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 버리고 산다면, 모두 버린다면 신경 쓸 것이 없어

 

내가 그대로 가는 길, 내가 하고 가는 길에 그대로
일체 만법을 자유스럽게, 여여하게 씀씀이를 쓰고 가는 것이
그대로 불교며 바로 여러분의 선행입니다

여러분과 어저께 저녁에도 같이 앉아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도 이렇게 같이 앉아서 또 토론하게 됐습니다. 그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도 아니고 외국에 여러분이 오셔서 이만큼 살기까지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나 하는 생각을 하니 그렇고, 우리가 처음에 어디 가서 시작을 하면 무척 고생을 하고 그러는 걸 생각할 때, 또 어디를 처음에 가서 내 집이 없이 이틀이고 사흘이고 열흘이고 떠돌 때를 생각해 본다면 여러분이 처음 여기에 오셔서 얼마나 고생을 했나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는 반면에 여기에 계신 여러 한국분들하고 같이 앉아서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불교라고 하는 이 말 자체가, 불이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교라는 것은 말입니다, 고등 동물인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말씀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입니다.

그런데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결국은 불교죠. 생각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더 재미있는 것은 여러분의 생각입니다. 진리가 돌아가는 대로 여러분의 생각도 빨리 돌아간다면 좋겠는데, 지금 불교를 믿고 이렇게 다니는데 여러분이 죽어서 천당에 간다든가, 죽어서 승천한다든가 또는 그 죄업을 사하게 하기 위해서 다닌다든가, 우리가 죄를 짓고 나서 죄를 사하기 위해서 다닌다는 생각을 가질 때마다 여러분은 이미 진리에는 늦는 겁니다. 그 생각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저 사람 참, 구름 잡는 소리 한다.”라고 욕을 하겠지만 어저께도 얘기했듯이 이 찰나의 생활이라는 것이, 애들이 세대 차이라고 하듯이 생각 차이가 그만큼 아주 어렵습니다. 생각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기복이다 하면 벌써 타력으로 나가면서도 죄가 있으니까 죄를 사해야 하기 때문에 백팔 배를 해야 하고 정성을 들여야 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누가 죄를 벗겨 주고 씌워 주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시는 것을 누가 대신해 주거나 씌워 주거나 대신 벗겨 주거나 이런 것이 없습니다. 단지 여러분의 마음 따라 있습니다. 그대로 마음의 도리를 퍼뜩퍼뜩 재빠르게, 지혜롭게, 즉 말하자면 그것을 지금 애들은 계발이라는 말로 많이 쓰고 있는데, 말로는 할 수가 없는 이치가 거기에 붙어 돌아갑니다만 찰나에 돌아가는 이 자체를 우리는 용도에 따라서 잡아서 씁니다. 그런데 어느 절에 다녀도 여러분의 생각은 항상 죄를 덮어쓰고 죄를 덮어씌워 주고 그럽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되죠?

여러분이 과거에 어떠한 것을 짊어지고 지금 현생에 나왔기 때문에 과거도 없을 뿐 아니라 미래엔 가지 않았기 때문에 없고 지금 현재도 찰나이기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붙을 게 없죠. 그런데 우리가 여여하게 그대로 지금 걷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먹고서 이걸 해야겠다 하면 하는 거고, 내가 이것을 죄가 있어서 못한다 하는 생각은 하지 않으셔야 됩니다. 마음은 체가 없는 것이고 죄도 체가 없는 것입니다.

아까도 과거 아닙니까? 일 초 전도 과거죠. 일 초 전에 무슨 죄를 지으셨습니까? 지었다고 생각하면 지은 거고 안 지었다고 생각하면 안 지은 건데, 안 지었다는 생각도 말고 지었다는 생각도 마시라 이겁니다. 그러되 내가 그대로 가는 길, 내가 하고 가는 길에 그대로 일체 만법을 자유스럽게, 여여하게 씀씀이를 쓰고 가는 것이 그대로 불교며 바로 여러분의 선행입니다. 그럼 “악하게 해도 그것이 선행이냐?” 이렇게 하신다면 그건 어폐가 있는 말이겠죠. 그런데 악하게 하는 것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거고 선하게 나오는 것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말입니다.

