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소를 타고 생활들을 하니 피리를 부는 거죠!
우리가 지금 소를 타고 생활들을 하니 피리를 부는 거죠!
  • 대행 스님
  • 승인 2018.07.3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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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속에서 모두 나오게 한 거니 네 속에서 해결 해야잖아!

(지난 호에 이어서)

그렇다면 진짜로 뛰는 사람을 믿어라 이겁니다. 발 없는 발로 뛰고, 손 없는 손으로 하고, 모든 거를 두뇌 아닌 누진으로써 안으로 통신을 하고 바깥으로 통신을 해서 모두 작용을 하는 그놈을 믿어라 이거죠. 나는 뛰어 봤자 한 걸음밖엔 못 뛰어. 그러나 ‘진짜 나’는 여기서 미국을 뛸래도 한 걸음이요, 태양계를 뛸래도 한 걸음이요, 은하계를 뛸래도 한 걸음이요, 어느 혹성을 뛸래도 한 걸음밖에 안 되니까, 체가 있는 우리 육신의 걸음 한 걸음과는 아주 천지 차이니까요.

주인공을 위로도 아래로도, 높게도 낮게도 보지 말고
그냥 아주 뗄래야 뗄 수 없는 친구로 생각해도 돼요.
세상에 고놈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마음! 고놈이 아니라면…, 고놈이라고 한다고 해서 고놈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또. 고놈도 될 수 있고, 뗄래야 뗄 수가 없는 친구도 될 수 있고, 부처도 될 수 있고 법신도 될 수 있고, 화신도 될 수 있고 약사도 될 수 있고, 물에 가서는 용신도 될 수 있고 들에 갈 때는 지신도 될 수 있고, 내가 가는 대로 내 용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이거는 바꿔지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주인공을 위로도 아래로도, 높게도 낮게도 보지 말고 그냥 아주 뗄래야 뗄 수 없는 친구로 생각해도 돼요. 세상에 고놈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딴 데서 갖다 줍니까, 뺏어 갑니까? 내가 하는 대로 입력이 되었다가 나오는데 남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속에서 병난 것은 마음속에서 해결해야지 어디서 어떻게 합니까? 이것을 모르니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영계성’이라는 것도 대부분 내 몸속의 악업 선업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든지 나를 좋게 해 주려고 그러든지 간에,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나오는 대로 끄달려서 돌아가지 말고 속지 마라. 네 마음이 있지 않느냐. 마음으로써 그렇게 일어나는 그것을 다 잠재워라. 이 의식 속에서 나오는 것을 한마음으로써 대치를 해라. ‘모든 거는 한마음 속에서 나온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 해결을 해라.’ 하고, 속지 말고 잘 다스리며 나가라.” 이거죠.

속는다 하면…, 옛날에 내가 그런 얘기도 했죠. 수좌들이 동짓날 팥죽을 쑤는데 팥죽이 가마솥에서 부글부글 끓어서 그냥 방울이 나오죠. 이걸 내가 몇 차례씩 얘기합니다. 부글부글 끓어서 방울이 나오는 거를 ‘요것도 문수란 놈, 요것도 문수 놈, 요것도 문수 놈!’ 아, 이러고 주걱으로 들이쳤다지 않습니까? 그거는 그렇게 안 해도 자기는 알고 있지만, 다른 수좌들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이죠. ‘네 몸속이 즉 팥죽이다. 네 몸뚱이는 팥죽 솥이다.’ 그러면 네 몸뚱이 속에서 그렇게 끓어서 나오는 것을, 한군데서 나오는 것을 나오는 대로 각각인 줄 알고, 나에게 자꾸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거를 곧이듣고 자꾸 휘말리니까 ‘요것도 그놈, 요것도 그놈, 문수란 놈!’ 하는 거죠. 이게 생각을 내는 거니까 문수거든. 법이거든요. 생각을 내기 이전은 부처지만 생각을 낼 때는 반드시 이게 작용을 하는 거니까, 팥죽이 끓어오르는 것이 작용을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요것도 문수, 조것도 문수’ 이렇게 쳤답니다.

