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모르면 경쟁이고, 넘어서면 계발입니다!

항상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앉아서 토론하고 음미하고, 마음 도리를 연구하는 데에 몰두하는 도반으로서 만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중반기에 들어섰다고 봅니다. 우리 개별적인 의의는 낳을 수 있을지언정 포괄적인 의의는 낳지 못했다고 생각하면서, 중반기에 들어서서 세계와 더불어, 우주와 더불어 같이 포괄적인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대인이 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일이 드물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전체가 다 그렇게 대인이 되었으면 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조금도 쉬지 않고 이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에는 우리가 전체적으로는 연구할 단계가 못 돼서 개별적으로 연구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과학이라는 것도 어느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으니, 어디로 빠져나갈 구멍과 어디로 돌아서 회전을 해서 나올 수 있는 길을 찾는 연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근본 마음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심성의 활용이 있듯이, 절대적으로 마음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여금, 과학적인 문제도 광대무변하게 이끌어 갈 수 있고, 포괄적인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린 광대무변한 마음이 되기 때문에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는 이 진리가 툭 터져서 지구 바깥으로도 나갈 수 있고 우주 전체를 보는 것 없이 보고, 듣는 것 없이 들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제가끔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생각해야 됩니다.

한생각이 자기를 부유하게 할 수도 있고,
한생각이 자기에게 막대한 지장을 가져오게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마음 한생각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제는 기복적인 신앙을 절대적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점을 깊이 생각해 봐야 되는 시대가 됐다고 봅니다. 지금 외국의 강대국에서 또는 약소국에서도 그런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그건 뭐냐 하면은 우리가 과학적으로 이렇게 발전이 됐지만 한계가 있다. 어디로 인해서 이렇게 빠져야 되느냐? 유전과 무전, 즉 말하자면 유(有)와 무(無), 유개체와 무개체, 무생(無生)과 유생(有生), 이 모두가 어떻게 해야 회전을 할 수 있으며, 광대무변한 연구를 할 수 있겠느냐는 문젭니다.

그런 데에 도달해 있느니만큼,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탐지기나 컴퓨터 등 다섯 가지 문제를 이야기했고, 여섯 가지 중에 책정기가 누진통이라고 했죠. 그것은 이름으로써 얘기했을 뿐인데 활용하고 빛을 내고 여여하게 회전할 수 있는 문제를 가지고, 예전에 뭐라고 이름을 지었느냐 하면은 화광주니 야광주니 하는 구슬로 말했습니다. 걸림 없이 굴리는 데에 아주 여여하다는 뜻으로서의 빛광주 또는 원광주, 해광주를 금강주에서 다룬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섯 가지를 책정기, 즉 누진통이 그렇게 다룬다는 것만 얘기했지, 금강주라는 것은 그 다섯 가지 구슬을 굴릴 줄 알아야 된다고 하는 활용입니다, 활용! 활용을 하는 데는 그 구슬을 얻지 못하고는 아니 된다. 그래서 용(龍)이 줄을 타고 오를 때에 구슬이 없으면 오르지 못한다 이겁니다.

