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는 공동체의 부를 창출한다

나쁜 놈도 돈을 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접하고 나는 안심했다. 행운이 있어야 재물을 모을 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안심했듯이 말이다. 불교의 경제관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만약 불교가 착하게 살고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번다라고 말했다면 좋은 말이긴 한데 현실과는 맞지 않구나 하고 시큰둥했을거다. 이런 식의 동화 같은 비현실적 주장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행운이 작용해야 돈을 벌고 나쁜 놈도 돈을 버는 현실을 직시하는 불교의 경제관이야말로 시장자본주의의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하에서 신음하는 현대인에게 의미 있는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기에 나쁜 짓을 한다.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아담 스미스의 주장에 근거해 자유시장경제의 장점에 관한 논리를 전개한다. 아담 스미스야 말로 자유시장경제의 멘토이며 자유시장경제의 기수이다. 아담 스미스는 시장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장 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이루어지므로 우리에게 이익이다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시장에 가능하면 개입하지 말고 기업과 소비자가 각자의 이기심에 의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다. 맞는 말이지만 아담 스미스는 더 중요한 말을 했다. 사실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을 자신의 저서 〈국부론〉에서 두 번 정도 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아담 스미스는 그보다 윤리를 더 강조했고 〈도덕감정론〉이라는 저서까지 냈으며 우리에게 유명해진 〈국부론〉보다 〈도덕감정론〉을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윤리없는 경제, 천민자본주의
사회공동의 이익 위한 근간
법과 윤리 확립에 불자 앞장서야

이기심이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엔진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기심보다 윤리가 더 중요하고 윤리의 제약 없는 이기심의 발동은 우리에게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아담 스미스에 의하면 자유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윤리가 가장 중요하다. 윤리가 없는 자유시장경제는 막스 베버가 경고한대로 천민자본주의로 전락한다.

자유시장경제를 위해 이기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리 만이 아니다. 인간의 이기심에 앞서서 자유시장경제를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리가 물건을 사고 팔 때 실제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사실상 모든 구두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나 다름 없다. 만약 법이 이러한 구두계약을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가게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살 때마다 문서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서를 공증하거나 보증금을 내야할지 모른다. 알고 보면 끔찍하다. 법의 뒷받침은 자유시장경제의 곳곳에서 필요한데 문제는 법이 모든 것을 다 규율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어떤 내용은 법으로 규율하기엔 부적절하기에 윤리에 의해 해결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법을 완벽하게 보완하고 법을 완성하는 것이 윤리이다. 자유시장경제를 위해서는 법도 필요하지만 윤리도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사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면 옳다는 견해를 갖는다. 예를 들면 공리주의자의 견해다. 불교의 윤리관은 어떤 견해일까? 경전에 불교의 윤리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정의되고 있지만 자유시장경제에 도움이 되는 정의는 〈잡아함경〉에 설해져 있다. 잡아함경에는 ‘만일 누가 나를 죽이려 하면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면 남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죽이겠는가?’고 쓰여 있다. 성경의 마태복음에도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쓰여있고 논어에도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있다. 불교, 유교, 기독교에서 공통적으로 선택하고 있는 이러한 윤리기준은 인류 보편적인 윤리규정이 될 수 있을까? 유엔이 전 세계에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윤리기준에 대해 고민한 끝에 전 세계의 유명한 윤리학자와 종교인들을 규합해서 첫번째 윤리기준을 만들었다. 첫 번째 윤리기준은 흔히 윤리에 관한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부르는 내용이다. 즉 ‘네가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이다. 윤리의 황금률은 불교, 유교, 기독교의 윤리관과 동일하다.

법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라는 내용을 담기엔 한계가 있다. 지나치게 넓고 구체성이 결여되며 너무나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윤리는 이처럼 법제화가 어려운 사회규범을 담고 있다. 우리가 동네 가게에 들려서 원하는 물건을 사고 배달해달라고 하면 가게는 당연히 배달해준다. 배달 안해줬다가 동네에서 장사하기 힘들다. 그러나 인터넷 상의 거래는 물건 배달 안하고 돈만 꿀꺽하는 경우가 많아 끊임없이 제도와 법으로 규제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따라서 윤리가 필요하며 윤리가 바로 선 나라가 자유시장경제가 더 활발하게 작동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보이스피싱 사례를 들으면 미국 사람들은 신기해한다. 미국에는 그런 일을 꿈꾸는 범죄가 없는데 우리나라에만 있는 범죄인 것이다. 유엔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사기범죄가 세계에서 제일 많이 발생하는 나라이다. 대한민국을 법과 윤리가 바로 선 나라를 만드는데 불자가 앞장 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후쿠야마의 베스트셀러 ‘신뢰(trust)’라는 책을 보면 신뢰가 결여된 사회로 한국을 들고 있다. 신뢰가 결여된 사회는 경제활동을 할 때 훨씬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아무리 옳은 윤리지침도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불교윤리를 불자가 지켜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안 지켜도 그만 아닌가? 법은 지키지 않으면 처벌 받지만 윤리는 남이 욕해도 눈 딱 감고 버티면 그만이다. 얼굴 뻔뻔한 사람이 많은 시장에서 윤리란 어쩌면 장식품에 불과할 수도 있다. 불교윤리는 업사상에 기초한다. 업사상을 부인한다면 불자가 아니다. 아무리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고 기도를 해도 업사상을 믿지 않는다면 불자라고 할 수 없다.

