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전 상서]14. 금령 박영보의 시첩
[초의 전 상서]14. 금령 박영보의 시첩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8.07.19 21: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승과 초의 존경심 시로 읊다
금령 박영보가 쓴 시첩. 〈몽하편병서〉 〈남다병서〉 〈초의입정(草衣入定)〉 3편의 시가 합첩됐다. 시에는 스승인 신위와 초의선사에 대한 존경심이 그대로 묻어난다.
금령 박영보가 쓴 시첩. 〈몽하편병서〉 〈남다병서〉 〈초의입정(草衣入定)〉 3편의 시가 합첩됐다. 시에는 스승인 신위와 초의선사에 대한 존경심이 그대로 묻어난다.

금령 박영보(1808~1872)는 박문수의 손자이다. 신위의 제자이며 한때 암행어사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가 초의를 처음 만난 것은 1830년경이다.

이산중이 얻은 초의차를 박영보에게 나누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초의의 명성을 알게 된다. 그가 초의차를 맛본 후 쓴 것이 〈남다병서〉이다. 신위는 이 시에 화답하여 〈남다시병서〉를 쓰기도 하였다.

이번에 소개할 글은 바로 박영보가 초의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첩으로 묶어 보낸 시첩이다. 이는 그가 초의와의 교유를 증표하기 위한 것인데 시첩크기는 21.5×13.5cm이며 1830년에 지은 〈몽하편병서〉와 〈남다병서〉, 1850년에 지은 〈초의입정〉 등 3편을 합첩한 것이다.

박문수 손자 박영보, 詩文 능해
초의차를 접하며 교류하기 시작
長詩로 스승 신위·초의 예경해
“도인과 선사 서로 알아봄이라”

‘몽하편병서’ 등 3편의 시 합첩
다산·추사 인맥들 확인 가능해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몽하편병서〉이다. 이 시를 짓게 된 내력은 서문에 자세한데 바로 초의가 일지암으로 거처를 옮긴 날 밤, 꿈속에 신위가 이곳을 찾아왔던 사실과 신위가 글씨를 썼다는 내용이 보인다.

따라서 이 시첩은 박영보가 자신의 스승인 신위와 초의의 교유의 깊이를 드러낸 자료일 뿐 아니라 다산가의 인맥과 추사의 인맥은 물론 홍현주 집안 형제들, 김조순 일가, 이만용 등으로 확대되었던 정황을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자료라 하겠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남다병서〉는 경화사족들의 차에 관한 관심이 촉발된 시기에 지은 시이다.

물론 조선 후기 차문화 중흥은 초의 혼자 힘으로 이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초의에 의해 차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자료인 것이다. 따라서 초의의 차에 대한 안목과 열정은 조선후기 차 문화가 중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셈이라 하겠다.

초의와 신위와의 깊은 교유를 확인할 수 있는 〈몽하편병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의 선사께서 두륜산 서쪽 가에 새 초가집을 짓고 거처를 옮기던 날 저녁, 꿈에 사람이 외치기를 자하도인(紫霞道人)이 오셨다고 하였다. 나가 보니 청사를 입은 수재인데 나이가 40여 살쯤 되어 보였다. 성씨를 물으니 웃으며 답하지 않더니 이름을 써서 보여 주었다. 조금 있더니 냉금지(중국 수입 종이로 금이나 은을 뿌려 장식한 종이)를 펴 행초로 초당의 편액을 소제(蕭齋)라고 지었다. 또 예서로 대내(對耐) 두 글자를 쓰시다가 내(耐)자의 촌(寸)변에 이르자, 초의에게 완성하기를 재촉하였지만 초의는 감히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마침내 다시 붓을 들어 쓰기를 마쳤고, 또 설백지(雪白紙)로 방산관(方山冠) 하나를 만들어 네 변에 담묵으로 산수를 그렸는데 이름을 문수관(文殊冠)이라 하였다. 이것을 초의에게 주셨으니 과연 무슨 상서로운 징조인가. 초의가 올해 한양에 왔다가 나를 보고 이와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였다. 천리나 되는 해남으로 자하도인을 불러 꿈속에 이르게 했으니 한갓 자하의 선열이 환몽한 것이 아니라면 초의 또한 기인이라 할 것인 저. 그를 위해 장구(長句)를 지어 기록하노라.

夢霞篇序
草衣禪師新結茅 頭輪西麓 移居之夕 夢人呼曰 紫霞道人來矣 卽見一靑衫秀才 年可四十許 問姓 笑不應 而書名示之 少頃展冷金箋 行草作堂扁曰 蕭齋 又隸書對耐二字 書至耐字寸邊 令草衣足成之 草衣辭不敢 遂復援毫畢書 且以雪色紙 製一方山冠 四邊畵淡墨山水者 名曰 文殊冠 以贈師 是果何祥也 草衣今年來京師 對余誦以夢如此 海南千里 能致紫霞入夢 非徒紫霞禪悅所幻 師亦異人哉 爲作長句紀之

꿈속에 만난 신위 모습을 마치 현실에서 본 것처럼 묘사된 〈몽하편〉의 서문은 초의가 신위를 얼마나 흠모했는지를 드러낸다. 초의의 꿈속에서 신위가 “설백지(雪白紙)로 방산관(方山冠) 하나를 만들어 네 변에 담묵으로 산수를 그렸는데 이름을 문수관(文殊冠)이라 하였다. 이것을 초의에게 주셨으니 과연 무슨 상서로운 징조인가”라고 하였는데 방산관은 바로 방사(方士)나 유랑객이 주로 썼던 모자를 말한다. 시·서·화 삼절이라 칭송된 신위가 그린 담묵의 산수는 얼마나 담담하고 선미를 드러낸 작품이었을까.