그러니 한 몸 속에서 나오는 그 작용을 어떻게 이것이 따로 있고 저것이 따로 있다고 봅니까. 모두 하나 속에서 나오는 거를요. 그러니 ‘한마음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 해결을 해야잖아!’ 하고 거기다 그냥 되맡겨 놓으면 되입력을 하는 거죠. 입력이 됐던 거에다 입력을 다시 하는 게 되니까 앞서 입력이 없어지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그렇게 속지 말고 모든 걸 거기다가 놓을 때 해결되는 거죠. 또 생활을 할 때는 모든 걸…, 아까도 얘기했듯이 바다는 어떠한 물이 들어와도 다 받아들이죠. 받아들인단 말도 없이 그냥 자동적으로 받는 거죠? 받으면 그대로 바닷물이지, 이 물 저 물 섞였다 해서 딴 물이라고 이름 지어서 부를 수가 없습니다, 들어갔다 하면.

그러니 이름이 다른 데서 나오고 행동이 다른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천차만별의 행동, 말, 마음이 생기는 것이 전부 내 몸속의 업식에서 나오는 거니까 다 그냥 마음으로 다스려서 거기다 맡겨 놓고, 좋은 거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놓고, 언짢은 건 ‘그렇게 해서는 안 되잖아!’ 하고 놓고, 이렇게 마음을 돌려서 자꾸 대치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마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질문하실 것이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남) 무더운 여름에 법형제 여러 법우님들을 위해서 무상 법문을 설해 주시니 무척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항상 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몇 가지를 큰스님께 말씀드리고 가르침을 받고자 나왔습니다.

요새 시중에 모 스님의 수필집이 나와 있어요. 그런데 그 제목이 『여보게, 저승 갈 때 뭘 가지고 가지』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그 책의 제목을 대했을 때 순간 생각이 ‘저승에 갈 때 가지고 가기는 뭘 가지고 가!’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10여 분 지나서 집에 오는 도중에 들판에 매어져 있는 염소를 보는 순간 ‘아, 저게 바로 지옥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서 너무 감사한 마음에 ‘지옥이 따로 없구나.’ 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깊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을 주인공 자리에 넣고 다시 ‘아, 바로 이 느낌이 공부가 되는 느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요.

그러고 나서 잊어버린 상태에서 시간이 한 한 달 정도 흘렀는데, 어느 날 아침 식사하기 전에 세수하러 나왔는데 불현듯 ‘저승에 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가지?’ 하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 제가 ‘이승도 없는데 무슨 저승이 있어?’ 하고 대답을 하고 보니까 제 스스로 ‘아, 이게 공부가 돼 가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진짜 스스럼없이 튀어나온 말이지만 이 책의 제목을 통해서 제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이 공부가 되어 가는 한 과정으로 보아야 되는지, 한번 여쭙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진짜 제가 느낀, 이승이 없기 때문에 저승 또한 없는 것인지, 그런 개념 자체도 없는 것인지 여쭙고 싶어 나왔습니다.

큰스님 마음이라는 마음을 요상하게 생각을 해서 끌고 가지 마시고요, 아주 그렇게, 소탈하고 아주 깨끗하게요. 이승도 없는데 저승이 어딨습니까? 지옥도 없는데 천당이 어딨습니까? 여러분이 마음먹고 행하고 사는 데에 바로 지옥도 천당도 있는 것이고 그렇습니다. 둘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을 때에는 가능치 않은 게 없습니다.

지금 실질적으로 생각해 보셔도 그렇습니다. 딴 데서 태어납니까? 이 자리에서 태어나시죠? 죽는 것도 이 자리에서 죽죠? 그러니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보이지 않는 데에 인과로써 업식만 짊어지고서 가고 오는 거죠. 그래서 영혼의 근본과 더불어 같이 부합이 돼서, 정자 난자를 비롯해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그것이 바로 업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고(苦)라는 소리가 나온 것이 바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식이 주어진 대로 이 현실에 자꾸 나오니까요. 그러니까 천당도 지옥도 바로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런 거죠. 그러니 내가 없는데 가져갈 것은 어딨으며 가져올 게 어딨습니까?

질문자1(남) 또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십우도라고 하는, 소 찾는 과정을 가끔 느껴 보고 또 해 보는데요, 큰스님의 법문 중에서 소에 대한 말씀도 가끔 해 주셔서 나름대로 관해 보다가 문득 어느 날인가 소를 탔다는 것도 느껴 봤고 또 소를 타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마음속으로 느껴 봤습니다. 그런데 그 느낀 다음 순간 와 닿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소를 탔는데 왜 소에서 내리려고 하지 않는 병통이 있느냐? 그 병통이 무엇인가?’ 하고 의문이 들었는데 그 뜻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를 타고서도 소에서 내리려고 하지 않는 병통은 어떤 병통인지 궁금해서….

큰스님 소에서 내리면 송장이죠. 하하하…. 아니, 지금 생활들을 하실 때에 소 타고 피리 불고 안 다닙니까?

