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부처님이 꽉 찼다 하더라도 그냥 한 부처입니다!

 

여러분과 같이 이렇게 한자리를 했다는 것은 여러분의 과거 생이나 미래 생이나 일체제불이 다 함께 한자리를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하, 동서남북, 모든 생명들이 다 함께 하고 있고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만 앉아 계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모습 아닌 바로 여러분이 같이하고 계시고, 일체제불과 더불어 일체 보살도 다 같이하신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사실이 그러니까요. 그러면 질문부터 하실까요?

질문자1(남) 제주지원에서 왔습니다. 큰스님, 감사합니다. 저는 제주여고에 재직하면서 2년 전에 3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대학 진학을 발원하는 마음에, 시간이 워낙 없으니까 출근하는 차 속에서 1년 가까이를 매일 주인공을 관하고 오분향례, 반야심경을 봉송했습니다. 그 결과 저희 학교에서는 제주도 여학생 수학능력시험 전체 수석, 개교 이래 명문대학 최다수 합격 등 좋은 입시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하고 나니 이제는 습관이 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실천하고 있으며, 특히 관을 할 때는 ‘주인공의 나툼으로, 지혜로움으로 모두 이익 되게 하소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믿음이 부족하고 생활 속에서 관이 잘 안되는 경우, 큰스님께서 수많은 설법을 통하여 답을 제시해 주셨습니다마는 매일 실천할 수 있는 방편 아닌 방편은 필요하지 않은지 듣고 싶습니다.

마음 하나에서 다 하는 겁니다, 마음 하나에서.
그러니까 마음 하나를, 주인공을 딱 잡고 거기다 놓는다면
뭐가 걱정입니까. 하나도 걱정이 없죠.

큰스님 우리가 살아나가는 게 다 방편이죠. 방편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방편이지만 그 방편도 없어서는 아니 되죠. 그렇기 때문에, 생활하는 것이 모두 함이 없이 하시는 거니까 그렇게 아시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방편은 필요한 것입니다. 방편이나 방편이 아닌 것이나 올바로 하면 방편 아닌 그대로 실천이죠.

질문자1(남) 잘 알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 드리고자 하는 사항은 작년에 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됐던 소설 중에 『하늘이여 땅이여』라는 책의 내용에 보면 조선 오백여 년 동안에 왕위 계승과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왕손뿐 아니라 왕후들의 원혼을 잘 달래지 못해서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한제국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삼각산 아래에서는 누구도 끝이 좋지 못하므로 왕가의 원혼을 달래야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에 저도 끄달리지는 않으려고 합니다만 저희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한마음 공부를 하고 있는 불제자들은 사회의 안정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그러면 그것과 관련하여 뜻으로 몇 마디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 전부 필요한 점이니까요. 서방정토의 아미타불이라고 합니다. 또 화엄경이라는 그 자체가 바로 비로자나불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법화경은, 즉 말하자면 무아의 정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생각해 보면 부처님 이름들도 수많지만, 우리 살아나가는 생명들도 천차만별로 있지 않습니까? 그 속에는 또 천차만별의 차원이 있고요, 그 가운데는 천차만별의 업보가 있다고 봅니다. 그럼 업보라는 건 무엇인가. 업보라는 것은 사실은 따지고 보면 없는 것입니다. 그건 나중에 또 말하도록 하고….

부처님 이름을 여래니 부처님이니 또 아미타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모두 이걸 깨닫지를 못해서,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이제. 즉 일체 깨쳤다, 서방정토 아미타불이다, 부처님이다, 여래다, 비로자나불이다, 이렇게 부처님들 이름이 수없이 많지만 그것은 모두 그때그때에 따라 적합한 방향으로 모두 이름을 지어 놓았다는 겁니다.

