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회 불사의 꽃, 법문 법회의 꽃

2017년 5월 봉축법요식에 운집, 종정 진제 스님의 법문을 경청하는 대중들. 법회 현대화는 보다 많은 이들을 사찰로 이끌 것이다.

 

왜 불자들은 사찰에 오는가. 불자들이 사찰에 오는 이유는 다양하다.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러 오기도 하고, 심신의 안정을 찾으러 오기도 하고, 수행을 하러 오기도 하고, 불교대학을 다니러 오기도 한다. 이 이외에도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이유로 사찰에 오는 불자들에게 줄 수 있는 궁극의 대답은 불법(佛法)이어야 한다. 안녕과 안정 그리고 수행과 교학에 대한 불교의 대답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찰의 가장 중요한 모임은 법회(法會)가 되어야 한다. 법회는 말 그대로 법을 설하고 듣는 자리이다. 불자가 불법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자 불자로서 생활을 점검하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중요한 신행활동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회에는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이 녹아있어야 한다. 삼귀의와 찬불가를 통하여 믿음[信]을 고양시켜야 하며, 법문을 통하여 불법의 이해[解]를 제고시켜야 하며, 사홍서원과 산회가를 통하여 불법을 실천[行]하고 그 불법이 사라지지 않도록[證]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법회는 그 자체가 불교신행의 순차적 과정이기에 종교적으로 경건하면서도 활기찬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법문 현장성, 부처님 가르침에 기반
편협한 자기주장의 반복 말아야
관념·비현실적 주제 법문 자제

불법을 믿고[信], 실천하고[行], 증득[證]하는 것은 모두 불법에 대한 이해[解]가 전제되어야 하다. 불자들에게 불법을 이해시키는 것이 바로 법문이다. 법회의 꽃은 법문(法問)인 것이다. 법문은 불법에 대해 설하고 묻고 답하는 행위이기에 법회의 으뜸인 것이다. 또한 사찰은 불제자들이 모인 공간이기에 사찰의 모든 일 중에서 법문 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인 것이다.

경건성과 생명력 있는 법회

법회는 경건성과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 종교적으로 엄숙하고 장엄하면서도 활기차야 하는 것이다. 법회가 엄숙하고 장엄한 종교적 의례 속에서 활기차게 불법을 접하는 시간이지만 어수선함 속에서 지루하고 따분한 요식 행위로 흐르고 있음도 사실이다. 법회가 보다 종교적이기 위해선 스님과 신도가 모두 법회를 생로병사의 고를 벗어날 수 있는 불법을 접하는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또한 법회가 경건하고 생명력이 있기 위해선 법문에 감동이 있어야 한다. 법문이 감동적이고 살아있다면 신도들이 지겨워할 수 없다. 어린아이에게는 모유가 최고인 것처럼 불자에게는 수승한 진리인 불법의 가르침이 최고의 양약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 가르침을 듣고서도 불자가 성숙되지 않고 사찰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설법자는 자신의 법문이 진정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법문은 현실적일 때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법문을 통하여, 현실의 고를 자각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고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들을 수 있을 때, 불자들은 감동하는 것이다. 그러했기에 부처님은 당장 중생의 고통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안 되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셨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들은 눈앞에서 볼 수 있으며, 눈앞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 때를 기다리지 않고 효과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능히 열반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 지자(智者)가 명쾌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 〈장아함경〉 권8, [부루나경] 권215 권2, p.54中.

