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죄로 사형 언도…“報恩보다 자신 사상만 앞세워”
간첩죄로 사형 언도…“報恩보다 자신 사상만 앞세워”
  • 정리=김주일 기자
  • 승인 2018.06.22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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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재일교포 사형수 손유형

북한에 돈준 간첩죄로 사형수된 손유형
일본 국빈 방문 등 시대 상황 덕에 감형돼
사상이 다른 차이가 불러온 사형수 포교

 

재일교포인 사형수 손유형의 고향은 제주도였다. 당시만해도 제주도 사람들은 바다건너 가까운 일본에 가서 장사와 사업 등을 하느라 많이들 드나들곤 했다. 오늘 소개할 사형수 손유형도 일본으로 건너가 자수성가한 사업가 였다. 정확히 무슨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생각보다 많은 부를 축척했다.

그러던 그가 아마 조총련에 관심을 가진듯하다. 당시 일본서 한때 조총련으로 재일교포 출신들이 많이 몰려 들었다. 손유형도 당시의 시대상을 비껴가지 못하고 조총련에 가입 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그는 자주 북한을 오가며 심지어는 북쪽에 돈을 대주기도 한 모양이었다. 지금만해도 우리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하는 평화적인 분위기이지만, 5공화국 당시 그의 행동은 분명 국가보안법 위반인 중죄였던 것이다.

국가정보기관서 손유형의 행적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한국을 방문한 어느 날 정부 주요 요직에 있는 사람이 골프 초청을 했다. 그길로 그는 곧바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취조를 받고 간첩으로 몰렸다. 판결된 죄명이 간첩죄라 손유형은 사형을 언도 받았다. 김일성에게 돈을 갖다 바쳤다는 것이 중죄의 이유였다. 손유형은 사형 선고를 받자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라며 억울하다고 강경하게 발악을 했다.

사형수가 된 손유형을 내가 만난 것은 1981년 경 서울구치소에서 였다. 손유형에게는 독실한 불자였던 노모가 제주도에 계셨다. 하지만 아들의 비보를 듣고 불행하게도 노모는 자결을 했다. 손유형 하나 보며 그를 의지처로 삼고 살았던 금쪽같은 아들이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몰려 사형수가 되자 그 충격으로 목을 맨 것이다.

교화를 위해 손유형을 만나자 그는 나에게 이렇게 울부짖었다. “내가 설사 감형이 돼서 풀려난다해도 저는 절대로 한국에선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 이북에 돈 대준 사람이라 사상이 불순하다고 간첩을 만든 한국과 남북이 대치된 우리 조국의 분단 현실이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절대 저는 간첩이 아닙니다.”

누명을 썼다고 계속 주장하는 손유형은 그래도 운이 좋았다. 그가 사형수가 된 시기는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에 국빈 방문이 예정돼 있을 때였다. 방문 전 일본에 선심을 써야 좋은 상황이라 일본 국적의 사형수인 손유형을 살려주는 것도 일본에 생색을 낼 수 있는데 일조할 수 있다고 정부에선 판단하는 분위기 였다. 일단 나는 그를 면담하고 그가 억울하게 사형을 언도 받았다고 판단해 사법부에 감형해 달라는 간절한 탄원서를 올렸다.

그리고 몇 년 뒤 어느해 여름, 일이 있어서 일본 오사카를 방문 했다. 그때 나는 오사카서 잠시 상상을 했다. “내가 탄원서를 올린 손유형이 사면 받아 이 오사카에서 다시 만났다면 얼마나 반갑고 감격스러울까?” “오사카서 유명 사업가인 그가 내 탄원으로 인해 출소됐다면 이 더운 여름날, 내가 편안히 일을 볼 수 있게 배려해 주지 않았을까” 등등. 이런 생각을 하니 순간 마음이 가벼워짐과 동시에, 하루빨리 그가 감형 될 수 있도록 좀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일본을 다녀오고 얼마 안돼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손유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대구교도소로 이감됐다. 그후 전두환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1988년 11월 광주민주항쟁의 진실규명을 위한 5공 청문회를 피해 백담사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그 다음날 칩거하고 있는 전두환 대통령을 백담사로 찾아갔다. 전 대통령에게 손유형 사면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백담사 요사채 맨끝 두 평 남짓한 조그만 골방에서 전 대통령에게 내가 자신을 찾은 연유를 설명하자 그는 반갑게 나를 맞았다. 방에 앉아 상황 설명을 하자 자신은 사면 기억이 안나지만 그래도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스님, 저도 사람을 살려준 적이 있습니까?”라고 나에게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새벽 1시까지 자신이 독경중인 <금강경>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다음날 내가 백담사에 다녀온 것이 신문에 보도 됐다. 그것을 대구교도소에 수감중인 손유형이 본 모양이었다. 내가 그를 면회하기 위해 대구 교도소를 찾아가자 손유형은 나에게 대뜸 호된 질책을 했다. “왜 전두환을 만나고 왔습니까”라며 강경한 어조로 나무라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을 존경해서 만나러 간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당신을 살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만 전하러 갔다 왔는데 왜 그런 섭섭한 말을 합니까. 당신을 살려준 은혜를 대신 갚기 위해 먼길을 다녀온 것이에요”라며 나도 쏘아붙였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짐작은 갔지만 그래도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해서 나를 질책했다.

순간 내가 왜 이 사람을 위해 간절히 탄원 운동을 했을까하는 후회감이 짙게 밀려왔다. 그를 구명한 이유는 우선 첫째로 불자인 손유형의 어머니가 자결한 것이 너무 안됐고, 단지 돈이 많아 북쪽에 갖다준 것이지 그 사람의 사상이 불순하고 공산주의를 흠모해서 그런것이 아니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감형돼 대구교도소에 있으면서 그는 오히려 공산주의 사상에 물이 많이 들은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적개심에 불타 있었다. 그래서 보은의 도리를 모르고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면을 해준 이의 고마움 마저도 저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저지른 것이다.

“나는 그때 인간 손유형에게는 측은지심이 있었지만, 그가 신봉하는 공산주의에는 환멸을 느꼈다. 자기가 믿는 절대적 사상만 옳다고 고집하는 그를 보며 인간적 실망감이 컸다. 솔직히 사형수 포교를 하면서 느낀 첫 배신감이었다.”

이후 그와는 대화와 소통이 되질 않아 자연히 나와 인연이 끊겼다. 그 뒤로 몇 년에 한번씩 연하장을 보내줬지만, 그 뒤로는 소식이 없었다. 형기를 다 마친 그는 아마 지금 일본 오사카 어디서엔가 잘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여운은 아쉽다. 당시에는 나도 섭섭한 마음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지만, 지금은 그가 행복하게 잘 살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사형수 포교를 하면 반드시 보람있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끔 해준 포교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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