질문자1(남) 그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요, 그래서 저도 그….

큰스님 아니, 지금요, 소는 마음 내기 이전을 뜻하고, 우리가 영혼의 근본이 없으면 지금 송장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해요. 그게 소니까요. 소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소를 타고, 얼른 쉽게 말해서 주인공을 타고 생활들을 하고, 말들을 하고, 전달들을 하고 돌아가니 피리를 부는 거죠. 그것이 그냥 화엄경이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체가 바로 화엄경이 그저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하하하….

질문자1(남) 그런데 그것을 병통이라고 하는 까닭은….

큰스님 병통이 없으니까 병통이라고 그랬겠죠. 하하하….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큰스님 모두 긍정적으로만 생각을 하세요. 과거도 지나갔으니까 묻지 마시고, 미래도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묻지 마시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거, ‘현실에, 내가, 지금’ 말입니다.

질문자2(남) 오늘 큰스님께 가르침을 청하고자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질문 세 가지를 올리겠습니다. 과거에 했던 일이 오늘에 와서 과보로 나타날 때 그 과보가 오늘의 나에게 바람직한 일이라면 몰라도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깊은 회한에 잠기게 됩니다. 큰스님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그것도 놓고 가라.” 하십니다. 그러나 당면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궁리 저 궁리를 하기 마련인데 그럴수록 과거에 대한 회한은 짙어지게 됩니다. 이럴 때에 이 일 저 일 궁리하는 것과 놓고 가는 도리는 생활 가운데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인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그런데 과거라고 하지만 어저께도 과거고 한 시간 전도 과거고 삼천 년 전도 과거입니다. 그런데 삼천 년 전과 어저께와 한 시간 전이 같습니다. 이게 한 찰나입니다. 내가 항상 구정물을 바꿔 쓰라고 그러죠? 그냥 거기다 놓으란다고 그냥 맡겨 놓기만 해서는 안 되죠. 예를 들어서 기계를 잘 고쳐서 끼워야 될 텐데 기계를 고치지도 않고 그냥 갖다 끼우면 이게 돌아갑니까? 안 돌아가죠? 그러니까 고쳐서 끼워야죠, 고장이 난 거는요. 그와 같이 그렇게 다가와서 내 앞에 닥칠 때는 과거든 뭐, 오래 걸렸든 업보든 그런 건 상관하지 말고 ‘네 속에서 이렇게 모두 진행한 거니까, 네 속에서 모두 나오게 한 거니까 네 속에서 해결을 해야잖아!’ 하고 반드시 바꿔서 놓는 겁니다. 바꿔 끼우는 거죠. 바꿔 끼우고 믿어야 되죠. 고놈을 믿어야죠.

안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어떠한 문제든지 용도에 따라서 통신을 하고…, 이 인간에게도 대기권이 있어요. 그래서 이 원자인 마음속에서 모두 분자로, 입자로 출발을 하죠. 그래서 이거를 음파라고 하죠. 빛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무전통신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그렇게 해서 다 이것을 판단을…, 판단이라기보다도 법으로 진행을 해 버려요, 그냥.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놈, 그렇게 할 수 있는 그 빽이 있는 놈한테 다 맡겨 놔요! 그렇게 바꿔서만 맡겨 놔요. 이렇게 심부름을 시킬 때 “이거를 이렇게 해서 너 바꿔 가지고 오너라. 이거를 가지고 이렇게 사 가지고 오너라.” 해야지, 이거를 주고선 “네 마음대로 해라.” 이런다면 어떻게 합니까, 이거를? 그러니까 그 자리에 그냥 놔져만 있는 거지, 그게 중용이 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이거를 이렇게 해서 이렇게 구정물이 들어오는 거니까 맑은 물로 대치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돌려놔야 되겠죠. 이런 것까지 이렇게 힌트를 주고 가르쳐서 말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예요, 아마. 하하하….

질문자2(남) 감사합니다. 그다음 마음공부에 관해서 두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첫째는 성품이 드러났을 때 그것이 참성품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요? 둘째는 성품을 본 후에도 걸림이 있다 할 때는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요. 가르침을 청하옵니다.

