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중도 소비

 

아이폰은 가장 비싼 휴대폰이다. 부자는 당연히 사도 문제되지 않는다. 중산층이 사도 문제되지 않겠지만 서민이 사면 문제가 될까? 중국에서 아이폰을 사고 싶어 장기를 팔았다는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었다. 참으로 섬짓했지만 인간의 욕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사건이다. 처음 아이폰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의 열풍에 비하면 지금은 다소 시들하지만 여전히 아이폰 매니아들이 많다. 나도 아이폰을 쓰고 있는데 솔직히 시스템의 안정성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안드로이드폰보다 더 좋다. 무엇보다도 단순하면서도 멋진 디자인이 젊은 세대에게 많이 어필한다. 매장에 가보면 대부분 아이폰보다 싼 휴대폰이고 물론 공짜인 휴대폰도 있다. 아이폰은 서민이 사기엔 부담이 되는 폰이며 서민이 사용하고 있다면 주변에서 과연 서민이 아이폰을 써야 되나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소비도 분수에 맞아야
인간 본능 속 아름다움 추구
중도적 소비 범주선 인정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서민이 아이폰을 사면 사치라고 해야 할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주관적 판단일 수 있지만 나는 서민이 아이폰을 사는 것은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사치라고 생각한다. 물론 불교의 관점에서 사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불자도 있을거다. 부자는 당연히 아이폰을 사도 사치는 아니다. 언젠가 뉴스를 보니 휴대폰에 여러가지의 보석을 붙여 수천만원에 판매한다. 만약 아이폰에 다이어몬드와 사파이어를 박으면 수천만원은 금방될 거다. 이런 초고가 아이폰을 부자가 산다면 사치일까 아닐까? 나는 사치라고 생각한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어떨까? 아마 많은 불자들이 사치라고 생각할거다.

경전을 보면 부자가 고가품을 사는 것과 가난한 사람이 고가품을 사는 것을 부처님은 달리 판단하셨다. 가난한 사람에게 사치일 수 있는 품목이 부자에게는 사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기준이다. 만약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무조건 아이폰을 사면 안 된다고 한다면 획일적인 기준이 적용되는 셈이다. 불교는 획일적 기준이 아닌 다양하고 유연한 기준을 추구한다. 따라서 교리상으로도 획일적 기준이 적용될 수 없지만 경전에도 구체적으로 획일적인 기준이 아닌 다양한 기준이 적용되고 있다. 부자는 돈이 많기에 아이폰을 사도 괜찮지만 서민이 아이폰을 산다면 사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중도적 소비의 판단은 획일적 기준이 아닌 분수에 맞는가의 여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부자는 아이폰을 사도 분수에 맞는다. 서민은 아이폰을 사면 분수에 맞지 않는다.

아무리 부자라고 하더라도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를 박은 초고가 휴대폰을 사는 것은 중도적 소비라고 할 수 없다. 즉 아무리 부자여서 수천만원짜리 휴대폰을 사는 것이 분수에 어긋나지는 않더라도 휴대폰의 기능과 목적에 비추어 적정하지 않다. 따라서 중도적 소비라면 첫째 분수에 맞아야 하지만 둘째 기능과 목적에 맞추어 적정해야 한다. 수천만원짜리 제품이라고 무조건 부적정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수천만원짜리 자동차는 부자에게 부적정한 제품이 아니다. 그러나 수천만원짜리 휴대폰은 적정한 소비라고 볼 수 없다.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로 치장한 휴대폰은 아름다움을 위한 차원을 떠나 과시욕구의 범주에 들어간다. TV 드라마로 인기를 끌었던 ‘다운튼 애비’에서 귀족들의 스푼을 집사가 하인에게 가르친다. 하인은 티스푼, 에그스푼, 멜론스푼, 잼스푼, 포도스푼, 테이블 스푼을 구별하여 주인이 필요할 때 각각 놓아야 한다. 드라마에서는 영국 귀족의 호화로운 삶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차별화하여 나를 더 부각하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초고가 휴대폰으로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반짝이게 하여 상대의 기를 죽이고 으시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오늘날 소비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이다.