업사상에 따르면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그 과보가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윤리적 행위를 해야 할 이익이 있다. 미국의 조사에 의하면 착한 사람이 더 오래 산다고 한다. 비윤리적 행위를 해서 돈을 벌더라도 비윤리적 행위는 반드시 자기에게 해를 끼친다. 수명이 짧아진다고 하니 험한 세상에서 착하게 살면서 ‘이렇게 살면 손해 아닐까?’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만약 우리가 불교교리를 진실로 믿는 신자라면 윤리적 행위를 통해 자기에게도 이익이 되고 사회에도 이익이 되어야 한다. 21세기를 맞아 낡은 윤리가 우리를 아직도 불편하게 만들고 있으니 유엔처럼 세계화 시대에 맞는 보편 타당하고 현대화된 윤리기준을 제정해야 할 때이다. 가장 먼저 ‘내게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자’라는 윤리의 황금률부터 지켜보자. 이것만 지켜도 세상은 엄청 좋아진다.

성경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고 쓰여져 있다. 직업상 부자를 많이 상대하는 어떤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옳은 방법으로 돈 벌기 정말 어려워서 그런지 부자는 정말 지독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어’라고 말하지만 나는 ‘부자들은 다 이유가 있어’라고 말하고 싶다. 부자는 여러가지 면에서 보통 사람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부자는 머리가 좋고 판단력도 좋으며 노력형이고 냉정하고 집념이 강한데 알고 보면 이런 점은 모두 좋은 점이다. 나쁜 점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자가 많다는 점이다.

부자를 나쁘게 보자면 한이 없지만 불교는 부자라고 나쁘게 보고 가난하다고 좋게 보지는 않는다. 나는 부자의 부정적 측면을 보면서 인간은 누구나 탐욕이 있기에 저렇게 될 수 있지만 부자는 머리가 좋고 판단력도 좋으며 노력형이고 냉정하고 집념이 강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을 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도 행운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모두 탐욕에 빠져 있지만 부자는 능력, 노력, 행운이 있다보니 부자가 된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닐까? 불교는 부자라고 나쁘게 보고 가난하다고 좋게 보지 않는 종교다. 부자도 나쁜 행위를 하면 나쁘고 좋은 행위를 하면 좋으며 가난한 사람도 나쁜 행위를 하면 나쁘고 좋은 행위를 하면 좋다.

세계경제위기를 계기로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급기야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시위를 했다. 만약 월스트리트의 시위대에 포함되어 있는 가난한 사람이 지금은 돈이 없지만 나중에 부자가 되었다고 하자. 부자가 된 뒤에 가난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무언가 다른 부자가 된다면 몰라도 자기가 비판했던 부자와 똑 같은 사람이 된다면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우리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억지로 가난해질 필요도 없고 돈이 많다고 저절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돈 그자체가 아닌 우리가 어떤 마음과 행동을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증일아함경〉에서 ‘재물을 현재에 가지면 한량없는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설하셨다. 돈이 많은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자기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좋은 일 많이 할 수 있으니 복 받은거다. 재물이 나쁜게 아니라 재물을 나쁘게 쓰면 나쁘고 좋게 쓰면 좋다. 나쁘게 벌면 나쁘고 좋게 벌면 좋다. 부자라고 나쁘고 가난하다고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재물을 얻었으며 재물로 어떤 행위를 하는가에 달려 있다. 돈 그자체를 탓할 일이 아니라 돈에 관련된 마음과 행위가 문제다.

성경의 구절은 부자에 대해 적대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부자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고 계신다. 부자가 된 것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기에 축복을 받은 것이라는 구절이 경전에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만약 나쁜 짓을 하는 어떤 부자가 나는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기에 부자가 된 것이야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자가 되려면 능력, 노력, 행운이 따라야 하는데 현재 나쁜 짓을 하는 부자도 분명 능력, 노력, 행운에 의해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능력과 노력 없이 부자가 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물론 능력과 노력이 있어도 행운이 없어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 있지만 부자가 된 사람은 모두 능력과 노력이 있었던 사람이다.

어떤 사람의 능력, 노력, 행운은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 한국에서 태어난 것 등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전생의 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태어난 뒤에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떤 경험을 쌓았으며 대한민국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에도 달려 있기 때문에 현생에 지은 업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쁜 짓을 하는 부자는 능력, 노력, 행운 때문에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하는 나쁜 짓 때문에 앞으로는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지금 나쁜 짓으로 인해 그는 업의 과보를 받을 것이다. 사회가 혼탁하고 법과 윤리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나쁜 짓을 해도 돈을 번다. ‘삼성그룹 전체에 부정부패가 퍼져 있다.’는 이건희 회장의 말을 상기해보자. 대한민국을 올바로 세워 법과 윤리가 제대로 작동하면 나쁜 짓을 하면 돈을 벌지 못할 확률이 커진다. 사회가 혼탁하고 법과 윤리가 작동하지 않는 사회는 나쁜 공업이 쌓인 사회다. 따라서 불자에겐 선택이 있다. 바르게 돈을 벌 것인가 나쁜 방법으로 돈을 벌 것인가이다. 불자는 어떤 경우에도 바른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만약 나쁜 짓으로 돈을 벌었다면 그렇게 번 돈을 앞으로는 좋은 일에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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