큰스님 이게 여러분이 아리송해서 몰라서 그러시지, 우리가 잘못하든 잘하든 그냥 거기서 생각나서 한 것은 후회를 마세요. 예를 들어서 그것이 그냥 자기 성품 속에서…. 그릇이 작은 데서 나왔든 큰 데서 나왔든, 잘못하는 마음으로 나왔든 잘하는 마음으로 나왔든, 자기가 잘하고 못하고를 모르니까 그냥 그 마음이 나온 거거든요. 내가 잘 보고 잘 듣고 판단을 해서 한다는 게 그만 그렇게 잘못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마음속에서 다 나온 거죠.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었을 땐 ‘아이구, 내가 이걸 잘못했구나. 이거를 이럭하지 말아야 하는 건데 내가 이렇게 했구나.’ 하고 후회를 하죠. 그러면 거기서 알아지는 게 있죠. ‘이건 다시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그런 앎이 생기죠.

그러니까 잘못 나왔든 잘 나왔든 그것이 우리 인생관에 의해서 자기를 리드해 나가고, 즉 말하자면 잘 배우게끔 이끌어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을 할 때 ‘그것을 잘 생각을 못해서 내가 이렇구나. 잘 생각을 할 것을….’ 이렇게 후회를 하지 마세요. ‘아, 그걸로 인해서 내가 배움이, 느낀 것이 참 많았다. 경험이 많았다. 그러니 이 경험을 준 것도 참 감사하구나.’ 하고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그러한 마음이 생겨서 구덩이에 빠지게끔 하지를 않아요. 모를 때 한 번 두 번은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그러면 아주 자동적으로 그냥 이 사람이 구덩이에 빠지게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이렇게 가게 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내부에서 심안으로 이렇게, 육안을 통해서 보게끔 만들거든요. 심안으로 듣게끔 만들거든요. 그래 가지고 아주, 잘못됨이 없는 그런 진로로 이끌어 가죠. 그렇기 때문에 거기다 맡겨서 해라, 해라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 성품은, 그렇게 쓰는 성품이나 이렇게 쓰는 성품이나 성품은 둘이 아니에요. 마음내기 이전은 똑같은데 마음을 어떻게 내느냐에 따라서 자기한테 주어지죠. 그런 거를 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둘로 보지 말고 ‘모든 것을 너로 인해서 경험을 얻었으니 감사하구나.’ 이렇게 해서 또 거기다 감사하게 놓는 겁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내가 육안으로 보게끔 하지 말고 심안으로 보게, 네가 보고 네가 할 수 있게끔 해라.’ 하고 거기다 맡겨 놓을 수 있는 그 믿음이 진실하다면 그것으로 족하죠. 그 성품이 다른 데서 나오는 게 하나도 없어요. 악도 거기서 나오고 선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요.

질문자2(남) 감사합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한마음요전』과 마음공부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요전이 간행된 지 한 3개월가량 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많은 신도들이 한 권씩 구입해서 공부에 참구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어떤 분은 하루에 몇 구절씩 읽고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평소에 큰스님의 법문을 많이 듣다 보니까 이제는 요전을 보지 않아도 내용을 다 안다, 심지어는 읽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제 생각에는 어느 분이 옳고 어느 분이 그르다 하는 말을 하기보다는 마음공부 하는 과정에서 경전의 중요성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 하는 점이 더 궁금합니다. 평소에 경전을 어떠한 마음의 자세로 대해야 하며, 특히 『한마음요전』을 어떻게 참구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허허허…. 부처님께서는 사십구 년을 설하셨고 그것을 경전으로 편집해서 냈어도 이날까지도 모두들 그 마음을 모르고, 그러면서도 그 마음을 움죽거리고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나로서는 경전을 봐야 옳다, 경전을 안 봐야 옳다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죠. 왜냐하면 마음 자체는 다 똑같지만, 이 오장 육부 속에도 모습들이 천차만별로 다르고 행도 다르고 모두 다르듯이 이 세상만사의 모든 마음 내는 그릇은, 마음 내는 차원은 천차만별로 다른데 그건 그릇대로, 자기의 생각대로 할 뿐이지 누가 봐야 옳다, 안 봐야 옳다 할 수는 없죠.

그러나 참고적으로 생각을 해 보세요. 경전을 써 놨어도, 풀이를 해 놨어도 기복으로 풀이를 많이 해 놨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기복으로 써 놓은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참고적으로 지혜를 넓혀 가고 마음을 계발하려면, 즉 지혜롭게 발전을 하려면 자기가 어떤 때는 모르는 게 있으면 한번 보고 넘어가는 것도 좋은 일이죠. 그래서 목차 목차대로 있으니까 자기가 아쉬운 대로 한번 넘겨서 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좋겠고요. 우리가 보고 듣지 않으면 이름을 몰라서 생각도 안 납니다. 우리 먹는 것도 그렇죠. 우리가 먹어 봤으니까 먹고 싶은 생각이 나는 거지, 보지도 못하고 먹어 보지도 못하고 맛도 모르는데 어떻게 먹고 싶은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참고적으로 길잡이로서 꼭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책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불교 자체에서 개선할 게 너무도 많은데 그 책을 만약에 잘 보고 습득해서 넘어간다면…, 그 책은 살아 있는 겁니다.

