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의 부상 걱정한 절절함을 담다

대흥사 말사 대은암에 주석하고 있던 승려 유정이 1843년 12월 사형인 초의에게 보낸 편지. 초의가 제주에서 팔이 부러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를 걱정하는 절절함이 담겨 있다.

대은암 승려 유정(有正)이 초의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1843년 12월 9일에 일이다. 편지의 피봉에 ‘초암(草庵) 정수 대은암 소승 유정 상후서(草庵 淨水大隱庵 小僧 有正 上候書)’라고 쓴 것으로 보아, 대은암(大隱庵)은 정수사(淨水寺) 산내 암자라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이뿐 아니라 조선 후기 전라남도 일원의 사찰들이 대부분 대흥사의 말사였고 초의를 사주(師主), 즉 스승이라 칭한 점에서 유정은 대흥사 출신 승려로, 초의와 사제의 인연이 있었던 인물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혹 그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있을까 하여 대흥사 권속에 관한 자료 및 범해의 <동사열전>을 살펴보았으나 그 자료는 찾기란 불가능한 듯하였다. 추후 그에 대한 자료가 발굴되기를 기대해보면서 이 편지를 살펴본다.

유정의 편지는 그 크기는 대략 23.1×45.5cm 정도이다. 이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서간문체로, 초암 즉 초의에게 보낸 문안 편지이다. 이 편지의 겉봉투의 좌편에는 ‘휘진좌상 시연 개상(揮?座下 侍寅 開上)’이라 쓴 대목이 눈에 띤다. 바로 ‘스승의 자리에 먼지를 떨고 모시는 이가 편지를 열어 올리시오’라고 하였다. 옛날 편지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문투이다. 편지를 보내는 사람의 성의 어린 마음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편지의 피봉은 편지를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의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피봉에 드러난 정보는 이런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는 셈이다.

한편 그의 편지 내용 중에는 사주(초의)가 제주에서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애를 태우는 그의 심정을 서술해 두었다. 그러나 1843년 경 초의의 부상은 제주에서 말을 타다가 볼깃살이 헤지는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 속에 언급된 초의의 부상은 실제와는 다르게 경향에 회자되었던 정황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어는 시대이건 소문이란 실제와 다르게 퍼진다는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소문이 지닌 속성인 듯하다. 그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삼가 차수(叉手)하고 정예를 표합니다. 눈이 내려 나무엔 꽃이 핀듯하고, 얼음은 시내 다리를 만든 듯합니다. 삼가 문안을 드립니다. 스승께서는 어떠신지요. 살피지 못했습니다만 만복과 모든 상서로움이 깃드시길 빕니다. 땅에 엎드려 일생 한 마음으로 사모합니다. 소승은 겨우 객지를 떠도는 처지이지만 생각이나마 미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매번 일마다 뒤섞이고 또 지혜도 없어 이르는 것마다 짝할 이 없이 미친 행동을 하며 머물 곳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잘못된 것을 따른 책임을 면할 수 있으며 또 문중에서 버려져 더럽혀지고 막힘이 깨끗해지겠습니까. 스승(초의)께서는 제주도를 왕래하시는데, 항상 탈 없이 잘 왕래하시길 빌었습니다만 천만 뜻밖에도 팔을 다치는 고통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래도록 놀래고 염려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소식을 듣는 즉시 달려가서 배알하는 것이 예의에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가을부터 지금까지 한가한 날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길이 강으로 막혀 조금 멀고 눈보라가 쳐 교만한 태도에 부림을 받아 세월을 보내다가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민망함이 이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가까운 날에 달려 배알하길 계획하여 수일이 되기 전에 죄를 받겠습니다. 삼가 사주께서 인후하시길 빕니다. 새로운 많은 상서로움을 맞으시고 모든 복이 은근하시길.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삼가 아뢰니 상서를 살펴주십시오. 1843년 12월 초9일 소승 유정 삼가 올립니다.
 三叉手一頂禮 雪爲樹花 氷作溪樑 謹伏未審師主氣體仁厚 千祥萬福 伏地伏慕 一生一心之至 小僧 僅保客樣 伏想念及 是雖幸也 而每事雜之中 又無智所致 無伴狂行 住處不定 何免腹非之責 又棄於門下 滓沈白 師主瀛海之往來 常望無故善往來矣 千萬料外 得聞金臂之痛 不勝驚慮之至久矣 聞來卽時躬奔謁拜 於禮義當然也 而不然者 非但自秋至今不得閑日 亦爲路隔江而稍遠 風挾雪而驕態之所使 遷就至今 悶莫大焉 從近走謁伏計 罪待數日未前 伏祝師主仁候 ?新萬祥 千福鄭重焉 餘萬謹不備 伏白下鑑 上書 癸卯 十二月 初九 小僧 有 謹上書

이 편지에는 그가 대흥사 사중에서 잘못을 저질러 “어떻게 잘못된 것을 따른 책임을 면할 수 있으며 또 문중에서 버려져 더럽혀지고 막힘이 깨끗해지겠습니까”라고 한 대목이 눈에 띤다. 그가 객지를 떠도는 객승의 처지가 여기에서 연유된 듯하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주(초의)에 대한 성의는 변함이 없어 늘 사주가 편안하게 수행하길 소원했던 그였다.

또 다른 정보는 초의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1843년 12월 9일에 쓴 것이라는 점인데 이는 초의가 제주도를 찾아간 시기를 밝힐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초의가 제주도를 방문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이를 밝힐 문헌적 자료는 제법 풍부하게 남아 있으니 초의의 <일지암시고>와 <완당전집>, 추사 김정희의 편지 등이 그것이다. 특히 <일지암시고>에 초의가 1843년 여름, 제주목사 이원조가 그의 시를 구하기에 지었던 ‘제주목사 이공이 시를 구하기에 마침내 망경루를 차운하다(濟牧李公索詩遂次望京樓韻)’이 있다.