어떤 스님이 이렇게 말을 했대요. 예전에는 스님네들이 밭도 파고 채소도 많이 심어 먹었습니다만 거름을 갖다 져다 주는데 “얘야, 가서 공양 좀 빨리들 해라.” “누가 오십니까?” 하니까 “오늘은 달 스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해도 아니 되고 인사를 안 해도 아니 되느니라.” 그러더랍니다. 만약에 지금 여러분이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옳다 그르다 이런 것을 놔 버린 채 그대로 맡겨 놓고 가신다면 아무리 악한 마음이라도 그대로 보살의 마음으로서 정립이 되면서 바꿔지면서 이렇게 진화가 되면서 여러분을 좋게 이끌어서 선행으로 끌고 갑니다. 이건 자동적이죠.

오신통 하면 거기 심성이 들어가죠, 심성! 지금 시쳇말로 심성이 들어가지 않고는 사람이 살 수도 없거니와 모든 일체가 심성이 없이는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 마음의 주인공에 모두 놓고 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길을 인도하는 이 이치가 바로 천문학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고,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천체물리학이기도 하고 모두가 과학적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했으면 반드시 거죽으로 나와서 움죽거립니다. 내가 애를 데리고 저기 가겠다 했으면 바로 그 자리에 가 섰습니다. 이것이, 생활이 과학 아닌가요? 그런데 과학도 물질이라면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심성이 들어가지 않고는 한계가 있죠.

근데 그 심성이 무엇인가. 지수화풍이 종합이 돼서 이것이, 즉 말하자면 광력이나 자력 전력 입력이, 통신력이 모두가 종합돼서 자료가 충만히 여러분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학을 배우지 않았어도, 예를 들어서 의사한테 30% 맡긴다면 70%를 여러분의 마음으로써 그것을 보강해야 하듯이 ‘채워야 한다’ 이런 문제도 있죠.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난 오늘 여러분이 안 오시면 안 오시는 대로 오시면 오시는 대로 그저 그렇습니다. 여러분한테 이익을 보자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에 여러분한테 이익을 보자고 여기를 왔다면 내 양심이 알고 있기 때문에 저 법계에서 다 알고 있는 것이요, 법계에서 알기 이전에 내가 내 양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배 속의 중생들이 다 알고 있겠죠. ‘요놈, 나쁜 놈!’ 그러고 우글우글우글해서 귀찮겠죠.

우리 저 법사님들도, 즉 말하자면 경, 학이나 선을 겸해서 여러분 앞에는 충분히 이익이, 공덕이 될 것이며 생활도 모두가 편안하시리라고 자부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실험으로 배웠으니까. 우리가 먹기 위해서 사느냐, 살기 위해서 먹느냐는 말도 있죠. 그렇듯이 이익을 바라면 얼마나 바라며 또 이익을 바라서 그것을 충당해 가지고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이 있는 것은 여러분이, 한국에서 사시는 분들은 그걸 모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자리를 잡기 전에 객지에 나가서 그렇게 돌아다닐 때에, 먹을 거나 입을 거나 그런 것도 생각지 못하면서 그 추운 데, 부산에서는 재첩국이라고 합니다만 돌로다가 그 조개를 깨뜨려서 빨아먹은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도 돈 가져오신 분들은 고생을 안 했겠지만 처음에 돈 안 가지고 여기 객지에 나오신 분들은 얼마만큼 고생을 해서 지금 밥이라도 자시고 계신지 그것 참, 그건 아마 본인들이나 아시지 누구도 모르실 테죠. 근데 전 그게 이해가 갑니다. 그것이 생각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지금 뛰면서 여여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 길밖에 없다는 겁니다. 생활하면서 이 생활을 그냥 참선으로 돌리는 공부입니다. 자기 빼놓고는 없는 겁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화두를 임의적으로 받아서 내가 ‘이 뭣고?’ 한다든가 시심마를 한다든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백지장 하나 사이입니다, 생각 차이가. 그건 좀 진실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얘들아, 오늘 달 스님이 오시니까 인사를 해도 아니 되고 인사를 아니 해도 아니 되느니라.” 하는 것은 화두를 주기 이전입니다. 화두를 줘서 의정을 내는 게 아닙니다. 이건 튕겨 주는 일이죠. 어떻게 대치를 해야 될까요? 또 백장 선사는 삽하고 괭이하고 가지고 밭을 파러 나갔는데 “야, 이놈들아! 밭을 파도 아니 되고 아니 파도 아니 되느니라.” 이랬거든. 어떻게 대치를 해야 되겠습니까? 여기에서 좋은 보배의 그 맛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난 것이 그대로 태초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났기 때문에 그것이 그대로 화두요, 그대로 생활이요, 그대로 생활 자체가 참선이며 바로 선행이며 그렇죠, 뭐.

