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최초의 화가 사형수 이규상

사형수 이규상이 그린 제41회 교정작품전시회 문예작품(수용자) 부문 대상 수상작 ‘일상2’ 70×50cm.

불우한 환경서 비롯된 살인
〈지장경〉 읽고 비누불상 조각
미술교습 받고 그림수행·참회
교정작품전시회서 대상 수상


1967년부터 교화위원으로 600여명의 사형수들을 만났지만 그 중 가장 오랜 인연을 이어가는 사형수가 있다. 최초의 화가 사형수 이규상이다.

구치소 밖에서 시작된 인연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빚더미 속에서 살아야 했던 이 씨는 청소년기부터 평택의 폭력조직에 몸을 담았다. 어느 날 문득 그간의 생활을 청산하겠다고 마음먹은 이 씨는 30대 초반 대구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 씨는 부인에게 새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불행히도 그의 운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주민등록 이전 절차를 밟기 위해 딱 한 번 다시 찾은 평택서 우연히 폭력조직 후배를 만난 것이 화근이었다. 후배는 도박자금 마련을 위해 그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겁박하려 휘두른 주먹 한 번에 상대방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정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날 그는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살인강도사건에 연루된 이규상은 1999년 9월 서울구치소에 수감됐고, 2000년에 사형수가 됐다.

그로부터 4년 뒤, 나는 여느 때처럼 새로운 교화대상자를 만났다. 반 평 남짓한 독방서 지내고 있는 사형수 이규상이었다. 초면임에도 몇 마디 나눠보니 마음이 확 끌렸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어머니가 독실한 불자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그를 만나기 시작한 지 6개월쯤 지난 어느 날, 그는 나와 1년 전에도 만날 뻔했던 사이라고 조용히 털어놨다.

20여 년 전 부산 자비사로 나를 찾아온 노보살이 있었다. 서울서 왔다는 노보살은 쓰러지듯 절을 하더니 내게 간청했다.

“저는 죄 많은 늙은이입니다. 제 아들놈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사형수가 됐습니다. 염치불구하고 제 아들을 한 번 만나달라는 부탁을 드리려고 스님을 찾아 왔습니다. 아들놈이 꼭 스님을 뵙고 싶다고 이 어미에게 간절히 청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꼭 한 번만 제 아들을 만나주십시오, 스님”

사정이 어려워 내가 부산서 서울까지 가는 여비도 준비하지 못했다며 통곡하는 노보살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당시 끝내 연이 닿지 않아 사형수와의 만남은 무산됐었다.

긴 시간이 흘러 만난 사형수 이규상이 바로 그 노보살의 아들이었다. 다시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참회의 비누불상 그리고 미술
이규상은 수감생활 동안 돌아가신 어머니를 향한 죄책감으로 불심을 키웠다. 빨랫비누를 조각해 불상을 만드는 것도 그의 정진 중 하나였다. 그는 어느 날 비누를 보고 〈지장경〉 내용이 생각났다고 했다. 어린아이들이 백사장서 놀다가 모래 위에 부처님 상을 그리고 합장하면 모든 죄업이 소멸된다는 부분이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조각한 그의 조각품은 어느새 수십 개에 달했다.

사형수 교화실에 진열한 비누불상 중 몇 개가 내 수중으로 들어왔다. 나는 불상 하나를 서영훈 前 대한적십자사 총재에게 준 적이 있었다. 비누불상을 하나 받은 서 前 총재는 이규상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며 면회에 동행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당시 구치소장과 독대한 서 前 총재가 사형수가 조각한 비누공작품 때문에 구치소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서 前 총재가 돌아가고 감방 안의 대대적인 압수수색이 진행됐다. 사형수와 직접 연관된 내부 물품이 유출됐다는 사실이 발각됐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교화실은 물론 독방에 뒀던 모든 공작품을 압수당한 이규상은 허탈감에 빠졌다.

그러던 중 이규상은 2004년, 당시 교화위원인 이인자 경기대 예술학과 명예교수를 처음 만난다. 이 자리서 그는 미술을 전공한 이 교수에게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거듭 부탁하는 이 씨에게 불자였던 이 교수는 결국 그림 교습을 승낙했다. 이 교수는 계란 100개를 그리는 숙제를 내주면서 “계란을 그리면서 삶의 가치를 찾아내는 참선과 통하는 작업을 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는 매달 한 번 교화실서 교습을 받으면서 교도소 내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재료인 연필만으로 그림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가 그린 계란 개수만큼 참회는 깊어졌고, 실력도 늘어갔다.

교정전시 출품작 대상 수상
이 씨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지만 사형수가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봐야 출품할 수는 없었다. 원칙상 사형수는 사회복귀를 전제로 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수차례 천 일 기도를 올린 끝에 부처님의 가피를 입은 것일까. 기적이 일어났다.

수시로 순시하는 교도관들은 그림 그리는 이규상에 대해 상부에 분명 보고했을 것이다. 규정상 문제될 소지는 있었지만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소장마저 인정한 이 씨의 빼어난 실력에 교도관들은 사형수가 그린 그림 한 점을 얻고 싶어 할 정도였다. 그렇게 ‘그림 그리는 사형수’ 문제는 넘어갔다. 이규상은 계속 그림을 배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교전에 출품까지 할 수 있었다. 교정당국서 공식적으로 허락한 적은 없지만 이규상의 그림 ‘일상2’는 마침내 제41회 교정작품전시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합동전시로 피해자 가족 돕고 싶어
이 씨가 대상을 받고 난 뒤부터 다른 사형수들도 그림을 배우는 경우가 하나 둘 늘었다. 역대 교정사상 최초로 이례적인 ‘화가 사형수’가 나왔기 때문이다.

화가 사형수 이규상은 언젠가 타 사형수들과 합동전시를 하고 싶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묻자 합동전시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피해자 가족들을 돕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를 따라 그림을 배우는 다른 사형수들은 억겁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참회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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