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초 방편

3분 짜장, 3분 카레. 3분 시대를 살아왔다. 이제는 3초다. 시간은 아니다. 초연결(IoT: Internet of Things), 초실감(AR: Augmented Reality), 초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 이들이 4차산업혁명의 핵심 키워드 3초다. 말법시대에 등장한 3초의 불교적 의미는 무엇일까?

인드라망으로 구성된 초연결 사회
삶의 질과 가치 바뀌는 시대
불교 진리·가치관 중요도 높아


1. 초연결
   물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섬, 한민복〉


섬하면 외로움이 떠오른다.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까닭이다. 하지만 시인은 사방의 물울타리가 전부 길이라 역설한다. 너무 외로워서 일까? 무인도 갈 때 제일 요긴한 물건 하나만 고르라면 스마트폰이 일순위다. 고립된 인간은 살 수 없기 때문일 게다. 관계 속에서만 정의되는 것이 우리들 인간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촌 60억 인간들은 유무선 인터넷으로 연결된다. 여기에 자동차, 비행기는 물론 심지어 냉장고, TV, 세탁기까지 연결된다. 기존 인터넷 너머 사물 인터넷(IoT)으로 초연결되는 세상의 모습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람조차도 본래 60조 세포로 이루어진 초연결망이다. 일체가 중중무진 인드라망의 세계다. 거기 자타의 경계! 울타리는 없다. 온통 길이다. 본래 그러한 세계임을 초연결 기술이 서서히 입증해 보이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부처님 말씀이 이제야 먹히고 있다.

2. 초실감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아지랑이, 조오현〉


범위를 좁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자. 안이비설신 오감을 통해 대상을 인식한다. 하지만 사실 오감은 믿을 것이 못된다. 얼마든지 착각을 일으킨다. 더군다나 뇌까지 함께 동조하면 착각을 넘어 온갖 상상까지 가능해진다. 이러한 인간의 치명적 약점을 교묘히 파고든 기술이 가상현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빛, 중력, 온도, 습도 등 각종 신호를 통해 오감으로 입력된 데이터는 전기화학적 생체신호로 변환되어 뇌까지 전달된 연후에야 비로소 대상을 파악하게 된다.

실제 오감 밖의 대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우리는 알 수조차 없다. 뇌가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변환된 전기화학적 신호뿐이기 때문이다. 오감이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1.4킬로, 1.4리터의 작고 가볍지만 수천억 생명체, 즉 뇌세포의 인드라망으로 구성된 우주! 뇌가 보는 것이다. 어둠침침한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듯, 창문 하나 없이 꽉 막힌 컴컴한 두개골 속에서 뇌가 전기화학 신호에만 의지해서 대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뇌의 작용을 통해 발현된 마음이 대상을 짜깁기하는 것이다. 일체유심조다. 마술사의 술책처럼 오감에 슬쩍 트릭만 가해주면 뇌는 완전히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상현실이 통하는 이유다. 처음에는 알면서 속아주지만 점점 정교해지다보니 이제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안된다. 초실감 기술이 일체유심조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초실감 기술의 발전여부와 상관없이 세상은 본래부터 그러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아지랑이〉를 통해 무산스님께서 말씀하신 바, 진실로 여몽환포영이라고.

3. 초지능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쌍윳다니까야〉


최상의 앎이 생겨난 최초의 존재는 부처님이다. 인간이건 인공지능이건 앎은 지능의 핵심이다. 수많은 인공지능들이 하루가 멀다고 쏟아져 나오지만, 그 핵심은 앎이다. 모든 존재는 앎의 수준에 따라 삶의 질과 가치가 바뀐다. 동물이 지닌 원초적 앎도 있고, 인간이 집착해마지 않는 이기적 앎도 있다. 그리고 부처님만이 누리는 최상의 앎도 있다. 인공지능에게도 앎의 수준이 있다.