〈율장대품(律藏大品)〉에 의하면, 부처님의 설법에 대해 제자들은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듯이’, ‘덮인 것을 깨끗이 걷어내듯이’, ‘방황하는 사람에게 길을 가리키며 보여주듯이’, ‘캄캄한 어둠에서 등불을 켜서 눈 있는 사람은 보라고 하듯이’ 법을 현시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행해지는 법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불타의 순수정법을 해명하지 못한 채 편협한 자기주장(自己主張)을 고집하거나, ‘심청정(心淸淨)’만 반복하는 관념의 유희에 빠져 있거나, 사람들의 일상에서 유리된 허황한 고담준론(高談峻論)의 경지를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100년 전에도 법회 혁신 목소리

이런 상황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닌 듯하다. 박한영의 1912년 〈불교강사와 정문금침(頂門金針)〉을 보면 백여 년 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요즈음 조선 불교계는 어느 곳을 막론하고 문명시류에 자극을 받은 탓인지, 예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포교소와 연구회가 곳곳에 들어서고 있음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가만히 그 정곡을 살펴보면, 대부분 순수한 진리와 갖춰야 할 덕성에 위배되는 바가 적지 않을뿐더러,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방향으로만 치닫기 일쑤여서, 정작 현재 세상의 형편이 어떠하며, 민중들의 생각은 어디쯤에 머물러 있고, 따라서 불교의 이치를 어떤 방면으로 탐구하고 전달시켜야 할 것인가에는 도무지 어둡기만 한 형편이다.

백 년 전이나 현재나 현실과 동떨어진 법문으로는 감동을 줄 수 없다. 실재적 인간인 불자들은 현실과 떨어진 이야기에 대해선 공감하는 바가 적을 수밖에 없다. 공감하지 못하면 감동도 없다.

종교인들은 흔히 현실 밖에 있는 추상적인 세계에 대해서 말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부처님은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에 관계된 법문을 거부하였다. 〈여시어경(如是語經)〉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아는 것, 보는 것에 대해서와 번뇌의 소멸에 대해서 말한다. 알려지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남녀노소가 다 겪어야 하는 현실 문제인 고의 해탈을 설하였다. 만일 불교에서 고의 가르침이 빠진다면 불교는 존립할 수 없다. 불교의 근본목적이 고의 해탈에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법문이 일체의 고를 설한 것이기에 현실성이 있었던 것이며, 오늘날의 법문 또한 그러해야 한다.

청법자 이해가 가장 중요

설법자가 현실적인 법문으로 감동을 주고자 한다면 우선 청법자를 이해하고 그의 상황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불교에서 법문의 전형으로 꼽히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의 전제이다. 법문에 앞서 설법자는 청법자의 연령과 직업, 그리고 지적 수준과 관심 사항 등의 제반 여건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같이 청법자의 근기에 맞추어 설하는 것이 곧 부처님이 설한 대기설법이다.

설법자가 청법자의 여건을 감안하지 하고 일방적인 법문을 하게 되면 현실성이 없게 되고 감동도 없게 된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신도들이 스님의 법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이야기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스님이 신도를 이해하지도 이해시키지도 못했다는 표현이 보다 더 실정에 부합한다.

그런데 설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문의 현장성과 감동성이 궁극적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장적인 감동을 줄 수 있는 여타의 강연과 불교의 법문을 가르는 차이점이다. 여타의 강연에도 삶에 대한 현장성과 감동성은 존재한다. 법문은 그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문제를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해결해줌으로써 감동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설법의 현장에서는, 사회 문제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법문이라고 설하거나, 경전상의 전거(典據)도 없이 회자되는 불교교리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설하기도 한다. 비록 이러한 것들이 감동을 주더라도 그것은 여법한 설법이라 할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에 여법한 설법은 현실과 불법에 통달한 법문이어야 한다. 현실에 통달함이란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정확히 이해해야 함을 말한다. 불법에 통달함이란 불법에 대하여 오류에 빠지지 않고 온전히 이해해야 함을 말한다. 즉 부처님 가르침에 여법한 설법은 현실의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불법에 기반을 둔 온전한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법한 설법의 궁극적 목적은 중생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이다. 설법은 고의 해결을 통하여 중생들이 이익되고 행복하고 안락해주도록 해주는 법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부처님께서 ‘제자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전하라. 또한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설하라. 사람들 중에는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라고 전법을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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