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자비의 시장자본주의

 

어떤 남학생이 고시공부를 하는 도중에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며 고민을 털어 놓았다. 그 학생은 여자친구를 좋아했지만 고시준비를 하다보니 잘 챙기지 못했다. 여자친구는 매일 적어도 몇 개의 문자는 보내야 되고 처음 만난 날, 생일, 크리스마스 같은 기념일은 잊지 않고 챙겨야 하며 주기적으로 만나서 사랑의 징표를 보여주기를 원했다. 선물이 명품이면 자기를 더 많이 사랑해준다고 생각했고 문자가 짧고 의례적이면 사랑이 식은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쳐서 고시공부에 전념하고자 헤어졌지만 자신은 여전히 여자친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물질로 마음 전하는 시대
상호관계 지키는 수단 ‘물질’
‘자비’가 ‘공정’의 한계 보완
불교가 제도 미비점 개선 기여

많은 사람의 눈에는 그녀는 고시공부를 하는 남자친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속 좁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매달리는 못난 여자처럼 보인다. 나는 그의 여자친구가 이해가 되었다. 인간이란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남자의 마음도 변할텐데 자기를 사랑해준다는 증거가 없으면 불안해지는게 당연하다. 내가 살면서 접한 못된 사람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항상 겉으로만 믿어 달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주는 게 없는 사람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사기꾼이다. 부처님은 도움을 받았으면 말로만 고맙다고 하지 말고 반드시 갚으라고 말하고 계신다. 실질이 더 중요하다. 마음은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 기반에‘돈’작용

돈이야말로 상대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증거다. 모든 것이 돈에 의해 판단되는 시대에 돌입했다. 이것이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돈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다보니 세상도 더욱 더 돈에 의해 좌우된다. 봉급보다도 직업 안정성이 중요하다고 공무원을 선호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공무원은 정년이 보장되기에 평생 봉급은 결코 작지 않다. 게다가 연금까지 있지 않은가? 만약 정년까지 보장되는 봉급의 총액이 이름없는 중소기업의 일시적 봉급 액수보다 작다면 너나 할 것 없이 공무원하지 않고 잠깐이라도 고액의 봉급 받을 수 있는 중소기업에 취업할 거다. 요즘 젊은이들은 평생 봉급이라는 개념에 좌우되기 때문에 직업 안정성이 높은 곳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공무원은 평생 봉급이 정해져 있지만 재벌 그룹에 취업하면 미래는 아주 불확실하다. 일찍 쫓겨나면 공무원의 평생 봉급에 못미치게 된다. 공무원의 연금과 봉급을 합친 평생 소득이 기업에 취업하는 사람의 평생 소득에 못 미치면 공무원의 인기는 줄어들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도 돈에 의해 좌우된다. 명문대학 출신 신랑감보다 이름 없는 대학출신의 빌딩 임대업자의 아들을 신랑감으로 더 선호하는 시대가 되었다. 전세금을 마련하지 못하자 결혼을 허락하지 않다가 전세금을 마련하자 처가에서 결혼을 허락했다는 남성의 이야기도 있다. 능력이 있다면 봉급이나 재산으로 증명해야 하고 정말 사랑한다면 지출로써 보여주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게 꼭 나쁜 것일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대개가 거짓말이거나 위선이기 쉽더라.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런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다. 말로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하지만 막상 1억원이 눈에서 왔다 갔다하면 부모 형제 자매 사이도 안면몰수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는 사랑하는 만큼 지출하는 게 정직하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 이상을 원한다면 그 다음에 생각해볼 일이다. 먼저 사랑만큼 지출하는 기본을 보이고 그 다음에 돈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자.

부모와 자식은 서로 사랑한다니 지출로써 보여야 한다. 〈법구경〉은 “백년 동안 매달 천 번의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자기를 낳아 기르고 가르친 사람을 단 한 번이라도 공양하는 것이 더 훌륭하다”고 설한다. 〈중아함경〉은 “부모가 자식을 잘 보살필 때 자식에게 빚을 지지 않게 하며, 가진 재물을 즐거이 모두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설한다. 따라서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면 공양하고 부모도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지 않게 하고 재물을 모두 자식에게 물려 주어야 한다. 모두가 ‘돈, 돈’하면서도 막상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기부해야 한다는 식의 지나치게 거룩한 윤리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보시는 할지라도 보시 후 남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세금만 내면 될 것 아닌가? 자식에게 재산 물려주지 말자는 운동도 있었지만 자신의 능력과 노력 이상의 재산을 축적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이지 중산층과 서민은 가능하면 자식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어 이 험한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 내가 다 쓰고 가겠다는 자세보다는 자식을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간의 경제관계는 이처럼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이다.