인간도 무의 법, 유의 법을 회전하는데 법망에 걸리지 않고 걸림이 없을 때에 비로소 다섯 가지 구슬을 얻을 수 있는데, 가지고 있어야만 되는 게 아니라 그거를 굴릴 줄도 알아야 되는데 이름해서 금강주입니다. 이것을 대충 그냥 이렇게 얘기합니다마는, 나는 무슨 책을 봐서 이런 얘길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냥 얘기하는 겁니다, 그냥. 허허허. 그러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금강주 하면은 이름해서 육바라밀에 속합니다. 보살행으로서 들어가는 활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은 거기에서 또 ‘금강주에서 그렇게 굴릴 줄 알고 여여하고 걸림이 없다면 삼라만상 대천세계에 칠보가 가득 차 있다’ 이런 건, 여러분이 주인공의 뜻을 알아서 굴릴 수 있다면 바로 칠보라는 것입니다. 칠보! 전체가 둘이 아닌 칠보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모습 없는 모습들, 생명체가 전부 움죽거리고 있는 자체는 바로 진화력도 되지만 생존의 경쟁도 되고 생존의 부활도 되고 생존의 개발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고 음미해 본다면은 아주 묘한 도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지금 시공이 없이 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미약한 생각 또는 미신의 생각으로서 아주 차원이 낮은 그런 행만 해서야 되겠느냐 하는 겁니다. ‘한생각이 얼마나 무서운데 아주 얕은 생각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어야만 하나!’ 이런 겁니다. 칠보가 가득 차 있으면은 거기에서 다 지혜가 나올 텐데 말입니다. 요거는 내 의견으로 그냥 얘기하는 거니까 잘 파악해서 들으시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를 잘하려면은,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떼어 놓은 거는 없어지고 한 발이 또 되듯이, 우리가 지금 칠보 하면은 벌써 육바라밀은 칠보가 집어먹은 겁니다. 알겠습니까? 포함해서 있으니까. 포괄적인 칠보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여여하고 보배로운 자가발전소에서, 물론 가설이 그대로 돼 있는 겁니다. 그러니깐 자가발전소는 본래 내 안에 있으니까, 스위치만 누르면은 불이 들어오게끔 돼 있는 게 아니라 본래 들어오게 돼 있는데 모르니깐 그걸 발견을 못해서 쓰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간혹,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요렇게 아주 쉴 사이 없이 다가오는 그 나툼을 우리가 작게 생각을 하면 나툼이라고도 하고 윤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투어서 역력하게 돌아가는데 우리가 그것을 음미해 볼 수 있는 문제는, 바로 그것이 그 안에 들어서 무수히 돌아가고 있으니, 이 돌아가고 있는 나툼을, 무(無)와 유(有)를 한데 가르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무 사유(四無四有)를 한데 합치면 팔(八)입니다. 시방세계에 무와 유를 한데 합치니까 팔이 된다. 팔이 되니까 이게 여여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칠보가 거기 또 팔에 포함된 겁니다. 팔정도(八正道)에 포함이 된 겁니다, 수레바퀴 돌아가듯이. 그걸 표현해 놓은 겁니다, 팔정도라는 것이.

그렇게 해서 그것이 팔정도로 돌아가는 데에는 언제나 포함해서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 게 이 심성입니다. 그래서 그 심성을 포함해서 구정토(九淨土), 즉 말하자면 구경계(究竟界), 구경계로 하여금 시방세계에 두루 회전이 될 때 불이(不二), 불이법(不二法)이 거기에서 조성됨으로써 십이인연법을 넘어선 단계로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 이렇게 하기보다도 여러분이 연구를 해 보면은, 말은 조금 다를지언정 뜻은 똑같습니다.

내가 아까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판도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사람 사는 이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겁니다. 변천해 가고 있는 겁니다. 우린 계발이 되고 있는 겁니다. 우린 사람이 살 양으로만, 먹고살려고만 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섭리로써 우린 계발이 되고 있는 겁니다. 경쟁이 아니라 계발입니다.

지난번에 경쟁이라고 그랬죠? 여러분이 모르면 경쟁이고, 넘어서면 계발입니다. 우리는 남을 죽이려고 해서 죽이는 것도 아니고, 밀치려고 해서 밀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힘이 부족하면 스스로 밀리는 거죠. 누가 나쁘게 만들려고 그래서 만드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스스로 환경에 따라서 나빠지는 거죠. 그러니 본래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 이 소립니다. 환경에 따라서 나빠질 수도 있고 좋아질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생각이 자기를 부유하게 할 수도 있고, 한생각이 자기에게 막대한 지장을 가져오게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마음 한생각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조 시대 어느 때라고 봅니다. 이조 시대 때 스님네들이 탄압을 받고 그러니까는 삿갓을 쓰고 결국은 머리를 기르고선, 어느 산골에다 토굴을 파고 도반들과 거지처럼 얻어먹어 가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하고들 있는데, 항상 탁발을 하러 나가면서도, 한 고비를 넘기고 산을 넘고 이러다 보면은…, 이걸 잘 음미하셔야 됩니다. 과학적으로도 지금 연구할 수 있는 문제가 바로 그런 데 있는 겁니다.

