自體性)이 없어 상대성인 몸뚱이라는 모습이 없어지는 것이다. 모든 상대성(相對性)은 연기법(緣起法)으로 절대성(絶對性)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 지는 것이며,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절대성 자리가 이 색신의 혓바닥을 굴려서 “아이고” 하는 것인데, 그럼 “아이고” 하는 이놈은 누구일까?

그래서 ‘이 뭣고’이며, 상주가 “아이고, 아이고” 라고 하는 순수하고 맑고 청정한 자성(自性)자리는 광활한 시방세계와 과거 현재 미래가 곧 당금(當今)이며 가고 오고가 없는 역천겁이불고(歷千劫而不古) 항만세이장금(恒萬世而長今)이라, 찰라가 불생불멸(佛生不滅)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내 고향인 ‘이 뭣고’인 것이다.

보적 선사의 오도송은 다음과 같다.

심월고원(心月孤圓) 광탄만상(光呑萬像) 광비조경(光非照境) 경역비존(境亦非存) 광경구망(光境俱亡) 부시하물(復是何物)이라고 했다.

“마음달 홀로 둥글어 그 빛이 삼라만상을 삼키도다. 광명(光明)이 경계(境界)를 비추지 않고 경계 역시 있는 것이 아니니, 광명과 경계가 모두 없어지니 다시 이 무슨 물건인가?”

이 마음의 달(月) 하나가 둥글게 떠 있어 그 빛이 천지만물(天地萬物)을 다 머금어 하나가 되나, 그 하나마저 없어진 경계이다.

경허 선사와 만공 스님의 선문답(禪問答) 향상일구(向上一句:깨달음의 한마디)는 경허 선사의 진면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경허 선사가 만공 스님에게 너는 술이나 파전을 먹고 싶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만공 스님은 “저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습니다. 굳이 먹으려 하지 않지만 생기면 또 굳이 먹지 않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고 하니 선사가 대견한 듯 보다가 그래, 참으로 너의 도력(道力)은 대단하지만 나는 너 만큼 도력이 없어서, 술이나 파전을 먹고 싶으면 참을성이 없다고 말했다.

“밭을 정성스럽게 갈고 거름을 주고는 좋은 밀씨와 파씨와 깨씨를 구해다가 정성스럽게 가꾸고 알뜰이 키워서 밀로 누룩을 만들고 깨로 기름을 짜고 밀가루와 파를 버무려서 맛있는 파전을 만들어 술과 함께 맛있게 먹겠네”라고 하시자, 그 말을 들은 만공 스님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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