상호 유기적 관계 불교서 강조

〈장아함경〉은 부부사이에 관하여 “남편은 아내에게 집안 살림의 권한을 부여하고 장식품을 제공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이 모은 재산을 잘 지키고 무슨 일에나 능란하고 부지런해야 한다”고 설한다. 이처럼 부부간의 경제관계도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이다. 심지어 친구사이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재물이 다했을 때 물질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방일(放逸)하였을 때 그 재산을 지켜야 한다고 설하고 있어 단순히 필요한 재물을 제공함으로써 도와주는 소극적 자세를 뛰어 넘어서 적극적으로 친구를 도와주어야 한다. 이처럼 모든 관계는 사랑만큼 지출로써 보여주는 상호적 관계이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관계에 대한 부처님의 경제관이다.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오늘날 시장자본주의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약육강식이고 강자에 의해 수탈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만약 불교가 자비의 종교라면 자비로운 시장자본주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비는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 정부는 가난한 사람의 삶이 힘들면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로워야 한다. 경전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정부의 의무를 자비의 관점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의식주를 해결해주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자식과 배우자에게 돈으로 잘해주는 것은 쉽게 할 수 있지만 그 이외의 사람에게 돈으로 잘하기는 쉽지 않다. 불교가 자비의 종교라면 자식과 배우자 이외에도, 친구, 친척 등 가까운 사람 이외에도 불쌍한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지하철에서 불쌍한 사람이 구걸한다고 해도 우리는 쉽게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돕지 못한다. 이미 이러한 일은 개인차원의 일이라기 보다는 세금을 거두어서 정부차원에서 해야 하거나 부자가 보시하는 차원에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산, 소비, 분배 등의 행위는 물론이고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 구매자와 판매자의 관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 등 모든 경제관계가 자비에 기초해야 한다. 범죄행위를 한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을 자비롭지 못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지만,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기업이 위기에 처하지 않았는데도 경비절감을 위해 무조건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무자비하다. 자비에 기초한 경제관계는 그렇지 않은 경제관계에 비해 훨씬 더 연민과 배려에 기초하여야 한다. 1920년대 영국 귀족과 하인의 삶을 다룬 드라마 ‘다운튼애비’를 보면 귀족이 하인을 무조건 해고하지 않고 안쓰러워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보인다. 이 드라마를 시청한 미국 사람들이 미국 중산층이 영국 하인보다 못하다는 다운튼애비 이코노미를 주장하기도 했다. 경제논리에 의해 종업원을 해고하는 것은 자비가 없는 기업이지만 해고했을 때 어떻게 먹고 살까 걱정되어 쉽게 해고하지 못하고 근무시간을 단축하여 모두 고용하기로 하는 행위 등은 자비로운 기업의 사례이다.

공정사회 이루는 데 자비가 기여

자비보다 더 앞서서 필요한 것은 공정한 시장경제다. 가난한 사람은 시장이 공정하기만 해도 큰 도움을 받는다. 공정하기 위해서는 합법적이어야 하며 경전에서는 정법국가를 주장하고 있다. 정법국가란 치우치지 않고 억울한 사람이 없는 시장자본주의와 정부를 말한다. 시장자본주의가 공정해도 한계가 있기에 자비로운 시장자본주의가 필요하다. 자비는 공정의 한계를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중소기업인이 ‘우리에게 뭘 해주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그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동등하게 거래할 수 있게만 해주면 돼요.’라고 말했다. 대기업의 단가 후려치기는 이미 한국 경제의 가장 고질병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기업이 특허를 가진 중소기업에게 독점계약을 체결한 뒤에 대량 주문을 내고 얼마 뒤에 주문량을 뚝 떨어뜨린다. 시설을 대거 확충했던 중소기업은 견디지 못하고 대기업에 백기 투항하며 중소기업의 특허는 대기업에게 넘어간다. 독점계약을 맺었기에 다른 대기업에게 제품을 판매할 수도 없다. 이러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를 자비로운 관계라고 할 수 없다. 자비로운 관계는 평등한 관계이기도 하지만 공존하는 시장을 통해 구현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존하고 승자만이 살아남는 시장이 아니라 여러 기업이 공존하는 시장이어야 소비자에게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

보시는 자비의 경제행위이다. 부자는 세금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과 노력 이상의 재산을 세상에 되돌려줄 수 있지만 세금제도는 대부분 부자에게 관대하기에 한계가 있다. 부자가 자발적으로 세상의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때 세상은 훨씬 더 좋아질 수 있다. 소수의 부자들의 재산을 나누면 전 세계 빈곤층을 모두 없앨 수 있다고 한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과 유리되어 살기에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의 마음을 가질 기회조차 없다. 부자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도 불자의 몫이다. 일정 수준의 이상의 재산은 자기 것이 아니고 세상의 것이라는 겸손한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자비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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