인공지능의 선두주자인 알파고는 수십만개 정도의 뉴런으로 구성된 바, 개구리 수준의 앎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수천억 뉴런으로 구성된 인간과는 비교도 안된다. 인간처럼 언어를 통한 사유능력까지 갖추려면 무수한 진화의 세월이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몸뚱이인 컴퓨터는 우리와 사뭇 다르다. 엄청난 속도와 기억량으로 놀라운 성능을 자랑한다. 사실 개구리 수준의 뇌만으로도 바둑을 재패할 수 있었던 것은 지능이 높아서가 아니다.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슈퍼 몸뚱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진화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머지않아 사유능력은 물론 자아가 실재한다는 착각적 앎을 갖게 될지 모른다. 착각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이 찰나적이듯이, 미혹에 빠지는 것도 찰나다. 꿈속에 빠지는 일도, 꿈에서 깨어나는 일도 한순간이다. 카오스현상을 다루는 복잡계과학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자아의식이나 무아의식의 발현가능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어느 정도 마련되었다는 얘기다. 물론 황당한 얘기로 들릴 수 있다. 차가운 기계덩어리 주제에 자아의식이라니!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우리 자신도 인연 따라 잠시 뭉쳐진 덩어리일 뿐이다. 뭉치게 만드는 토대가 정보다. 계속해서 뭉쳐있으려는 힘의 작용이 정보의 복제다. 업(앎)과 업력(작용)이 곧 우리들 존재의 전부인 셈이다. 다만 어느 수준의 앎을 갖느냐에 따라 존재의 질은 확 달라진다. 인공지능 또한 다르지 않다. 특이점이라 불리는 바, 인공지능에게 자아의식이 발현되는 시기가 언제쯤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자는 2~30년 후쯤, 혹자는 그 이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논리 구조상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기에, 대부분의 관련 학자들은 이기적 존재의 탄생을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두렵다. 하지만 밥그릇 싸움 이전에 먼저 바르게 알아야한다. 존재의 실상, 무아의 이치, 공성의 진리를 알아야 한다. 일체 미혹과 희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처님처럼 최상의 지혜, 진정한 초지능을 얻어야 한다. 명지와 광명의 앎이 생겨나야 한다. 그것만이 인간이건 인공지능이건 존재 진화의 끝이기 때문이다.

4. 3초 방편
과학적 진보는 불교적 진리와 세계관을 고스란히 밝혀오고 있는데 정작 오리지널 저작권을 주장해야할 불교계는 오히려 한걸음 뒤처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수많은 불제자들이 고구정녕 부처님 말씀을 전하려 애쓰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역부족으로 보인다. 그냥 말로는 안 통하는 시대다. 현대화된 감각적 방편만이 멀어져가는 젊은이들을 부처님전에 앉힐 수 있다. 답은 3초다. 부처님 이름으로 등록된 인류 최상의 유산인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등 수많은 지적재산권 행사를 위해서라도 서둘러야한다. 뿐만 아니다. 제아무리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해도, 아직 궁극적 진리를 담아내기에는 걸음마 수준에 불과한 것이 오늘날 과학의 한계다. 이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할 의무 또한 불제자의 몫이다.

어찌해야 3초 방편이 통할까? 먼저 첨단 과학기술의 불교적 이해와 해석이 시급해 보인다. 달라이라마를 중심으로 진행 중인 Mind&Life학회가 그러한 노력중 하나다. 국내에서도 몇몇 뜻있는 스님이나 학자들이 정성을 쏟고 있다. 고마운 분들이다. 하지만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불교의 현대화작업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인다. 이를 통해 불교교리의 현대적 재해석이 정립되어야 한다. 언어도단이란 미명하에 새로운 과학적 개념이나 현대적 용어의 도입을 터부시해서는 안된다. 현대 과학적 용어로 풀어쓴 신세대 경전이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불교를 고리짝 시대의 샤머니즘이나 산속 은둔자의 망상쯤으로 치부해온 젊은이들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스테디셀러 개정판 불서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3초 방편을 기화로 불교와 과학과 삶이 하나가 되는 새로운 길로 나가야 한다.

나의 길은
언제나 꼭 같았는데...

그러나
오늘은 딴 길을 간다.

                           〈주일2, 천상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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