산을 넘고 가다 보면은 아주 깊은 웅덩이가 있어서 사람도 빠져서 나오지 못하고 뱀도 그 웅덩이에 빠지기만 하면 나오지 못해, 캄캄한 암흑 같은 곳이니까. 그래 가는 데마다 발을 옮겨 놓는 대로 살려 달라고 아우성이에요. 가다가 또 건져 주고 “얘야! 너희들을 건져 주면 나중에 또 나를 못살게 굴지는 않겠는가?” “절대…. 생명의 은인이신데, 날 건져 줬는데 어떻게 해하리까?” 그래서 건져 주고 건져 주고…. 그런데 다 건져 주고 나니까 전부 자기의 부하가 된 겁니다. 사람도 마지막에 건져 주고, 사자도 건지고, 호랑이도 건지고, 뱀도 건지고 원숭이도 건지고, 다 건진다 말이야. 그렇게 건지다 보니깐 전부 자기 군사가 된 겁니다.

그런데 구덩이에 사람이 있는데 구덩이에서 아우성을 치는 걸 건지려고 하니까 뱀이 있다 하는 소리가, 사자도 하는 소리가 뭐냐 하면 “머리 검은 짐승은 도대체 남의 은공을 몰라. 그러니 저렇게 빠질 때는 다 어떠한 죄상으로 빠진 거다.” 이러는 거야. “우리도 그렇지마는 사람은 나오기만 하면 꼭 당신에게 해를 줄 겁니다.” 이러거든. “그렇지만 아우성을 치고 그러는데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는가, 인간으로서.” 하면서 하는 말이 “언제 적의 죄로서 나를 해할까 봐 무서워서 건져 주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느냐? 만약에 저 생명이나 내 생명이나, 저 모습이나 내 모습이 둘이 아니라는 걸 안다면 건져 주고 가야 하지 않느냐?” 하고 말을 하면서 “너도 예전에 그러했지 않느냐?” 하고서 말을 하니까 “그렇습니다.” 하고선 참 울었답니다.

그렇게 건져 주고 나서 휘적휘적 바가지에 조금 얻어 가지고 왔죠. 어느 날 또 얻으러 나갔는데 한 집도 못 얻었습니다. 그래서 전자에 자기 은사를 찾아다니며 기도를 드리고 불공드리던 대감네 집을 찾아갔습니다. 도저히 그 많은 식구들을 얻어서 연명하게 할 수가 없어서. 그 대감네 집을 찾아가니까 그 집에서 패물을 줬습니다. 그 패물을 가지고 가서 지금으로 치면 금세공 집에 가서 팔겠다 했겠죠. 그런데 마침 가 보니까 그 세공하는 아버지가 바로 언젠가 건져 준 적이 있는 그 집이에요. 그러나 그런 얘길 해도 그 아들은 들은 둥 만 둥 했습니다. 그러면서 금을 보니까 눈이 휘번덕거려졌죠. “내가 물어봐서 이거 살 사람을 구해서 팔아 주겠소.” 해 놓고는 바로 원님한테 찾아갔어요. 원님한테 찾아가서 고자질을 했죠. “이러이러해서 이것이 나라에서나 나오는 건데, 묘(墓) 도둑질한 건지 모르니까 이것을 잘 처리해 주십시오.” 하면서 뭐, 상금이나 받을 줄 알고 그랬죠. 그랬더니 원님이 너는 요다음에 내가 무슨 일이 있을 때 상금을 내리겠다 하고선 보냈단 말입니다.

