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사형수 김선자

친부·여동생 독살 혐의
사형수로서 집행대기 중
“죄 없어 집에 간다”고 주장

보도, 교정 지시 있었지만
대전 교도소로 이감, 형 집행
여전히 사이코패스 대명사로


사형수 김선자를 아는 이들은 그를 ‘대한민국 최초 여성 연쇄살인범’ ‘아버지와 친동생을 살해한 희대의 패륜범’으로 기억한다. 2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여러 방송서 자주 언급되며 등장하는 김선자. 나는 김 씨만큼 무고하다며 억울해하는 사형수를 지금껏 만난 적이 없다.

1990년도 쯤 서울 구치소를 찾아간 나는 사형 집행이 확정됐다는 한 수감자를 만났다. 김선자였다. 그간 만났던 사형수들은 “잘못은 했지만 사형당할 정도는 아니다” “억울한 나를 좀 살려달라”는 등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느 때와 같이 교화 법문을 했다. 그런데 김선자는 확연히 다른 태도로 나를 대했다.

나는 김 씨를 만나자마자 사형수에게 주로 하는 <금강경>의 마지막 대목을 읊조렸다. ‘일체유의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이란 4구 경구는 실제 사형 집행 현장에서 하는 바로 그 대목이었다. 삶이라는 건 한 마당 꿈이니 죽음을 준비하라는 내용을 가만히 듣던 김 씨는 엉뚱한 소리를 던졌다.

“저는 곧 나가는데요? 조금 있으면 집에 가요. 좋은 법문 잘 들었습니다”면서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김 씨의 말과 웃음은 과장도,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명백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순간 나는 ‘아까 들었던 사형수가 이 사람이 아닌가? 내 눈 앞에 있는 김선자가 죽음을 앞둔 사람이 맞는가’란 물음을 떨칠 수 없었다.

김영삼 前 대통령 정권 말기, 그 때만 해도 사형 구형부터 집행까지 일사천리였다. 바로 내일, 아니 이 자리를 뜨면 집행을 진행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 사람 같지 않았다.

너무나 황당해 김 씨에게 다시 물었다. 집에 간다는 게 무슨 이야기인지 묻자, 김 씨는 “저는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나가지요. 난 집행당할 이유가 없는데 왜 사형 당하나요?”라고 반문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들어주고 나오니 나는 얼이 다 빠지고 말았다.

상황을 모두 지켜본 교도관에게 김 씨가 정신감정을 받았는지 여부를 물었다. 교도관은 그가 정신이상자가 아닌 것으로 판명됐으며, 오는 사람마다 한결 같이 오늘과 같은 주장을 고수했다는 답을 할 뿐이었다. 교도관은 “그 여자, 진심이에요”란 말까지 덧붙였다.
 

검거된 김선자(사진 왼쪽아래)가 나온 뉴스화면 캡쳐.

여사를 나온 뒤 나는 김 씨의 완강함이 하도 이상해서 그에 대해 알아봤다. 김 씨는 채권자, 아버지, 여동생 등을 독살한 혐의로 1988년(49세)에 경찰에 검거됐다. 살인 5건, 살인미수 1건을 저지른 김 씨는 재판 끝에 1989년 사형선고를 받았다.

예상 밖의 태도로 ‘사형수의 억울함’을 고집하는 김 씨의 이야기에 나는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김 씨가 한 말이 도저히 거짓말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 김 씨의 억울한 사연을 여러 차례 제보한 끝에, 실제로 김 씨에 대한 방송이 전파를 탔다.

어디까지나 당사자 김 씨와 교도관의 말만 듣고 한 제보였다. 하지만 제작진은 치밀한 탐사취재로 현장서 증거들을 수집했다. 개략적인 문제제기로 시작됐지만 경찰, 재판부 등 각종 관계자들과 만나가며 몇 개월을 고생해 1시간짜리 추적 프로그램이 완성됐다.

‘그것이 알고 싶다’ 김선자 편이 방영된 것은 의미가 있었다. 취재 과정에서 김 씨가 범인이라고 판단했다면 방송이 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방송은 ‘사형수 김선자가 억울하다’는 심증적 반증이기도 했다.

억울함은 알려졌지만 풀리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잠깐이었고, 형이 확정된 사형수의 운명은 여전히 집행대기 상태 그대로였다. 고심 끝에 각별한 사이였던 배명인 前 법무부 장관을 만났다. 배 前 장관은 김 씨의 억울함에 대한 내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이후 대법관 출신 현직 법무부 장관과 식사자리를 마련한 배 前 장관은 김 씨와 방송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장관은 방송을 보고 조치를 취해달라는 배 前 장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역시 방송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김 씨 사건을 재조사하라는 장관 지시가 교정본부 측에 직접 내려졌다는 건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지방법원, 고등법원서 수십 번 재판을 거쳐 이미 대법원 사형 확정이 난 사람을 구제할 방법은 없었다. 억울한 사형수 김선자는 대전 교도소로 이감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방송 이후 김선자 사건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것으로 경검찰이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대전교도소로 수감된 이들은 김 씨를 비롯해 대중에게 잊혀졌다.

김 씨의 억울함을 풀 유일한 방법은 재심뿐이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사형수의 재심 신청은 즉시 기각된다. 사형수의 재심 허용은 전례 없는 일이다. 결국 김 씨는 사형 선고 8년이 지난 1997년 12월 말, 다른 22명의 사형수들과 함께 처형됐다. 사실상 우리나라 마지막 사형 집행이었다.

김 씨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매체들이 김선자를 악독한 사이코패스의 대명사로 끊임없이 이용한다. 텔레비전서 김 씨를 문득 마주할 때마다 영 마음이 편치 않다. 학교를 못 다닌 김 씨는 글을 몰랐다. 사형수 김선자는 그럴만 한 죄를 지은 것이 맞는가. 억울함에 울부짖지 않던 김 씨의 웃음은 잊으려고 해도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