비교는 인간의 징그러운 본능이다. 거지는 이건희 회장과 자신을 비교하고 슬퍼하지 않지만 자기보다 구걸을 더 잘해서 돈을 더 잘 버는 동료 거지와 자신을 비교하고 슬퍼한다. 소비중독은 현대인의 경제 생활에 있어서 암과 같은 존재다. 소비중독이라는 암은 비교라는 영양제를 먹고 자란다. 우리가 비교를 시작하면 돌이키기 매우 어려운 소비중독의 길로 들어선다.

일본에서는 전재산을 투입하여 수억원을 호가하는 고급 스포츠카 페라리를 구입한 뒤에 집이 없으니 페라리에서 잠을 자고 편의점에서 음식을 사서 식사를 해결하고 공원 화장실에서 생리욕구를 처리하는 페라리 거지가 있다. 한국에서도 돈 빌려 집을 샀다가 가난해지는 '하우스 푸어'에 이어 돈 빌려 고급 자동차를 산 뒤에 가난해지는 '카 푸어'도 등장했다. 중산층이 1억원이 넘는 벤츠 승용차를 구입한다면 분수에 어긋난다. 부자가 구입한다면 분수에 어긋나지 않는다. 만약 10억원에 가까운 차는 어떨까? 그 정도는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관점도 있겠지만 나는 아무리 부자여도 그 정도의 승용차는 분수에 어긋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기능과 목적에 비추어 적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 좋은 차를 위한 투자는 끝이 없을것이다. 20억짜리 승용차도 초첨단 기술을 장착 하면 30억짜리가 될 수 있다. 부자는 자기의 돈이 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에 의해 탄생한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소비에도 중도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부자여도 10억원 20억원하는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은 적정하지 않다. 중도적 소비란 분수에도 맞아야 하지만 기능과 목적에 비추어 적정해야 한다.

불교는 ‘행(실천)의 종교’라는 말을 많이 한다.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가 아니라 부처의 행위를 하니 부처다’라는 말도 있다. 깨달으면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분명 단순 소박한 삶을 산다. 우리는 과연 언제 깨달을 수 있을까? 영원히 오지 않을 깨달음의 순간까지 기다리지 말고 단순 소박한 삶을 살면 행위에 의해 우리의 사고와 태도가 바뀐다. 따라서 우리는 깨달음의 길을 가면서 단순 소박한 삶이 스스로 체화되도록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 소박한 삶을 통해서 마치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해야 한다.

중도적 경제관은 스스로 단순 소박한 삶을 실천하는 경제관이다. 다만 인위적이고 금욕적으로 단순 소박한 삶을 실천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미국에서 초코렛과 욕망에 대해 연구한 결과는 금욕이 절제에는 서투른 처방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정기간 동안 초코렛을 먹지말라고 한 뒤에 초코렛을 먹도록 허용한 집단이 자유롭게 초코렛을 먹게 한 집단 보다 초코렛의 소비량이 더 많았다. 우리는 금지하면 더 하고 싶어한다. 불교의 절제를 금욕으로 생각한다면 구태여 불교를 믿을 필요가 없다.

백화점에 가보면 돈이 없는 사람은 여기 오면 안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고 멋진 옷이 넘치니 누구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지나가기 힘들 수밖에 없다. 남자들 옷이야 유행을 덜 타기 때문에 괜찮다 쳐도 여자들 옷은 유행이 자주 바뀌니 돈이 없으면 유행에 뒤떨어진다. 한 때 남자들 자켓에 단추 3개짜리가 유행한적이 있었는데 나는 딱 한 번 3개짜리 옷을 구입한 적이 있었다. 왠지 곧 2개짜리로 회귀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잠깐 3개짜리 단추가 유행하더니 곧 2개로 돌아갔고 요즘은 2개짜리가 대세다. 나는 옷을 살 때마다 가능하면 유행을 덜 탈 것 같은 옷을 산다. 단순하고 고전적인 디자인은 언제나 입을 수 있으며 사람들이 젠스타일 즉 미니멀리즘이라고 표현하는 불교적 디자인이어서 내 마음도 편하다. 그러나 멋진 옷을 보면 누구나 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부처님은 아름다운 옷을 사고 싶어하는 불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