제 말이 틀리다면 여러분이 질문해도 좋습니다. 여자고 남자고 노인이고 또 누구를 막론해 놓고 질문하시고 서로 토론하고 이렇게 하신다면 아마 더 좋으리라고 믿습니다. 제가 이 마음속에 지금 태산같이 ‘저 우주도, 저 어떤 혹성도, 저 월세계도 바로 네가 될 수 있고 네가 월세계가 될 수 있다.’ 이래도 듣지 않을 겁니다. 그 마음이 모두가 합일점으로 인해서, 복사체질로 인해서 모두가 분산되고 모아지고 할 때 우리가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마음이고 내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한 찰나에 그게 내가 될 수 있고 내가 그가 될 수 있고 이러니 얼마나 부처님 가르쳐 주신 그 뜻과 진리가 광대무변하고 묘하고 좋으냐 이겁니다.

또 어떤 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이것은 진실하게 자기 주인공을 믿고 진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리 얘기를 들어서 달달달달 외운다고 해도 이익이 없습니다. 그건 왜냐? 내 마음과 그 마음과 모든 일체 마음이 합일해서 돌아가질 않기 때문입니다, 인소야하고 야비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선 그걸 용납 안 하죠. 못났든지 잘났든지 진실하게 서로 한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폭넓은 지혜가 필요하죠. 그래서 위로는 지혜를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해서 천백억화신으로서 진화를 시키는 그런 작업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해야 되지 않나. 시대가 변해서 지금 물질세계로서는 얼마나 부딪쳐 돌아가고, 인구도 점점 증가되고 또는 물질도 또 부족 되는 수가 있죠. 뭐, 얘기할 건 없지만 앞으로 젊은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이 도리를 잘 안다면 조절하고 살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자유인이 되겠죠. 어떠한 물질이든지 한계가 있는 거니까.

그러나 똑같은 물건을 여러분이 사다 놓고 쓴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10년을 썼는데 단 2년을 못 쓰고 망가뜨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또 욕먹을까 봐, 저건 저 구름 잡는 소리 한다고 또 그럴까 봐요, 허허. 아니, 그런 생각들을 하실는지도 모르죠. 그렇기 때문에 그보다 더 지독한 소리가 있는데도 못하죠. 여러분이 아주 저 미쳤다고 할 정도로 이 세상의 모든 우주 천지가 우리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만 말하지 않으렵니다. 미친 사람이 될 테니까요. 그게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옛날에 네 마음부터 찾으라고, 마음부터 찾아야 한다고 하니까 “저놈 죽여라.” 그래서 죽였죠. 땅 위로 배가 다닌다니까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저놈 저, 구름 잡는 소리라고, 미친놈이라고 그랬죠. 또 지구가 돈다고 하니까 그 미친놈이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공중으로 배가 다니고 있고 지구는 물론이거니와 (탁자를 두드리시며) 이런 거 하나도 그냥 있질 않으니까 어떡하죠?

하여튼 불교가 목탁이나 치고 밥이나 내려 먹고 또 죄나 씌워 주고 죄나 씌워 받고 이러는 게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선 그것을 가르친 게 아닙니다. 세대가 앞으로 2세대, 3세대 영원히 나가도록 여러분은 바로 지혜로운 진리를 탐구해서 일체 만법의 모든 것을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만법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과학이 발달이 됐다 하더라도 빛으로다가 할 수 없는 일을 부처님께서는 한생각에 빛보다 더 빨리 하셨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이 아니어서 못한단 말은 하지 마세요. 인간이기 때문에 95%가 갖춰져 있습니다. 즉 5%만 뛰어넘으세요. 육체는 한계가 있지만 마음은 뛰어넘어도 뛰어넘은 사이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토론을 자꾸 해 나가다 보면 여러분에게 정말 내가 속에 있는 말을 할 수 있고,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 분들이 된다면 여러분은 땅을 치고 울어도 시원치 않고 하늘을 보고 껄껄껄껄 미친듯이 웃어도 시원치 않을 겁니다.