경전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부처님께서 처음에 화엄경을 말씀하신 거는 살아나가는 도리를 주로 전파하신 거죠. 생략해서 이렇게 간단히 말합니다. 금강경이다 하는 것은 이게 선(禪)으로 가는 법이죠. 즉 무(無)의 법으로서 선법으로 가는 것이고, 또 법화경이라는 것은 선법이나 물질로 사는 사람들의 법이나 똑같이 굴러간다는 그 뜻으로써 법장(法藏)이 됐단 말입니다. 그래서 알고 본다면 지금 내가 여러분한테 가르치는 것을 만약에 이루종차 전부 학으로 말을 한다면 지금 내가 한마디 말한 것이 책 한 권이 되는 것입니다, 한 권이. 그러니까 말로 배워서는…, 말을 들었다 하면 그냥 잊어버리고 몇 마디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서방정토 부처님이든 어떤 부처님이든, 이 부처님 이름들이 수많다고 하더라도, 허공에 꽉 찼다 하더라도 그냥 한 부처님으로 섬깁니다. 이 아미타부처님은 전체에 비유를 해서 전체에 없는 게 없는 것이고, 또 아니 비치는 게 없는 것이고, 아니 하시는 게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인간들의 생산처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 우주에서 별성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생산하는 일체의 생산처입니다. 또한 북두칠성에서는 살아나가는 도리를 관리하는데, 이렇게 해 나가는 것을 볼 때 우리들이 여기서 그냥 이렇게 살고 있다고 해서 우리들만 산다고, 내 자유대로 산다고 이렇게 말은 못 할 겁니다, 아마. 자유대로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얘긴데 모두가 일불(一佛)입니다. 여러분한테 일불로, 자신의 자불(自佛)로 가르칩니다, 지금. 자신의 자불 하나에서 수많은 부처님이 나옵니다. 수많은 차원에 따라서 수많은 중생들이 나오고 수많은 생명들이 나오게 되니까 그 자불 하나에서 그 많은 문제들이 다 해결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자동적인 컴퓨터가 제가끔들 다 하나씩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나는 대로 거기에 집어 넣으면은 그것이 순탄하고 순리적으로 다 해결이 난다 이겁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전국이든 세계든 다 통신할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이라는 게 그렇게, 이 우주 전체에 전파를 할래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결단코 정말이지 진짜로 믿으십시오. 하치않은 나무들을 보세요. 제 뿌리 없이 그냥 모습만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뿌리를 모두 다 가지고 사느냐? 이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랬더니 ‘전부 뿌리 없는 게 없더라, 그리고 씨가 없는 게 없더라, 씨를 심어야 먹더라’는 겁니다. 이런 거를 볼 때에 죽었다 해서 씨가 없는 게 아니죠. 그러니 영령들이 곳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생각이 날 때 그대로 거기에다가 놓는다면 입력이 돼서 그냥 전파가 되고 그냥 생산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또 마음을 잘 써서 잘하고 나가는 사람이 할 때는 그냥 진화가 되는 겁니다. 착하게 살았으면 착하게 진화가 되는 것이지만, 우리가 배우는 이 법은 악하게 살았든 선하게 살았든 무조건이라는 얘깁니다, 무조건! 무조건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들이 저지른 것은 모두 자기 자신들이 해결을 해야 하니까, 그것은 사람을 어디다가 갖다가 놓고서 ‘이제 너를 올려놨으니까 앞으로 그걸 보고 듣고 배우면서 잘해라.’ 이럭하면 그대로 되는 겁니다. 우리가 걱정 하나도 할 게 없어요. 부처님의 대승의 도리라고 하는 것은 대승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대승의 도리라고 하는 겁니다. 대승의 도리니 소승의 도리니 중승의 도리니 이런 것이 없이 그냥 공해서 돌아가는 거니까 한생각에 그렇게 적응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 한생각에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본인들이 그걸 알면 ‘내가 했다. 내가 산다. 내가 할 수 있다. 내가 앞으로도 이걸 잘해야지.’ 이런 게 스스로 없어지게 됩니다. 그 도리를 모르니까 ‘내가 했다. 내가 이걸 안 나가게 해야지.’ 이런 문제들이 나오지, 만약에 그 도리를 안다면 그런 생각조차도 없을 겁니다, 아마.

그러니까 마지막에 물으신 거를 생각해 볼 때에 온 누리에…, 오늘 개천절이라고 그러죠? 그런데 말입니다, 단군할아버지라고 그러지만 수많은 부처님들이 계셔도 불성은 부처님과 이 중생들이 다 똑같아요. 그런데 불성을 싸고 있는 영혼이 있어요, 영혼! 여러분의 영혼이 그 불성을 싸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 싸고 있으니까 그 영혼을 재껴 버려야 되는데 그 영혼을 재껴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재껴 버리려면 다 버려야 하는데, 버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면서 함이 없이 한다면 그대로 벗어지는 거죠.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 노릇을 하고 남편 노릇을 했는데 어떤 노릇을 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하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24시간 살아나가는 데 내가 어떠한 일을 했을 때 ‘내가 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24시간 동안에 얼마나 많이 봤고 얼마나 많이 들었고 얼마나 많이 만났고 이런데, 내가 어떤 거 만났을 때 내가 했다고 그러며, 어떤 걸 봤을 때 내가 봤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두가 한 무더기로 그냥 ‘공했다!’ 내가 하지 않았어도 운전수가 끌고 다니니까, 운전수가 즉 자기니까, 운전수가 자기를 끌고 다니고 모두 보게 하고 듣게 했으니까 운전수한테다 감사하게 맡겨야죠?