그러고선 그 스님은 붙잡아다 가둬 놓고 원님은 그 패물을 들고 한양엘 왔습니다. 임금한테 와서 이러한 얘기를 다 하니까 노발대발했습니다. “이것은 대궐에나 있던 패물인데 어째서 그 사람 손에 들어갔느냐. 필시에 이건 도둑놈이 아니고는 절대 그럴 수가 없다.” 했습니다. 그래서 한양으로 데려다가 감옥에 가뒀죠. 이제 참(斬)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그 사람이 스님인 줄 모릅니다. 머리도 기른 데다 몰골이 말이 아니거든요. 형편이 어려워 살 수가 없어서, 상놈인데 살 수가 없어서 그냥 돌아다니는 줄 알겠죠. 그래 인제 들어가서 있으려니깐 아, 밥을 주는데 입맛이 없어서 영 먹을 수가 없는데 거기 사람들이 죄 굶어 죽을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히단 말입니다. 입맛도 없고 들어가지도 않아서 목이 메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으니까 “야,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죽을 날이 이제 가까워 올 텐데 밥이나 배불리 먹어둬!” 하거든요.
그 소리를 듣고 귀가 번쩍 띈 겁니다. ‘어떡하면 여기서 벗어나지?’ 하고선 생각을 하던 중 뱀 생각이 났습니다. “야, 뱀아!”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뱀이 즉시 달려왔습니다. 즉시 달려와서는 “부르셨습니까?” “내가 이만저만하여 꼬빡없이 이거는 묘 도둑놈으로 몰려서 죽게 됐어. 참한다고 한다. 그러니 어떡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써 스님이 날 알고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뱀은 뱀으로 살던 습이 있어. 독이 있고. 그 습이 있어서 능수능란합니다 이거야. “그러니 걱정 마시고 나는 보이지도 않으니까 들어가서 대비마마를 꽉 물어뜯어서 독이 올라서 정신 상태가 흐려지고 살이 전부 시퍼렇도록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리고 대비마마 눈에만 내가 뱀으로 보일 거고 방방곡곡에서 고치려고 해도 아무도 못 고칠 겁니다. 그때 당신이 들어가서 이마에다가 손만 얹는다면은 그 독이 전부 다 빠질 테니 그 후에는 알아서 하십시오.” 그랬거든.

그러고는 뱀은 쏜살같이 대비전으로 들어갔어요. 대비 눈에만 보였지 딴 사람 눈에는 안 보이죠. 그래서 얼른 물고선 달아나갔죠. 달아나가나 마나죠. 알고 본다면 달아나갈 것도 없고 들어갈 것도 없는, 그 모습 없는 모습이 그렇게 했으니까요. 그러면 그게 누군가? 바로 그 스님이란 말입니다, 둘이 아니기에. 급한 거를 면할 때는 어쩔 수가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걸 잘 음미해 보시면 우리가 이 세상 살아나가기가 그렇게 편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참, 옥 안에 들어 있으니까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그냥 여기서 쑤석쑤석 저기서 쑤석쑤석 야단났고, 온 방방곡곡의 의사가 들어왔다 나갔다 해도 뭐, 까딱없거든요. 그래서 울고불고, 참하고 말고 그거는 뒷전이고, 하여튼 야단이 났어요. 그때쯤 임금한테 고해 달라고 그랬습니다. “제가 한번 고쳐 볼 수는 없겠는지요?” 하고 청하니까 “그러면 들여와 봐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금으로 치면 재판도 해 보지 않고 남의 소리만 듣고 감옥에 가뒀는데 “그러면 목욕을 시켜 가지고 데리고 들어오너라.” 그래서 목욕을 시키고 그 방엘 들여보내졌죠. 들어가서 손을 대비마마의 이마에 짚으니까 아, 얼마 안 있어서 깨어나거든요. 깨어나면서 그 시퍼렇던 게 차차차차 위서부터 아래로 다 삭아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임금이 깜짝 놀란 겁니다. 전국에서 한다 하는 의사가 다 들어와서 봐도 영 가망도 없더니 이렇게 나을 줄이야. 참, 미처 몰랐다고 하면서 보물 얻은 그 사유를 다 물어봤습니다, 그때서야.

