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비수관- 1) 자비수관 수행 단계

자비선 수행단계는 사념처의 몸(身)·느낌(受)·마음(心)·현상(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사념처는 사제(四諦)인 고(苦)-집(集)-멸(滅)-도(道)와 일치한다. 고는 수행의 출발이다. 삶과 죽음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길이 있지만 명상을 통해 생사가 없는 법을 얻고자한다면 최상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괴로움의 자각이 명상의 출발이 된다. 집은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이다. 즉, 탐진치이다. 탐진치는 마음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갈애를 제거하기 위하여 명상의 방향을 마음 안으로 돌려야 한다. 멸은 목적지이다. 생사가 없는 열반이다. 고통과 고통의 원인이 소멸했기 때문에 생사가 없는 것이다. 도는 멸에 이르기 위한 방법, 또는 수단을 말한다. 예를 들어 태권도의 도(道)는 주먹과 발을 쓰는 방법이란 뜻이고, 다도(茶道)하면 차를 음미하는 방법 또는 수단이라는 뜻이다. 도제의 도(道)도 같은 뜻이다. 이와 같이 고집멸도는 출발, 방향, 목적지, 도달하는 방법이 된다. 이에 대응하는 몸·느낌·마음·현상을 살펴보면 현상은 도제에 해당된다. 현상은 수용해야하는 마음의 작용과 버려야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버려야하는 마음의 작용은 오염된 심리이다. 오개(五蓋)가 그것이다. 마음을 덮어서 착한 법을 내지 못하게 하는 탐욕, 화냄, 혼침, 들뜸, 의심 등의 번뇌를 말한다.

자비선 수행단계 身受心法
괴로움 자각으로 명상 시작
갈애 없애 명상 방향 바꾸고
청정한 심리 바탕 지혜 갖춰

도제에 해당하는 현상 즉, 수용해야하는 마음의 작용은 청정한 심리이다. 팔정도, 칠각지 등이다. 팔정도, 칠각지 가운데 정념인 알아차림은 명상의 수단 중 핵심이다. 이 알아차림인 정념이 확립될 때 마음의 고요함인 선정과 지혜를 내고 균등하게 하는 것이 알아차림이다. 이 알아차림으로 몸·느낌·마음을 관찰하여 삼법인의 지혜를 얻어 열반을 체득하는 것이다. 자비수관도 사제와 사념처의 과정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자비수관은 수단이 정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자비손으로 감로수를 머리 위에 붓는 등 자비손 이미지를 관찰 수단으로 활용하는 관상법(觀想法)도 함께 사용한다. 자비심을 생기게 하는 것도 현상의 청정한 명상심리이다. 그래서 첫 단계로 고제(苦諦)에 해당되는 몸에 감로수를 사용하여 자비심이 일어나도록 하면 탐욕과 분노, 슬픔과 해치고자하는 마음이 줄어들고, 탐욕과 분노 등의 번뇌를 따라 일어나는 부정적인 심리들도 사라진다. 그리고 자비심이 증장하면서 몸의 현상을 무상으로 알아차리기가 쉬워진다. 이렇게 명상해 가면 몸의 형태도 사라진다. 몸 사라짐을 통해 몸은 환영과 같음을 체험하고 몸의 느낌(受)단계로 간다.