도라는 게 무엇인지, 인간이 살아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어디로 걷고 있는지, 그리고 또 어디서 왔는지, 지금 내가 뭣 때문에 이럭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그러면 젊은 분들은 가을이 돼서 낙엽 진 노인네들의 떨어진 낙엽을 밟고 가십니까? 자기는 그런 낙엽이 안 된다고 그러고 낙엽을 밟고 가십니까, 지금? 여러분은 이 뜻만 이루신다면 내 가정의 살림, 내 몸의 살림, 아니 국가적인, 사회적인, 우주적인 모든 살림들을 자기가 조절할 수 있고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아실 겁니다. “그러면 몸이 죽는 것인데….” 이러시지만 영원한 것입니다. 나무의 가랑잎이 떨어진다 해서 나무 죽는 법은 없으니까요. 본래 산다 죽는다 하는 게 없죠. 우리나라는 이렇게 불을 껐다 켰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니까 꺼졌다 켜졌다 이런 언어가 붙지만 항상 불이 들어와 있는 나라는 무슨 꺼진다 켜진다 이런 말 자체도 없습니다.

여러분 앞에 두서없이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사는 것도 두서없이 살게 되더군요. 여러분이 24시간 사시는 것도 두서없이 그저 사시고 계시더군요. 계획도 없더군요. 누구 만난다는 계획도 없이 문간에 나가다가 누구를 만나면 그냥 같이 가데요. 내가 저 문간에 나가다가 누굴 만나면 ‘내가 어딜 가야겠다’, ‘점심이라도, 술 한잔이라도 먹어야겠다’ 하고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문간에 나가다가 턱 만나서는 그냥 가서 술 한잔 먹습디다. 그리고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자식과 아내, 부모 형제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도 계획 없이 그대로 자동적으로 이렇게 바꿔지고 이렇게 사시고들 계시죠. 난 여러분한테 계획을 세워서 말할 줄 모릅니다. 그게 싫다면 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전 조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아픔은 제 아픔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자손들을 위해서, 가정에서 밥을 먹게 돼도 항상 감사하며 먹게 해 주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 부모가 그렇게 애를 쓰고 피땀을 흘려서 벌어다가 이렇게 밥을 먹게 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나게 해 주고 (합장을 하시며) 속으로 ‘아버지 엄마, 감사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애들, 조그만 애서부터 그런 걸 길러 주십시오. 감사할 줄 모르는 애들은 나가서 일을 저지를 뿐만 아니라 이 부처님의 진리와 모든 자비, 사랑을 모릅니다. 그러니 항상 이 뜻을 간단하게 “너의 주인공은 너를 끌고 다니고 너를 도와준다. 딴 사람은 너를 도와줄 수 없다. 아무리 엄마 아빠가 그렇게 너를 위하지만 네가 저기 바깥에 나갔을 때는 엄마 아빠가 너를 도와줄 수 없다. 그러니까 너를 돕고 다니는 거는 네 주인공밖에는, 너 자신의 주인공밖에는 네 몸뚱이를 보호해 줄 수가 없느니라.” 이렇게 일러 주세요, 무슨 일을 당하지 않도록. 그것이 나무로 친다면 뿌리를 도와주는 겁니다. 여러분이 가지를 아무리 붙들고, 잎새를 아무리 붙들고 싱싱하게 만든대도 그것은 아니 됩니다. 뿌리를 썩지 않게, 뿌리를 도와서 항상 싱싱하게 해 주면 바로 그 가지나 이파리가 얼마나 싱싱하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조금조금 실험을 해 보세요. 그러면 벌써 느낍니다. 여기 감응이 오고, ‘아하!’ 그러면서 체험이 됩니다.

여러분한테는 이러지만 스님네들이 공부하는 데는 “항상 책을 봐도 네가 보고, 일을 해도 네가 하고, 소제를 해도 네가 하고 일체 모든 거는 너한테서 들고 나는 거니까 그저 네 탓으로 돌리고 모든 것을 묵언하면서 이해하면서 모든 걸 이렇게 돌려서 살아라.” 하고선 이렇게 갑니다. 가다 보면 자기를 발견을 하고 그때서부터 둘이 아니게 이것도 돼 보고, 때로는 짐승도 돼 보고 사람도 돼 보고 애도 돼 보고 그저 말없이 그렇게 돼 봅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깨쳐 가지고 공부하는 시기입니다, 과정! 그것이 둘이 아닌 공부를 하는 겁니다. 모든 걸 항복받는 공부를 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전체 버렸다가 두 번째, 나를 깨달아 가지고 전체 다시 한번 자기가 돼 보는 겁니다. 자기가 어떠한 것을 조립을 했다면 스위치를 눌러 볼 때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다 겪고 나서 다시 한번 세 번째 죽어야 한다 하는 것은 서로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나툼, 아무거든지 된다 할지라도 물들지 않는 거, 어떠한 거든지 말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것을 다 알았을 때에, 우리가 천문학 박사라도 그것은 심성천문학이 아니라면 참, 반쪽짜리밖엔 안 되지 않느냐. 물질 가지고 물질을 볼 때는 참 어렵죠? 우리가 숫자로 따진다면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많잖아요? 그것도 어지럽게 백팔 배를 하고 무슨 염불을 하고 뭐, 그러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공부를 시대에 맞춰서 생활 속에서 하라 이렇게 얘기를 해 드리는 겁니다.