그래서 그 사유를 주욱 얘길 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금세공 아버지가 덫에 걸려서 있는 거를 살려 주었다는 얘기도 했지마는 그거는 아랑곳없죠, 그걸 모르니까. 그랬는데 스님이란 소리는 안 하고 그 대감님이 그렇게 주셨다 하니까, 그쪽으로 연락을 취해 봤겠죠? 보니깐 사실이거든요. 그러면은 이건 도둑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자질한 그 금세공 하는 사람을 붙들어다가 옥에 가두라고 하고, 그 스님을 임금이 아주 믿고, 국가에 어떠한 문제가 있어도 서로 상의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돼 버렸죠, 너무 믿으니까. 그러자 이분은 그때에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국방도 튼튼해야 하고 국가의 재정도 그렇고 모든 문제, 지금이나 그때나 뭐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런 얘기를 하니까 그래도 임금은 다 듣고 그대로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것이 보이는 물질만 가지고 얘기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빨리 알아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아까 뱀 얘기 했죠? 그 얘기처럼 잘 생각해 보신다면은 우리가 그때나 지금이나 국방에, 나라에 대책을 세우는 데도 문제가 있다. 무슨 문제냐? 우리는 이 물질적인, 어떠한 수효의 사람들만 채워 놓는 게 보통 경우라고 봅니다. 그러나 사람보다도 사람 아닌 사람이 더 많단 얘깁니다. 그럼으로써 군인 한 명에다가 군인 마음의 그 마음 근본을 넣어 준다면은, 즉 말하자면 잠재해 있던 의식 자체를, 유명한 사람들을 다 넣어 준다면은 열 배나 위력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손자병법에도 “마음을 휘어잡지 않고는 싸움을 할 수가 없고, 마음을 휘어잡아서 이겨야지, 마음을 휘어잡지 않고 마음을 조절하지 못한 채 그 마음을 회전하지 못하고야 어찌 싸움을 해서 이길 수 있겠느냐. 죽이기만 하면서 싸워야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이런 문제가 있죠.

그렇듯이 앞으로 이러한 도리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점점 살기가 어려운 세태가 다가온다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우리가 지금 앉아서 국민이라든가 자기 나라를 위해서나 또는 경제를 위해서라든가 공업을 위해서라든가 국방을 위해서라든가, 그 모두를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모체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먹어 보고 맛을 알지 못하는 이상, 내가 말로 해서 확확 나갈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한생각이 그렇게 귀중하다. 한생각이 일체 만법을 다 들이고 낼 수 있는 회전의 근본 원력이 되는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신, 최초의 나 자신의 태초를 모르니 어찌 그것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겁니다.

여러분이 최초에 생길 때에, 사람으로 그냥 생긴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디 있는가? 내 배 속에 내 태초의 모습이 있지. 보세요, 없나? 그걸 역력히 보세요. 우리는 그것이 모여서 인간 한 덩어리가 된 겁니다. 그게 커져서 자꾸 진화되고, 그것이 자꾸자꾸 늘어서 우리는 지금 얼마나 커졌습니까? 인간으로서, 고등 동물로서. 그리고 또 시대를 본다 하더라도 지금 얼마나 개발이 됐습니까? 전자엔 먹을 게 없어서 쩔쩔매고 인종이 그렇게 드문드문 있더니 지금은 보세요. 얼마나 많고, 또 전자에 내 모습으로 살았던 짐승들을 보라고요. 짐승들이 사람이 되고 기어 다니다가 서서 다니고 이런 거지, 꼭 처음부터 이렇게 서서 나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떨어진 게 아니에요. 이만큼 진화되고 이렇게 발전이 된 것도 그 중세계에 우리는, 이런 중점에 와 있지 않나 이렇게 보는 거죠.