아무튼 박영보가 그려낸 신위의 풍모는 신선 같았고 초의 또한 수행력 깊은 승려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이다. 박영보가 그려낸 두 사람의 모습은 이렇다.

자하도인은 지금의 태백선인이며
초의는 호승국(胡僧國)의 현신이라.
시객은 세상에 거듭나서 한림으로 들어가고
초의선사는 일심으로 불공드리는 일 맡았네.
남해의 북쪽, 해남의 남쪽에
푸른 산 잇닿은 곳, (초의가)주석했네.
동백꽃 십리 길은 눈을 붉게 태우는데
천년의 산 가득한 안개, 검게 얼굴을 물들이네.
바루와 물병 하나가 일상의 삶이라.
흐르는 물과 구름처럼 떠돌며 산다네.
여산에서 홀연히 자담(子瞻)이 왔음을 알리니
환희로운 인천(人天)은 크게 생색이 나네.
사십 살의 서생, 벼슬살이가 애처로운데
미간은 훤칠하고 문장을 잘 하네.
하늘을 지나 땅 위에 내리시니
어렴풋이 명자(名字)를 기억했네.
글 잘 짓는 사람, 푸른 서강의 물을 다 마시고
주문(文)은 추운 모래자갈에서도 마모되지 않았네.
소슬한 절집을 소재라 지은 들, 무슨 해로움이 있으랴.
경계를 대함에 능히 인내하여 정력(定力)을 보이시길.
묘한 붓, 냉금전 종이에 구름처럼 떨어지니
먹 향은 치자 꽃향기를 뿜어내네.
방산관에 그린 그림, 미가(米)의 산수이고
옥설처럼 빛나는 종이로 깨끗하게 꾸몄네.
옛날엔 혹 진계상이 얻었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바로 서축에서 온 것이라.
하늘에서 꽃비 내리니 나비가 놀라 흩어지고
신묘한 이치 주합 됨은 바퀴를 돌리는 것 같네.
멀리 천리에서 초의 스님이 한양에 오시니
일시에 어르신들, 용산 곁에 모였네.
내가 와서 곁에서 문자의 인연을 증언하니
도인과 선사가 마침내 서로 알아봄이라.
 
紫霞道人今太白 草衣現身胡僧國 詞客再世入翰林 禪師一心供佛職 南海之北海南南 卓錫開山靑 茶花十里燒眼紅 嵐氣千年染面黑 一一鉢是生涯 流雲流水同栖息 廬山忽報子瞻來
歡喜人天大生色 四十書生慘綠衣 眉宇粹朗工翰墨 經天之下地之上 依記得名字畵
繡口吸盡西江靑 文沙石寒不 蕭寺何妨作蕭齋 對境能耐見定力 妙雲落冷金箋
墨海香花蔔 高冠方屋米家山 紙光玉雪明塗飾 古或得之陳季常 不然定亦來西竺
蝴蝶驚散雨花天 神理湊合如轉 千里錫漢陽來 一時杖龍山側 我來傍證文字緣
道人禪師竟相識  錦漁人 書奉草衣禪師經榻

제법 긴 장시로, 이는 박영보가 얼마나 시에 능했던 인물이었는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신위를 마치 여산에서 은일했던 자첨(子瞻)이 온 듯하다는 것인데 자첨은 바로 소식(蘇軾, 1037~ 1101)을 말한다. 아마 그는 스승 신위가 소식처럼 글 잘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림에 능했던 신위를 “묘한 붓, 냉금전 종이에 구름처럼 떨어지니/먹 향은 치자 꽃향기를 뿜어내네./방산관에 그린 그림, 미가(米)의 산수이고/옥설처럼 빛나는 종이로 깨끗하게 꾸몄네”라고 하였다. 바로 신위가 북송대의 미불(米,  1051~1107)처럼 그림을 잘 그렸다는 것이다.

미불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북송 태원 사람으로 자는 원장(元章)이고, 호는 남궁(南宮) 또는 해악외사(海岳外史), 녹문거사(鹿門居士)라 불렀다. 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던 그는 기행(奇行)을 일삼았으며 결벽증이 심했다고 전해진다. 수묵화뿐 아니라 문장과 시서(詩書)에 능했던 그는 소동파(蘇東坡)와 황정견(黃庭堅) 등과 친했다.

글씨를 잘 써 채양(蔡襄)과 소동파, 황정견 등과 함께 ‘송사대가(宋四大家)’로 칭송된다. 아름다운 강남의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 미점법(米點法)이라는 독자적인 점묘법을 창시했다. 그의 화풍은 오진(吳鎭), 황공망(黃公望), 예찬(倪瓚), 왕몽(王蒙) 등 원말 사대가에게 영향을 미쳤고, 명나라의 오파(吳派)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 시에서 박영보는 미불의 예술 세계, 즉 그림의 기량을 바로 조선의 신위가 방불한다는 것이다. 그가 마음에 품었던 스승에 대한 존경은 이 시를 통해 길이길이 남겨질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NS에서도 현대불교
뉴스를 받아보세요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