어떤 돌부처가 말입니다, 옮겨 놓으려고 하니까 꿈에 나타나서 “나는 가기 싫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다시 모셔 놨답니다. 그와 같이 돌 하나도 생명이 없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 책에 말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이 다 들어 있는 겁니다. 내가 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딴 사람이 한 게 아닙니다. 다 한마음으로써 다 같이 한 겁니다, 그게. 이 세상의 진리이자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그냥 글귀로 해 놨을 뿐이지 모두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해 놓은 겁니다, 그게. 그러니까 누가 했다, 누가 안 했다 이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참고적으로 우리가 보고 알아야 되지 않나. 그래야 마음의 발전이 되면서 먹고 싶은 게 생각이 나죠. 먹고 싶은 게 생각이 날 때는 가차 없이 갖다가 먹을 수 있죠.

그런데 예를 들어서 “응, 그 사람이 얘기하는 게 만날 그 얘기가 그 얘기야. 그런데 뭘 그래?” 이러는 사람이 있는데 이게 글을 외워서 배우라는 게 아니거든요. 외워 가지고 그 외운 거는 다 버리더라도 그 뜻을, “내가 진짜 갖다 먹을 수 있도록 행을 중용으로 해라. 정신계와 물질계를 중용으로 해라.” 이런 뜻이 담겨 있는 거지, 그걸 외워서 읽으라고 해 놓은 게 아니거든요. 읽다 보면 때에 따라서 어떠한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면 생각이 나거든요.

예를 들어서 하다못해 차 사고가 날 일이 생겨도 읽었던 대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차 사고가 안 날 수도 있는 거거든요. 이 보이지 않는 데, 이 우주 자체 허공에 말입니다, 생명들이 꽉 차 있어요. 그러니까 어느 때 어떻게 부딪쳐서 일이 생길지 모르거든요. 그래서 몸뚱이나 혹성 자체도 다 대기권에서 통신으로 들일 건 들이고 버릴 건 버리고 대치할 건 대치하고, 이렇게 해서 다니게끔 돼 있거든요. 보이지 않는 데 그렇게 꽉 차 있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문득문득 스스로 생각날 수 있도록 그런 이미지를 심어 주기 위해서 그 책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러는 줄도 알아요. ‘그 사람은 뭐, 만날 해 봤자 그 말, 그 말, 만날 그 말만 되풀이하는 사람!’ 이러겠지만 말이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똑같은 말을 백 마디를 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구지 스님은 평생을 그저 손가락 하나만 들었어요. 하하하…. 그거는 왜 그랬을까? 그 의문도 나지 않습니까? 나는 그래도 이리저리, 이럭저럭 다 이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반찬 갖춰서. 허허허….

질문자2(남) 참, 더우신데 오늘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좋은 가르침을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가슴 깊이 새기고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렇게 하셔야죠.

질문자2(남) 예.

큰스님 그렇게 해서 누굴 줍니까? 자기가 갖는 건데. 하하하…. 또 질문할 사람 없습니까?

사회자 오늘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것 같습니다.

큰스님 그러면 내가 한마디 하고 끝내죠. 이거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시고) ‘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두 글자가 고정되게 주어져 있지 않구나!’ 하는 걸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난 아무개 아버지만 되는 게 아니다. 아무개 남편만 되는 것도 아니다. 아무개 아들만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거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없구나! 나는 없으니까 어떠한 업보가 걸릴 것도 없고, 어떤 애고가 생길 것도 없고, 아무것도 붙을 자리가 없구나.’ 이런 것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을 20년을 앓다가 왔는데, “어떻게 해야 낫겠습니까?” 하니까, 이렇게 만날 되풀이하는 사람이 그랬대요. 하하하…. “아, 병 붙을 자리가 있어야 병을 고치잖아?” 그러니까 그냥 그 즉시로 병 붙을 자리가 없다는 걸, 자기가 없다는 걸 알고는 병이 그냥, 가는 중에 나았더래요. 하하하….

※위 법문은 대행스님께서 1993년 7월 4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 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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