그것이 우리가 지금 생활로 공부할 수 있다는 거죠. 듣고 보는 그 생활 속에서 둘이 아니게 공심(共心)으로, 공생(共生)으로 살 수만 있다면, 생활하는 것이 공해서 함이 없다는 도리를 알고 넘어간다면, 그냥 편안하고 믿게 되고 그냥 놓게 되죠. 그렇게 되면 시쳇말로 정말 ‘왔다’죠.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그대로, 진정 한생각에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지 않느냐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부처님의 이름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 주인공으로 연결이 다 돼 있어요. 그런데 용도에 따라서 ‘지장이다’ 이런다면 죽는 사람을 좋은 데로 가게끔만 하는 게 아닙니다. 능력은 어느 보살이나 있지만 그 용도로 이름을 지어 놓은 것이죠. 즉 말하자면 일체를 다 알아야 보살이 될 자격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무(無)의 법도 그렇지만, 유(有)의 법에서 요만한 거 하나하나 거쳐 나갈 때,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큰 걸로 이어집니다. 조그만 거 하나 잘못했다고 해서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조그만 거 하나 잘못했기 때문에 큰 것도 잘못하게 된다는 얘기죠. 그렇게 된다면 보살 될 가치가 없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다 알고 본다면 참 이런 공부는 세세생생이 가도록, 돈을 들인다 해도 해야만 하는 공부입니다. 정말 이 공부라는 것은 이런 인연이 되지 않는다면 못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래도 전자에 인연이 돼서 이 마음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건데 우리만이 아니라 일체제불과 더불어 같이 한마음으로 이렇게 상응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덕인 줄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만날 칭찬을 해 드려도 뭐, 조금도 손해날 일은 없지만 칭찬을 내가 해서 되는 게 아니죠. 여러분이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알게 되는 거죠. 자기가 자기를 알게 된다고 해서, 즉 아만이나 아상이나 거만이나 이런 거를 가져서는 안 되고, 더군다나 더 알게 되면 마음의 고개가 딱 수그려지고 보는 게 달라지고 듣는 게 달라져요. 그렇게 할 때에 모든 것에 이익이 가죠. 나와 더불어 같이 이익이 가죠. 그래야 그것이 보살행입니다.

그러니까 영령들에 관한 문제가 있다 이러더라도 걱정할 게 없고, 또는 어떤 병에 걸렸다 이러더라도 걱정할 게 없어요. 폐암이다 백혈병이다 이런 것도, 큰 거고 작은 거고 다 평등한 거니까 작고 크다 이런 거를 논의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정말로 못 믿거든요. 그리고 식구가 다 모르고 한 사람만 다니면서 공부하거나, 어떤 때 보면 한 집안에서 몇 사람씩 기독교를 믿고 그러는데 그렇게 병이 들어서 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먼저 자기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제삼자가 어떻게 하느냐는 얘깁니다. 마음들의 문을 열어야죠. 그것이 말하자면 운명을 가져오는 거죠. 믿는 것도 그렇고 전체가 다 그래요.

여기 다니는 여러분 중에도 가장자리에 그런 분들이 더러더러 있지만 그래도 이 공부를 해 나가는 분들이 다 한자리를 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마음으로 항상 기쁘게 생각을 하고 ‘아, 곳곳마다, 처처마다 있다더니 처처마다 있구나!’ 하는 거를 느껴요. 그러니까 하늘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조금도 움죽거리지 않고도 손가락으로 그 하늘이 무너지는 걸 받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지금 공부하는 데 이유를 붙이거나, 여자다 남자다, 공부를 잘한다 못한다, 가난하다 부자다 이것도 보지 마시고 그저 닥치는 상황대로 좋게, 섭섭지 않게 해결만 하고 가면 되죠, 이게. 사실 때에 거북스럽게 사시라는 게 아닙니다. 사는 거 그대로 사시면서 우리가 그 길을 다 걸어야 보살행이다 하는 것은, 팔정도라든가 사성제라든가 육바라밀이라든가 이런 이론적인 문제를 다 넘어서야 된다 이런 건데 ‘육바라밀, 사성제, 팔정도’ 이렇게 말을 해 놨지만 그것도 그 마음 하나에서 다 하는 겁니다, 마음 하나에서. 마음 하나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그게. 그러니까 마음 하나를, 주인공을 딱 잡고 거기다 놓는다면 뭐가 걱정입니까. 하나도 걱정이 없죠.

그러니까 참, 소신껏 그렇게 잘하고 나가십니다. 그 말끝에 이 말씀을 드린 건 여러분이 다 같이 그렇게 알아서 걱정 말고 편안하게 사시라 이런 겁니다. 이것 보면 이것대로 그냥 걱정하고 저것 보면 저것대로 걱정할 게 아닙니다.

