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외의 증도가로 중생 보듬은 ‘무애도인’

‘아득한 성자’로 2007년 정지용문학상을 받고 있는 무산 대종사. 대종사는 시조시인으로 한국 문단에 큰 업적을 남겼다.

조계종 제3교구본사 속초 신흥사 조실이자 조계종 원로의원인 설악당 무산 대종사가 5월 26일 오후 5시 11분경 원적에 들었다. 법랍 62년, 세수 87세.

무산 대종사는 격외의 증도가를 대중에게 내보인 선사였으며, 깊은 선취가 담긴 시조 문학으로 한국 시조 문단을 풍부하게 한 시인이었다. 또한 만해 스님의 선양과 이를 통한 다양한 포교로 중생을 제도한 부루나의 후예였다. 대종사는 생을 통해 대승불교의 진수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그대로 보였다.

193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무산 대종사는 성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57년 경남 밀양 성천사 인월 화상으로부터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1968년 범어사 석암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설악산문 재건한 설악의 宗師
무산 대종사는 출가 직후부터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수행을 거듭했다. 1960년부터 경남 밀양 금오산 토굴서 6년을 용맹정진했으며, 1989년 양양 낙산사에서 정진하면서 불조대의를 투득하게 된다. 무산 대종사는 오도 직후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千經 그 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는 오도송을 지었다. 1977년 제3교구본사 신흥사 주지를 거쳐 1992년 회주가 된 이후 무산 대종사는 설악산문 재건에 역량을 집중했다.

1998년 백담사에 무문관 ‘무금선원’을, 2000년에는 신흥사에 ‘향성선원’을, 2002년에는 백담사에 ‘조계종 기본선원’을 개원했다.

2011년 신흥사 조실로 추대되며 설악산문의 종사가 됐지만 무산 대종사는 설악선풍의 진작을 위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정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4년부터 백담사 무문관에 입실한 뒤 원적하기 전까지 4년동안 동·하안거를 폐관 정진했다. 이런 대종사의 노력은 2016년 ‘조계선풍시원도량설악산문’ 현판하며 산문 재건을 내외에 알리면서 결실을 맺었다.

이 같은 대종사의 선사적 풍모는 종단의 귀감이 돼 2014년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로 추대됐으며, 2015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피선돼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2005년 도의국사가 창건한 남설악 진전사 복원 낙성법회에서 무산 대종사(사진 가장 오른쪽)와 참여 대중이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있다.

시조로 선을 노래한 文人
무산 대종사는 시조 문학과 이를 통한 포교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대중이 익술한 ‘조오현’은 대종사의 속명이자 필명이다. 1968년 〈시조문학〉 시조부문에 등단한 무산 대종사는 〈심우도〉, 〈아득한 성자〉, 〈마음 하나〉, 〈절간 이야기〉, 〈적멸을 위하여〉 등 시집을 출간하며, 선과 현대 시가 조우하는 지점을 꾸준히 모색했다. 특히 〈심우도〉는 스님의 정신적 사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정제된 시어로 대기대용한 선불교의 가르침을 담아냈다.

해외에서도 무산 대종사의 시 세계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10년 미국 제인출판사에서 〈아득한 성자〉가, 2016년에는 시집 〈적멸을 위하여〉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번역·출판됐다. 2015년에는 미국 버클리 대학의 초청을 받아 ‘설악무산 그리고 영혼의 울림’을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대종사는 이러한 문학적 업적을 높이 인정받아 가람시조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을 수상했다.

만해 선양을 통한 포교
또한 무산 대종사는 만해 스님의 애민 정신과 생명·평화 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1996년 창립, 1997년 만해대상을 제정해 평화상·실천상·학술상·포교상·예술상 5가지 분야에 대한 시상을 시작했다.

만해 대상의 의미를 더한 것은 1999년부터 함께 시작한 ‘만해축전’이다. 1999년 8월 13~16일 백담사에서 열린 제1회 만해축전은 한국문학 심포지엄부터 ‘만해문학’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까지 다채롭게 열렸다.

또한 무산 대종사는 ‘만해마을’ 조성에 힘써 2003년 8월 완공시켰다. 만해마을은 문인들의 창작 공간이자 문학 포교의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2013년에는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운영한 만해마을을 동국대에 무상 증여했다.

당시 ‘무상 증여’를 결정한 무산 대종사는 “동국대의 전신인 명진학교 1기 졸업생인 만해 스님은 동국대를 상징할 수 있는 분으로, 불교정신을 건학이념으로 설립된 동국대가 스님의 정신을 잘 받들어 계승해주길 바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항상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 있었던 무산 대종사의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렸다. 고관대작부터 용대리 마을 주민까지 그 계층은 다양했다. 이들에게 대종사는 아낌없이 내주었다. 특히 용대리 마을에는 ‘무산 스님의 장학금을 안 받은 가구가 없다’고 할 정도로 상당한 규모의 장학금을 지급했고, 적잖은 수익이 보장되는 용대리-백담사간 셔틀버스 운행권도 마을에 넘겼다.

대방무외의 풍모를 우리에게 보여준 무산 대종사. 모든 것을 내어준 대종사는 ‘天方地軸 氣高萬丈/ 虛張聲勢로 살다보니/ 온 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이란 게송을 남긴 채 우리 곁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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