이보다 더 구체적인 정보는 추사의 <완당전집> ‘여초의’18신이라 하겠다. 이 편지에는 초의가 제주에서 말을 타다가 부상을 당했던 고충을 피력했지만 편지를 쓴 날짜를 기록하지 않아 그 시기를 밝히는데 아쉬움이 많았던 자료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얼마 전 발굴된 <벽해타운첩>이다. 벽해는 제주를 말한다. 초의가 제주시절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1786~1856)가 보낸 편지를 묶어 <벽해타운첩>이라 명명한 것인데 이 첩이 한 옥션 경매에 출품된 바가 있다. 이를 확인해 보니 바로 <벽해타운첩>에 수록된 추사의 편지는 <완당전집> ‘여초의’18신과 같은 편지였음이 확인되었고, 이 편지는 1843년 7월 2일에 쓴 것임도 밝혀진 셈이다. 자료 발굴의 중요성이 다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초의가 말을 타다가 부상을 입은 시기는 1843년 음력 7월2일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 것이다. 아울러 그가 제주를 찾아간 시기도 1843년 3~4월경(음력)으로 추측할 수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그럼 1843년 7월2일에 보낸 추사의 편지에는 초의의 부상을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까.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말안장에 볼깃살이 벗겨져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고 하니 가여움이 절절합니다. 크게 다치시지는 않으셨는지요. 내 말을 듣지 않고 경거망동을 하셨으니 어찌 함부로 행동한 것에 대한 업보가 없겠습니까. 사슴 가죽을 아주 얇게 떠서 (이것을) 상처의 크기에 따라 잘라 밥풀을 짓이겨 붙이면 좋아질 것입니다. 이는 중의 살가죽이 어떻게 사슴 가죽과 같겠는가. 사슴 가죽을 붙인 후에는 곧바로 일어나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찌는 더위가 괴로울 뿐입니다. 겨우 적습니다. 그럼. 1843년 윤7월2일 다문
卽聞不勝鞍馬致有?肉損脫之苦 奉念切切 能不大損耶 不聽此言 妄動妄作 安得無妄報也 以鹿皮薄薄片 量其傷處大小裁出 以米飯糊緊粘則爲好 此僧皮何如鹿皮者也 皮粘後 卽爲起身還來至可至可 此狀一味苦熱而已 艱草不宣 癸卯閏七月二日 茶門

추사는 “(초의가)말안장에 볼깃살이 벗겨져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고 하니 가여움이 절절합니다”라 하였다. 바로 초의는 제주에서 말을 타다가 볼깃살이 헤지는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배지의 척박한 환경에 처해 있던 추사로서는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해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초의 부상 소식을 제주 목사 이원조를 통해 듣고 이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추사가 초의에게 알려준 좋은 치료법은 “사슴 가죽을 아주 얇게 떠서 (이것을) 상처의 크기에 따라 잘라 밥풀을 짓이겨 붙이면 좋아질 것입니다.”라는 처방이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추사는 “중의 살가죽이 어떻게 사슴 가죽과 같겠는가. 사슴 가죽을 붙인 후에는 곧바로 일어나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대목이 눈에 띤다. 오랜 벗이 나눌 수 있는 해학적 요소는 추사의 해학적 일면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해학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순리를 아는 자의 여유에서 나온 성찰일 것이다.

아무튼 초의의 부상 소식은 바람처럼 퍼져 나갔다. 유정이 말한 것처럼 팔이 부러졌다는 소문도 그 중 하나이다. 다른 한편으로 초의와 교유하던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초의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당시 초의와 교유했던 사람들은 우려와 함께 퍼져 나갔던 풍문이 얼마나 장황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유정의 편지는 실제와 다르게 퍼져 나간 초의 부상 소식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편지인 셈이다.

한편 초의는 제주를 가기 전에 자신의 고향 신기마을을 찾았다. 그 때가 1843년이다. 당시 그는 ‘고향에 돌아가(歸故鄕)’를 짓는다. 출가승이었던 그가 40여 년 만에 고향을 찾은 것이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의 고향, 신기마을 집터를 바라보던 초의의 회한은 “아득히 고향을 떠난 지 40년 만에/ 머리가 하얗게 센 줄도 모른 채 돌아왔네/ 신기의 집터엔 풀이 우거져 옛 집이 어딘지/ 이끼로 덮인 옛 무덤, 걸음마다 수심이 인다”라고 읊었다.

초의는 아마 자신의 고향에서 무상과 공(空)의 이치를 피부로 느꼈을 터이다. 하지만 초의는 출가승이었다. 세속의 정에 단호했던 수행자의 풍모는 ‘고향에 돌아가(歸故鄕)’ 말미에 “외로운 사람 다시 구름 따라 떠나려 하니/ 아! 고향 찾음이 부끄럽구나”라고 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고향을 돌아 본 후 제주로 떠났던 초의는 목숨을 건 항해를 시작한 셈이다. 이들의 해후의 기쁨은 추사의 편지에 그 잔영이 스며있다. 1843년 9월 경에 보낸 추사의 또 다른 편지에는 뭍으로 돌아가는 초의를 위해 순조로운 바람, 뱃길도 여의하길 비는 내용이 보인다. 이들의 아름다운 우정은 이처럼 성의를 다하는 관계였다.

초의에게 걸명(乞茗)을 청한 추사의 차 애호는 이미 잘 알려진 것이거니와 유정의 편지 또한 1843년경 제주에서 한철을 보낸 초의의 일상이 단편적으로 유정의 편지에서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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