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선사가 마조선사를 친견하러 갔을 때 마조가 불자(拂子)를 꼿꼿이 세우자, 백장이 물었다.

“이것 그대로 마음을 씁니까? 아니면 이것을 떠나서 마음을 씁니까?”

마조가 불자를 선상 귀퉁이에 걸어놓고 말없이 있다가 물었다.

“그대는 훗날 이렇게 두 입술을 함부로 놀리면서 어떻게 사람을 가르치려는가?”

이에 백장이 마조의 불자를 빼앗아 꼿꼿이 세우자 마조가 말했다.

“이것 그대로 마음을 쓰는가? 아니면 이것을 떠나서 마음을 쓰는가?”

백장이 불자를 들어 선상 귀퉁이에 걸었더니 마조가 우렁찬 할을 내지르니, 백장은 그 소리를 듣고 3일 동안 귀가 먹어 버렸다.

마조는 일없이 불자를 세워 잠잠한 백장의 가슴에 파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백장은 스승의 의중을 간파하고 먼저 질문을 던진 것이다. 백장이 제기한 문제는 가문의 비밀을 백일하에 누설한 것이며, 마조 자신의 보검(寶劍)을 탈취해 휘두른 것과 같았다.

불자(拂子)를 우진(拂塵)이라고도 한다. 이는 수행자가 마음의 티끌, 번뇌를 털어내는 데 사용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불구(佛具)이다. 그러나 ‘이 뭣고’는 생활속에서 반야지혜를 살려 쓰는 활용(活龍)이며 찰나에 번뇌(煩惱)를 소멸시키는 금강보검(金剛寶劍)의 작용(作用)이다.

수산주가 지장계침선사를 찾아가니, 수산주에게 묻기를 “어디서 오는가?”

수산주는 “남방에서 옵니다” “남방의 불법(佛法)은 요즘 어떠한가?” “분별(分別)이 끝이 없습니다.” 이에 선사가 “어찌 여기서 밭에 씨앗을 심어서 밥을 먹는 것만 하겠는가?”하시니, 수산주는 수천 리를 걸어서 산 넘고 물을 건너 와서 친견했으나, 선사의 의중(意中)을 바로 깨치지 못하고 한 번은 돌아갔다.

조사(祖師)들이 제시한 본분의 의표(意表)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언하(言下)에 번갯불 속에서 바늘귀에 실을 꿰는 것과 같이 해야한다. 신심(信心)과 도심(道心)이 철저한 수산주가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계침사를 천신만고 끝에 찾아왔다.

그런데 계침선사께서 병석에 누워계시니, 수산주가 인사 드리고 신세타령 하며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걸려 찾아왔건만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게 되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모두 다 허사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누워계시던 계침선사가 조용히 일어나 좌정하시더니 불자를 잡고 하시는 말이 “이 불자는 영겁에 한 찰나도 너를 등진 적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그러자 수산주가 언하대도(言下大道) 하였다. 뼈에 사무친 일구월심(一久月心)이 일언지하에 도(道)를 성취하게 한 것이다.

운봉성수선사가 선지식으로 명성이 자자한 혜월선사를 친견하고 물었다.

“삼세의 모든 제불(諸佛)과 역대 조사는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하고 계십니까?”

이에 혜월선사께서 양구하니, 성수 스님께서 냅다 한 대 치면서, “산 용이 어찌하여 죽은 물에 잠겨 있습니까?”라고 하니 “그럼 너는 어찌 하겠느냐?”고 말했다.

성수 스님이 불자를 들어 보이니 혜월선사께서 “아니다” 하시니 성수 스님께서 다시 응수(應酬)하길 “스님, 기러기가 창문 앞을 날아간 지 이미 오래입니다”라고 하자, 혜월선사께서 한바탕 크게 웃으시며 “내 너를 속일수가 없구나” 하시며 성수 스님을 인가하시고, 호를 운봉(雲峰)으로 정하고 전법게를 내렸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본무진실상(本無眞實相) 어상약무상(於相若無相) 즉명위견성(卽名爲見性) “일체의 유위법은 본래 진실된 모양이 없으니 저 모양 가운데 모양이 없는 줄 알면 곧 이름하여 견성이라 함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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