우리가 불국토를 이룬다 할 때는, 회전을 다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졌을 때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한생각을 해서 회전을 할 수 있는 그런 멋진 대인이 됐을 때에,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불국토다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이 앞으로는 점점 어려운 문제, 예를 들어서 얘기합니다. 우리가 지금 그 뭡니까? 남의 힘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모르고 남을 때립니다. 그러면 오히려 화를 입죠? 그거와 마찬가지로 무(無)의 세계의 어떠한 문제를 연구한다고 그러고, 계발한다고 그러고 과학적으로 하다가 잘못 건드려 놓으면 오히려 화를 입는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둘로 보지 않고 언제나 선의적으로 우리가 계발을 한다면은, 그것도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모습을 악하게 가지고 나오는 게 아니라 선신으로서 잘 나와서 자기의 길을 인도합니다. 자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둘로 보고 상대적으로 보고 우리가 그 도리를 모르고서, 그쪽의 능력도 모르고서 뚜껑을 열었다가는 패배를 당합니다.

그건 뭐냐. 나만 죽는 게 아닙니다. 전체가 다 이건 깨지는 겁니다. 한 모퉁이가 깨질 수도 있고, 물로 그냥 ‘팡’ 칠 수도 있고, 불로 다 타 죽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건 마치 ‘맛을 봐야 맛을 알지’ 하는 식입니다. 몇 수억 천년을 살아온, 모습 없는 모습들이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냥 표면적으로 우리처럼 이렇게 다니는 건 아닙니다마는 모습 없는 모습이 온 누리에 아니 다니는 데가 없이 살고 있다는 얘깁니다. 허공에도 살고 있고, 또 혹성에도 살고 있는데,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연구한다고 거기까지 파헤쳤을 때는, 다는 파헤치지 못하고 한 부분만 파헤쳤을 때는 그때는 참 위험한 결과도 가져올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공부를 해서 만약에 과학자들이 위험 지경에까지 도달했을 때는 탁 이렇게 안아서 잘 길을 인도해 줄 수 있는, 스스로의 마음에서 그렇게 이끌어 줘야 된다는 얘깁니다.

여러분, 이거를 잘 음미해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어떤 때 피곤할 때는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게끔 하죠, 이 안에서. 몸이 피곤하면 ‘아휴! 내가 왜 이렇게 피곤해?’ 하고 알게 해 주죠. 또 피곤하면 ‘아, 조금 쉬어야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자기 몸을 위해서 자기가 얼마나 아름답게, 즐겁게 해 줍니까? 그렇게 ‘내가 피곤하지.’ 그러면 벌써 알게끔 해서, ‘좀 쉬어야지.’ 하고 쉬게끔 마음이 들게 하고, ‘아휴, 좀 개운한데.’ 하게끔 만들고, 그러고서 또 피곤하면 ‘목욕 좀 해야지.’ 요런 마음이 들게 하고. 일일이 여러분을 위해서 그렇게 아름답게 건건(件件)이 자기를 생각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주인공입니다. 참자기 주인공인데 이름을 주인공이라고 붙였을 뿐입니다.

그것이 자연적으로 자연의 섭리로서 그렇다면은 누구한테나 마음은 갈 수가 있는 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 마음은 하나지만 마음 내는 건 수천 수억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응? 마음은 하나야. 그러나 마음 내는 거는 수억, 우주 삼라대천세계에 꽉 찰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내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뱀도 내가 될 수 있고, 개구리도 내가 될 수 있고, 새도 내가 될 수 있고, 대통령도 내가 될 수 있고 모두가 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위대하다, 위대치 않다’라는 말이 붙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87년 2월 15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 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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