집제에 해당하는 몸의 느낌단계는 몸의 형태는 없지만 느낌은 남아 있다. 바닥에 닿아 있는 강한 자극의 엉덩이의 감각을 무상·고·무아로 알아차림 한다. 그리고 다른 부위의 감각도 알아차림 한다. 감각은 좋아하는 대상에서 느껴지는 낙수(樂受)와 거슬리는 대상에서 느껴지는 고수(苦受)와 좋아하는 것도 거슬리는 것도 아닌 덤덤한 대상으로 느껴지는 사수(捨受)가 있다. 즐거운 느낌과 싫은 느낌과 무덤덤한 느낌을 무상관찰하지 않으면 즐거운 느낌은 탐욕을 일으키고, 싫은 느낌은 분노를, 무덤덤한 느낌은 어리석음을 일으키며, 이 탐진치를 따라 수많은 번뇌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감각을 무상관찰하여 즐거운 느낌은 즐거운 느낌에서 끊어주고, 싫은 느낌은 싫은 느낌에서 끊어주고, 무덤덤한 느낌도 무덤덤한 느낌에서 끊어주는 것이다. 나아가 지나간 감각은 돌아오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미래의 감각은 오지 않아 없으며 현재의 감각도 머물지 않는다. 머물지 않는 것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이렇게 무상을 관찰해 가면 고와 무아를 아는 삼법인의 지혜가 생긴다. 특히 감각의 자취가 없는 곳에 초점을 맞추고 머물면 분별이 사라지고 마음은 빈 항아리같이 비어지기 시작한다. 마음의 공백이 지속되도록 익숙하게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각 알아차림을 놓치면 망념이 일어난다. 그때는 염기즉각(念起卽覺)하여 제거한다. 즉각의 각은 각파(覺破)의 뜻이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면 즉각 알아차려 제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이 무심(無心)공부다. 이렇게 수행해 가면 느낌단계에서 마음(心)의 단계로 넘어간다.

멸제(滅諦)에 해당되는 마음의 단계에서 무심의 텅 빈 것은 아직 공성이 아니다. 이제 무심의 텅 빔을 지켜보는 마음이 포착되면 그 마음이 명상의 대상이 된다. 명상의 대상인 마음은 생각이나 감정인 심소가 아니라 심왕인 마음이다. 마음에 집중하여 살펴보면 마음이 찰나 찰나 사라지면서도 유지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마음이 유(有)도 무(無)도 아닌 연속체임을 안다. 이때 마음을 과거 현재 미래로 관찰하고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임을 알고 그 불가득으로 들어가면 주객이 없고 중생과 부처가 평등한, 조작이 없는 마음의 본성을 깨칠 수 있다. 〈금강삼매경론〉에서는 근본이 없고 상(相)을 내는 종자가 없어 공하다고 한다. 그 자리는 열반이며 보리이며 원각이며 선가(禪家)에서는 이를 본래면목이라고 한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깨침의 과정을 거쳐 마음의 본성을 깨치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 이 텅 빈 공백에 집중하는 정념에 머물게 되면 주객이 하나가 되면서 오직 마음뿐 밖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마음조차 마음 스스로의 모습이 없으며 생각도 실재하지 않아 얻을 수 없는 것인 줄을 아는 마음이 된다. 이 상태가 익어지면 고요함인 선정에 들게 되며 공적하면서 신령스럽게 아는 앎만 있는 공적영지의 경계가 나타나거나 아니면 선정 속에서 몸과 마음의 경안이 생기고 사마타를 성취하며, 성취한 사마타(止)의 삼매를 의지하여 몸과 마음을 분석하는 위빠사나(觀)를 하는 지관쌍수한다. 그리고 위빠사나삼매가 일어나면 사마타삼매와 하나가 되면서 공삼매, 즉 일행삼매가 일어나며 이 삼매 속에서 무분별지혜가 일어나면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자비선도 사념처의 몸·느낌·마음·현상의 단계를 가지고, 자비선이라는 환으로써 몸·느낌·마음·현상이라는 환을 제거하고 삼법인과 열반을 성취하는 과정을 가지고 있다.


2) 선(禪)의 수행단계와 그 경계
앞서 본래면목에 이르는 수행단계로 제3구 의리선, 제2구 여래선, 제1구 조사선을 이야기했다. 조사의 언구를 통한 수행경계를 더 알고 싶은 독자의 요구가 있어서 선(禪)의 경계를 〈선문수경(禪文手鏡)〉에 근거하여 잠깐 설명하고자 한다. 선에는 의리선의 삼구(三句), 여래선의 삼현(三玄), 조사선의 삼요(三要)의 단계가 있다.