예전에 백팔 배를 하고 정성을 지극하게 들여야만 했던 그 시절에는 아낙네들이 밥해 먹고 애 기르고 그럴 때입니다. 그러나 지금같이 여자고 남자고 나가서 일을 해야 하고 시간에 쫓기고 이런 때는 그때대로 또 그대로 마음을 가지고서 참선을 행으로 그대로 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뭐, 구루마 끌어서 하루하루 먹는 사람은 부처님의 혜택도 없고 부처님 될 수도 없겠네요. 또 부처님 믿지도 못하겠네요, 여유가 없으니까. 부자들이 부처님 오신 날 이만한 등을 켜 놓고선 얼마를 냈다 하고 꼬리표를 주욱 해서 붙이곤 턱 걸어 놓은 등도 있고, 아주 가난한 어느 한 여인의 불은, 초도 살 돈이 없어서 풀숲에 혼자 기름불을 켜고 앉아 있는데 아무리 비바람이 쳐도 그 불은 꺼지지 않았어, 다른 건 다 꺼졌어도. 그것이 즉 내 마음의 인등입니다, 인등. 인등은 항상 여러분이 일 초, 아니 그것도 떠나지 않고 이 마음을 내는 것이 바로 인등입니다.

그런데 꼬리표를 해서 붙이고 전기를 달고선 ‘백 일 동안 기도를 드려 줘야 하니까.’ 하고 불을 켠다면 그게 도깨비장난이 아니고 뭡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면 모두 나를 욕하고 반박하고 그럴 사람들 많지만 욕을 해도 할 수 없는 거지 어떡합니까? 이 세상에 옳은 얘기를 하고 옳은 행을 하고 옳은 길을 인도할 때 아무리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는 거죠.

“파도 아니 되고 파지 않아도 아니 되느니라.” 할 때 어떻게 대치를 해야 되겠습니까? 생사를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세상을 다 초월해 가면서도 그래도 역력하게, 여여하게 그대로 목마르면 마실 수 있는 그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튕겨 주셨습니다. 그렇게 스스로서 ‘아하, 파도 아니 되고 파지 않아도 아니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의정을 내야 하는 것이 진짜 우리가 가져야 할 의정입니다. 인위적으로 누가 줘서, 부처님 당시에도 화두를 줘서 공부 가르친 예는 없습니다. 난 그 시절에 살아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부처님의 그 뜻, 한 걸음, 한 뜻, 한 말, 몸 하나 움죽거리는 거까지도 전 그것이 바로 법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중국으로부터 이렇게 돌아오면서 비구니는 뭐, 선지식이라는 말도 못하고 큰스님이라는 말을 못한다 이런 거,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얘기도 아니고…, 그러나 그렇다면 그런 대로 따라야죠, 뭐. 그거야 아, 좋은 대로, 편안한 대로 해 주는 건데 뭐, 어떻습니까? 또 더 크면 뭘 하고 작으면 뭘 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나 하나 버리고 산다면, 모두 버린다면 큰 것도 작은 것도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난 어떤 땐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에서 피가 흐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뭔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가긍하게, 여러분은 모르면서 ‘난 이렇게, 이렇게 급박하게 무엇을 잃고 무엇을 잃고 아주 외롭고….’ 이러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게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진 몰라도 내 가슴에서는 스스로 느낍니다. 느끼면서도 그것을 담담하게 거죽으로는 안 흘리려고 애를 쓰는데 어떤 때는 할 수 없이 흘리기도 합니다만, 그래서 별호가 뭔 줄 아십니까? 스님들 별호는 뭐, 그렇게는 붙이지 않습니다만, “스님은 항상 눈물을 잘 흘리셔.” 이럽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9년 6월 18일 뉴욕 한인회관 초청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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