질문자2(남) 저는 제주지원 심용회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런 자리에서 스님 앞에 이렇게 말씀드리게 됨을 굉장히 영광으로 생각하며 스님께서 아주 쉽게 저희들이 한마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데 대해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오늘 질문하고자 하는 내용은 조금 전에 스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고 생각이 됩니다만 다시 한번 질문 올리고자 합니다. 평소에 저희들이 생활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일로 인해서 도살을 하거나 살생을 하는 그런 경우가 있는데 그런 자리에 저희들이 같이 있을 때 저는 항상 ‘도살하는 이에게 원망하거나 나쁜 마음을 갖지 않고 오히려 진화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더욱더 불법에 인연하여 진화 발전하라.’ 이렇게 관하곤 합니다. 제가 그런 관을 할 때는 천도를 한다거나 어떤 다른 생각을 함이 없이 그냥 당당하게 그렇게 하고 지나가고 있는데, 때로는 도반들하고 공부를 하다 보면 제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추스리지를 못하면서 과연 그런 것을 이렇게 하고 가도 되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생길 때가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스님께서도 말씀이 있으셨지만 다시 한번 질문 올립니다.

큰스님 그것을 길게 그렇게 곰곰이 생각해서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듯이 간단하게 그런 생각으로써 하신다면 정말이지…, 내가 이런 얘기 또 하게 됩니다.

옛날에 승려들이 같이 한도량에서 사는데 은사 스님이 돌아가시게 됐어요. 그런데 선방이니까 따져 본다면 수좌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 아주 맨 아래에서 공양주 노릇을 하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 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은사 스님이 연세가 많으신데 영 드시는 게 실답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기운을 못 차려서 저렇게 병이 드셨나 보다.’ 하고는 나가서 지렁이를 한 소쿠리씩 잡아서는 소금을 넣고 씻어서 산에서 다려서 그 물을 꼭 짜 가지곤 갖다 드리고 갖다 드리고 이러니까, 거기 스님들이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너는 이제 지옥으로 떨어졌다. 하나를 살생을 해도 안 된다는데 수만 마리씩 그렇게 살생을 하니 너는 이제 죽었다.” 이러면서 “우리들까지도 문제가 되니까 너 그럭하지 말아라.” 하니까 “내가 죄를 지어서 가루가 된다고 하더라도 저 스님만 살리면 돼.” 했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지렁이도 스님과 하나로 돼서 진화가 되니까 좋고, 스님도 좋으니 양쪽을 다 살린 거죠.

우리 여기도 보면 한 부처님을 갖다가 수십 개를 만듭디다. 그걸 보셨으면 아실 거예요. 한 사람이 수십 가지, 수만 가지로 되려고 해도 될 수 있어요. 옛날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 지금 이렇게 다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은 체가 없어서 자유스럽다는 얘기죠. 그래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주인공’ 하면은 그 ‘공’ 속에서 용도에 따라 천차만별로 보살행을 할 수 있는 이치가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을 할 때, 어떤 사람이 무슨 일 때문에 닭을 하나 잡았다 이런 것도 따지고 보면 살생이지만 그 닭에게는 큰 영광이죠.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한테 걸렸다는 게 정말이지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문제죠. 그래서 ‘천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이런 뜻이 거기에도 있습니다. 그랬듯이 그런 사람에게 걸리면 재깍 그냥 진화되지 않습니까? 재깍 진화돼서 그 모습을 벗어나서 다른 모습으로, 자기가 살고 싶은 모습으로 태어나니까 얼마나 그게 좋은 일입니까? 양면이 다 좋죠.

질문자3(남) 저는 제주지원에 다니고 있는 심단회 회원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큰스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나왔습니다. 저는 3년 전 집사람이 몸이 아파서 이 불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지만 병명은 없고 무당을 데려다가 큰 굿을 두 번씩이나 했지만 몸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마음선원에 다니는 동생이 큰스님 친견을 한번 해 보면 어떠냐는 제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96년 7월 17일, 처음으로 스님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알았어. 나무가 뿌리를 믿고 살듯이 자신의 뿌리를 믿도록 해요.” 그 한마디뿐이었습니다. 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저와 집사람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선원에 열심히 다녔고, 다니다 보니 스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사람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무슨 어려운 일이 있어도 ‘주인공, 너만이 할 수 있다.’ 하는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큰스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는 전화통신공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2000년 5월까지 정부 방침에 따라 영세 사업체는 합병을 하든지 폐업을 하든지,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업체와 합병을 해야 될지 다른 사업으로 바꿔야 할지 한마음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관을 하고 있습니다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에 맡기고 놓으려고 하지만 번뇌와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쉽게 돌려놓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큰스님 가르침 바라겠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9년 10월 3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 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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