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종하처래 (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부운자체본부실(浮雲自體本無實) 생사거래역여연 生死去來亦如然)

독유일물상독로(獨有一物常獨露) 담연불수어생사(湛然不隨於生死) 환회득담연저(還會得湛然這) 일물마(一物?)라 했다.

이 말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태어남은 어디서 왔으며 죽은 후에는 어디로 가는가? 태어남은 한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그 뜬 구름이 사라지는 것안데, 뜬구름 자체는 실체가 없는 무상한 것이요, 오가는 생사 역시 이와 같은 것이나, 그중 한 물건이 있어 항상 홀로 드러나 맑고 고요해 생사를 따르지 않도다"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한 물건이 무엇일까? 그것을 깨닫고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이 뭣고수행인 것이다.
 

금생에 그 번뇌 망상의 때를 이 뭣고로 깨끗이 씻어 내면
생사가 없는 본래 고향인 자성불 자리로 돌아오게 돼 있다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 기입삼도역사생(機入三道歷四生) 금일척제번뇌렴(今日洗滌煩惱染)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는 말을 한번 음미해 보자.

우리의 불성인 본심왕을 한 생각 무명으로 인해 등진뒤로 얼마나 많이 사생육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람쥐가 체바퀴 돌듯이 무의미하게 돌고 있는가? 금생에 그 번뇌 망상의 때를 이 뭣고로 깨끗이 씻어 내면, 생사가 없는 본래의 고향인 자성불 자리로 돌아오게 돼 있다.

악생어심환자괴형(惡生於心還自壞形) 여철생구반식기신(如鐵生垢反食其身)

본래 청정한 마음에 악이 생겨 도리어 제 몸 부수는 것이, 마치 쇠에서 녹이 생겨나 도리어 제 몸을 파고 들어 먹고 있는 것과 같다고 했고, 여사자신중충(如獅子身中蟲) 자식사자육(自食獅子肉)이라, 즉 광야의 무적(無敵) 사자도 싸워서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생긴 기생충에 의해서 죽게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다생겁래로 번뇌의 먹구름이 우리의 반야지혜 광명을 감싸놓고 내안의 자성불을 녹슬어 가게 하니, 이것을 제거 하는 것보다 무엇이 시급한 일대사(一大事)이겠는가?

그래서 이 뭣고이 그 만큼 더욱 절실하고 필요한 것이다.

법화경 신해품을 보면 어리석어 밖으로 나가 거지 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에게 장자인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 자기가 아버지라는 것을 믿게 하는데 50년이 걸렸다. 이렇게 밖으로만 찾아 해매는 중생의 무지 때문에, 주객이 전도돼 마왕인 파순이의 아들에게 육문성(안이비설신의)을 내주고 객인 마구니가 안방에 자리잡고 주인 행세하며 본래 심왕인 참나는 뒤 골방으로 쫓겨나 수천생 타향살이를 하는 것이 바로 중생이다.

우리 불자들도 경계에 끄달려 밖을 향하고 있는 마음을 이 뭣고로 공적영지(空寂靈智)한 본래 참성품으로 귀환시켜 꼭 육도 생사 굴레서 벗어나는 것만이 금생에 우리가 이루어야할 절대적 사명인 것이다.

한생각 일어나고 한생각 사라지는 것이 생사라 한다. 즉 길게는 호흡지간에 있고, 또한 한생각(찰나, 75분의 1)서 생멸한다. 욕심은 에너지를 밖으로 나오게 해 소모시키니 언제나 더 많은 것을 끝없이 채우려 밖의 살림살이에 매달려 평생을 보낸다. 이 마음 작용은 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지며 아무 것도 정해진 바 없이 변화 무쌍하다.

마음을 거두어 본공으로 돌아가면 생사가 이것이요, 이것이 생사가 없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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