부처님 당시에 출가자들은 처음에 분소의라는 옷을 입었다. 분소의는 시체에 입혀져 있는 옷을 벗겨서 기워 만들어 입은 옷이다. 사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옷이다. 분소의를 입는다면 누구나 물질에 대한 욕구를 극복하게 될 것 같으니 알고 보면 참으로 효과가 있는 처방이다. 빔비사라왕의 주치의였던 지바카는 당시 최고의 명의였으며 부처님을 존경하던 빔비사라왕에 의해 불교교단에 파견되었다. 지바카는 분소의에 묻어 있던 병균 때문에 스님들이 자주 병에 걸리는 것을 알고 분소의를 입지 말 것을 부처님께 건의했다. 부처님은 중도를 추구하는 합리의 화신이기에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 나중에 교단에서 부처님의 사촌인 제바달다가 다시 분소의를 입자고 주장할 정도로 분소의를 입는다는 것은 물질적 욕망을 떠난 상징으로 여겨졌다. 제바달다는 분소의 이외에도 고기를 먹지 말자는 주장 등을 하는데 부처님은 이를 거절하고 제바달다는 수많은 추종자를 데리고 교단을 이탈한다.

비록 분소의는 입지 않게 되었지만 출가자들은 호화로운 옷을 절대 입지 못하였고 3벌의 옷만 허용되었으며 새 옷감이나 새옷을 받으면 아름다운 색을 청, 흑, 모란색(木蘭色)으로 바꾸는 괴색(壞色)을 하였다. 부처님의 의도는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않도록 강제함으로써 아름다운 옷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부처님은 아름다운 옷을 입지 말라고 명하실 것 같다. 그러나 뜻밖에도 부처님은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인정하고 계신다. 사분율은 "연화색 비구니는 한 벌의 값진 상가아티이를 입고 있었는데… 여자들은 좋은 옷을 입어도 좋지 않거늘 하물며 해어진 옷이겠느냐?"라고 설한다. 또한 비구가 비구니로부터 옷을 취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비구가 비구니의 좋은 옷을 뺏기도 한 것을 알 수 있다. 경전에서 좋은 옷이라고 할 때 '좋은'은 '귀상(貴價)' 혹은 '상(上)'이라고 표현하였다. 여성은 귀하고 상급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불교는 획일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법이 없다. 항상 유연하고 다양한 제도를 허용한다. 출가자와 재가자를 동일 잣대에 놓고 규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출가자에게는 돈은 만지지도 말고 돈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도 말라고 엄격하게 통제하셨지만 재가자들에게는 돈은 좋은 것이니 열심히 돈을 많이 벌라고 하셨다. 돈을 벌 때는 열심히 벌라고 하셨지만 돈을 소비할 때는 절제를 가르치셨다. 부처님이 돈을 열심히 벌라고 하셨다고 모두에게 돈을 적극적으로 벌라고 요구한다면 그것 또한 극단이다. 재가자와 출가자 모두에게 무소유를 주장한다면 극단이다.

출가자에게는 분소의나 괴색으로 아름다움을 멀리하도록 요구하셨을지라도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를 인정하신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능은 여성에게 더 강하고 출가자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본성이 있음을 아시고 비구와는 달리 비구니에게는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 허용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재가자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금지하실 리가 없다.

불교의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의 궁전은 온갖 호화로운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장아함경〉에 의하면 “금다락에는 은평상 은다락에는 금평상이 있어 곱고 보드러운 금실로 짠 자리를 그 위에 깔았다. 수정 유리 다락과 평상도 또한 그러했다. 그 법전의 광명이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는 것은 마치 태양이 너무 밝아 바로 보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았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반드시 중도적이어야 하고 따라서 분수에 맞고 적정해야 한다. 중도적 소비의 범위 내에서라면 아름답고 멋진 옷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아름답고 멋진 옷이라 할지라도 분수에 맞고 목적과 기능에 비추어 적정하면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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