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 불법, 부처, 천지만물을 비롯해 나(我)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체유심조’이기 때문에 동시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며, 그래서 마음 작용인 ‘일체유심조’이다. 이 사실을 그대로 깨닫는 것이 바로 견성이다”


화엄경 사구게에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능화제세간(能畵諸世間) 오온실종생(五蘊實從生) 무법이불조(無法而不造)라는 말이 있다.

이는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능히 세상사를 다 그려내며, 오온이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그 무엇도 만들어 내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부처, 참나’는 개념(槪念)이 아니고, 이름(名)이나 모양(色)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말(言)이나 문자(文字)로 들어 낼수 없는 ‘텅빈충만, 공적영지(空寂靈智)’이다.

세상은 명색(名色)으로 존재(存在)하는 것이며, ‘나’라는 것도 이름과 모양일 뿐 실체(實體)가 없는 환(幻)이다.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나와 세상이 있는 것이며, 망심(妄心)이 없다면 나와 세상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통도 환일 뿐이다.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라는 말은 즉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다는 뜻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심은 일체를 그려낸 망심이다.

‘능화제세간(能畵諸世間)’은 일체유심조와 같은 뜻으로 마음은 능히 일체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이다.

‘오온실종생(五蘊實從生) 무법이불조(無法而不造)’는 오온이 모두 마음 따라 나온 것이어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모두 마음의 작용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이다.

무법이불조(無法而不造)라고 했다. 본무망심(本無妄心)이라, 마음은 본래 없는 것이지만,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불성, 불법, 법, 부처, 천지만물(天地萬物)을 비롯해 나(我)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체유심조이기 때문에 동시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만 마음의 작용인 일체유심조이다. 이 사실을 그대로 깨닫는 것이 바로 견성인 것이다.

하늘과 땅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의해서 천지만물이 창조된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엄경의 핵심이다. 마음하나 일으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만들고, 마음으로 이 우주법계(宇宙法界) 모든 세상을 만들어 내며, 마음으로 삼독심(三毒心)을 일으키고 마음으로 삼학(三學)을 닦아간다.

마음으로 번뇌와 집착을 일으켜 육도를 윤회하게 되고, 마음으로 집착을 끊고 해탈(解脫) 열반(涅槃)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마음자리 깨치면 텅빈 충만이며, 여여(如如)하고 적적(寂寂)한 부처요, 깨치지 못하면, 두두물물(頭頭物物)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천차만별(千差萬別)로 벌어지는 중생세계(衆生世界)이다.

그러나 중생이든 부처든 그 근본(根本) 성품(性品)은 하나이다.

법계의 성품을 관(觀)하라는 말은 바로 나의 근본을 살피고 나의 참 성품 즉 불성을 체득하라는 말이다. 법계의 성품이 바로 나의 성품이고, 법계의 근본이 나의 근본이다.

그 관법(觀法)이 ‘이 뭣고’ 이며 번뇌와 집착을 끊어 열반의 세계로 이끄는 금강보검(金剛寶劍)이 바로 ‘이 뭣고’ 인 것이다.

약인지심행(若人知心行) 보조제세간(普造諸世間) 시인즉견불(是人則見佛) 료불진실성(了佛眞實性)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음미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이 모든 세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안다면, 이 사람은 바로 부처님을 친견해 부처님의 진실성을 아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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