구(句)는 언어를 통하여 깨달음의 이치를 품고 있는 선(禪)을 지성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논의하는 것이다. 논의는 유구(有句)·무구(無句)·중구(中句)의 삼구가 있다. 이 구 속에는 현과 요가 있다.
현(玄)은 검다, 그윽하다, 고요하다, 오묘하다의 뜻이다. 즉, 주객이 하나 된 상태는 곧 고요하다. 그래서 주객이 하나 된 상태의 고요함 속에서 일어나는 오묘한 선적 체험을 뜻한다. 선을 지성적 이해나 개념적인 이해에 머물지 않고 보다 체험적으로 파악하는 체험의 경계이다. 즉 언어문자의 영역을 떠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계이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지 않고 개념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화두를 잡고 수행하는 상태이다.

현에도 체중현(體中玄), 용중현(用中玄), 현중현(玄中玄)의 경계가 있다. 그래서 현 속에서도 구와 요를 갖추고 있다.

요(要)는 요지(要旨), 요체이다. 요에도 대기원응(大機圓應), 대용직제(大用直截), 기용제시(機用齊施)의 세 가지 경계가 있다. 삼요 속에도 구와 현이 갖추어져 있다. 구 다음 현, 현 다음 요의 경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의 언구를 살펴보겠다. 제1구인 범소유상(凡所有相)은 상이 있음을 이야기하므로 의리선의 유구에 해당한다. 제2구인 개시허망(皆是虛妄)은 상 있음이 허망하여 없다는 것이므로 무구에 해당한다. 제3구인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 모든 상이 상이 아니라는 것은 유상과 무상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므로 중구에 해당한다. 제4구인 즉견여래(卽見如來)는 본분(本分) 1구에 해당하며 임제 3구중에서 제2구인 여래선의 경계라고 한다.

그러나 의리선의 삼구를 통해 본분 1구에 들어가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구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수행자가 개는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물으니 조주선사가 없다”고 한데서 무자화두(無字話頭)가 탄생했으며 이 무자를 참구한다고 하면 무자의 ‘무(無)’가 있음과 없음의 견해를 부정하는 중구에 해당한다. 이렇게 파악하는 것은 무자화두를 잡기 위한 방편이 된다. 즉, 무자의 기능이 모든 견해를 부정하는 살(殺)이 된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견해 등 번뇌 망상이 일어나면 이 무자로 제거한다. 이 무자가 말과 생각을 떠나게 하는 살인검(殺人刀)으로 어떠한 견해도 용납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불립문자의 경계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무자화두를 잡아 오로지 몸과 마음과 무자화두가 하나 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고 나아가 타성일편에서 고요해지는 화두삼매 속에서 공적영지(空寂靈知)가 나타나고 주객이 사라진 료료상지(了了常知)의 경계인 깨달음을 얻었다면 여래선의 경계가 되고 조사선의 경계가 된다.

이러한 무자화두의 타파로 여래선의 경계에 가 있다면 〈금강경〉 사구게의 경계는 달라진다. 즉, 범소유상(凡所有相)은 작용 속에 현이 있는 현(用中玄)이 된다. 개시허망(皆是虛妄)은 바탕 속에 있는 현(體中玄)이 된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은 현 속에 있는 현(玄中玄)이 된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무자화두가 타파되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살(殺) 속에서 긍정의 활(活)이 나타나는 조사선에 이르면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의 제1구는 두루 하게 걸림 없이 작용하는 대용(大用)의 경계이며, 제2구는 큰 기틀인 대기(大機)이며, 제3구은 큰 작용과 큰 기틀이 함께 쓰는 기용(機用)이며, 제4구는 향상하는 한 구멍인 향상일구(向上一竅)의 경계인 것이다. 큰 작용은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르는 수연(隨緣), 묘유(妙有)의 뜻이 있으며 큰 기틀은 생멸이 없고 증감이 없는 불변(不變), 진공(眞空)의 뜻이 있다. 이와 같이 선가(禪家)의 수행경계도 단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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