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어시(生死於是) 시무생사(是無生死), 죽고 사는 것은 마음에서 나왔으니 시심마의 ()에는 생사가 없는 것이다. 가고 옴이 없는 생사가 일여(一如)한 본성(本性)에 주()함이 여래(如來)의 참모습이며 망상(妄想)을 벗어난 우리의 본래 자성(自性)자리 이다.

신심명에 보면 한 생각 일으키면 전부 망상(妄想)이고, 일심불생(一心不生)이면 만법무구(萬法無垢)요 무구무법(無垢無法)이면 불생불심(不生不心)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 생각도 난 바가 없으면 만법(萬法)에 허물이 없고, 마음이 오염서 벗어나면 법도 없고, 난 바가 없으면 마음 또한 없는 것이며, 만법을 대하되 자기 욕심을 내지 않음이니 탐심(貪心)과 진심(嗔心)을 떠났다는 것이다. 좋다 싫다는 마음이 없고, 너도 나도 없고, 없다는 생각까지도 다 떨어지고 없으면 그것이 바로 생사해탈(生死解脫)인 것이다.

연기의 이치를 이 뭣고로 관()해 깨달았을 때
생사고락 벗어난 진정한 열반의 경지에 들 수 있다

대주혜혜선사에게 스님은 공덕(功德)을 어떻게 드리십니까? 하고 묻자, 기래끽반(飢來喫飯) 곤래면(困來眠)이라고 답했다, 즉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잠잔자는 의미이다.

그거야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라고 재차 묻자 선사는 나는 밥 먹을 때 밥만 먹고 잠 잘 때는 잠만 자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은 밥 먹을 때 욕심(慾心)으로 먹고, 잠잘 때는 꿈() 속에서 온갖 생각을 일으킨다네라고 답했다. 그래서 자나 깨나 시시비비에 휩 쌓이고 생각이 분별심을 항상 따라 가는 것이 중생병(衆生病)인데, 한 생각이 날 때 바로 알아 차리고, 그 뿌리를 잘라 버리고 그 경계로부터 내 안의 자성(自性)자리로 되돌려 놓는 극약처방 약()이 바로 시심마이 뭣고인 것이다.

우리가 삶속에서 거짓 나인 가아(假我)를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평생을 보호하고 만족시키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 버리는 뜬구름 같은 허망한 환영(幻影)임을 깨닫는다면, 언제 꺼질지 모르는 풍전등화 같은 목숨을 뒤로 하고 헛된 그림자를 위하여 순간을 투자하며 헛되이 일생을 소비하지 않을 것이다.

현각 선사가 육조 스님을 찾아가 여쭈었다. “생사(生死)의 일이 크며, 무상(無常)은 신속합니다” “어째서 무생(無生)을 체득(體得)해 빠름이 없음을 요달(了達)하지 않는가?”

체득한 즉 생()이 없고, 요달한 즉 본래 빠름이 없습니다하니, 육조 스님이 옳고도 옳도다고 하셨다. 어떻게 체득하고 요달할 수 있겠는가?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떠오르는 허망한 한 생각을 시심마 이 뭣고로 그 뿌리를 짤라 다음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을 공()으로 만드는 것 뿐이다. 진여의 성품은 허공과 같아서 거기엔 생도 없고 사도 없으며 있음도 없음도 없고 동정간에 티끌만한 법도 붙을 수가 없는 시인 우리의 본고향이다. 내가 본래불(本來佛)이라는 것을 믿어라 하는 것은 그 시()자리는 본래 생사가 없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생사는 꿈속에 있는 것이지 꿈을 깬 진여실상(眞如實相)에는 없는 것이다. 그 꿈을 깨는 유일한 최신 무기가 또한 이 뭣고인 것이다.

죽음이란 존재(存在)를 형성한 조건 변화에 따라 화합(化合)되었다 흩어지는 것이니 본래 텅 빈 하늘에 뜬 구름이 스스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푸른 하늘 그 자체의 여여한 참성품은 나고 죽음을 따르지 않으며, 그 당처가 열반 적정인 참나(眞我)이며, ()라고 집착(執着)하는 육신이 조건 따라 잠시 일어난 뜬구름과 같음을 통찰(洞察)해 여실히 볼 때, 즉 연기(緣起)의 이치(理致)이 뭣고로 관()해 깨달았을 때 생사를 벗어난 열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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