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신위에게 보낸 초의의 편지

초의 스님이 신위에게 보낸 편지. 지본 묵서로 크기는 32?55cm. 평소 존경했던 신위를 북선원에서 만났던 기쁨이 잘 담겨 있다.

근현대기에 가장 변화무쌍하게 변화된 것은 정보 통신이다. 20세기 초까지도 편지로 서로 정보를 교환했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특히 핸드폰의 일반화나 소셜미디어(Social Network Service)를 통한 정보 교류는 상상을 초월하는 신세계를 열었다. 물론 현대적인 소셜미디어(SNS)는 1990년대 이후 월드와이드웹 발전의 산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정보 수단은 편지처럼 눈으로 정보를 교류했던 시대로 회귀한 듯한데 매개체이나 전달 방법은 판이하게 다른 특징을 보인다.

시공간을 압축시킨 SNS가 실로 소통의 방식으로 가장 이상적인 것일까. 물론 현대인의 삶의 방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정보 통신의 혁신은 사람 간에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정서 공감이라는 측면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드러낸다. 손끝으로 전달되는 편지로 전해지는 따뜻한 마음, 진정성 등은 공감의 여운이 크다. 그러므로 편지는 아직도 유효한 정보 교류, 소통의 방법이라 하겠다. 

조선 후기 대표하는 文人 ‘신위’
부인과 사별 後 불교에 심취해
초의·신위 1831년 북선원서 만나
“19년 간 연모·막힌 마음 사라져”
평소 존경했던 문인 만났던 기쁨
편지 구절마다 절절히 담겨 있어

한편 옛 사람들의 간찰, 즉 편지는 정서와 정보를 공유했던 사람들이 남긴 개인사의 편린이다. 이들은 세련되고 의미 있는 내용으로 편지의 행간을 채웠다. 따라서 편지에는 잔잔한 일상사나 요청 사항, 도움을 구하는 내용이나 기쁨과 슬픔, 분노와 한탄까지도 숨김없이 드러냈다는 점에서 시문과는 다른 특성을 지녔기에 상황에 따른 긴장감과 생동감이 행간에 오롯이 담겨 있다. 편지가 시대를 담고 있는 정보의 보고라는 점에서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민속, 사회 흐름 등이 편지를 통해 조명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편지가 미세사(微細史)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하겠다.

이번 소개할 초의스님의 편지는 1833년경에 신위(申緯1769~1845)에게 보낸 것으로 보여진다. 피봉(편지봉투)에 단정한 해서체로 ‘본 관청에 올립니다. 모시는 사람은 열어 올리시길(本衙上 侍下人 開上)’이라 썼으며 좌측 하단에 ‘초의 승려 의순이 삼가 감사를 표하는 글(草沙門意恂謹謝狀)’라고 썼다. 글씨체는 정형적인 초의 글씨이다.

특히 편지의 첫머리에 ‘병상합하(兵相閤下)’라고 쓴 글자를 다른 글자보다 한 칸 올려 쓴 것이 눈에 띈다. 대개 옛 편지나 문서에 보이는 용례로, 자신보다 학문이나 관직이 높은 사람에게 보내는 문서에 나타나는 형식이다. 상대방에게 극진한 예의와 존경을 표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 편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지난번 한양(洛下)에 있을 때 해붕 선사에게 처음으로 합하께서 높고 원대한 뜻을 품어 탁연히 속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뵙고자하는 바람을 마음 속 깊이 품고 있었습니다”라고 한 점이다. 이는 초의가 처음 상경했던 1815년경에 학림암의 해붕 선사에게 ‘병상합하, 즉 신위의 이야기를 듣고 한번 만나고자하는 뜻을 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달리 이들이 만난 것은 1831년경이다. 그렇다면 초의가 ‘병상합하’라 부른 인물을 신위로 추정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가 맡았던 관직을 살펴보면 그 해답이 나온다. 바로 그가 1814년 병조참지를 거쳐, 이듬해 곡산부사로 부임했다. 1822년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당쟁의 여파로 파직되었다가 1828년에 강화유수로 복직되었다. 하지만 1830년경 윤상도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시흥 자하산방에 은거하며 불교에 심취한다. 그러므로 초의는 신위를‘ 병상합하’라 부른 것이리라. 그럼 초의가 신위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문 초의 의순은 삼가 재배하고 글을 올립니다.
병상(兵相) 합하, 지난번 한양(洛下)에 있을 때 해붕선사에게 처음으로 합하께서 높고 원대한 뜻을 품어 탁연히 속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뵙고자하는 바램을 마음 속 깊이 품고 있었습니다. 제가 한양에 있던 중에 또 운산(雲山)에서 홍현주(洪道人)와 모였을 때에 이끌어 주신 가르침을 받음에 따라 지금은 제가 나아지게 되었습니다. 이 좋은 인연이 거듭 맺어짐에 일전에 바라던 것보다 더욱 더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설령 마음을 이끄는 길이 이미 익숙하다 할지라도 오직 득의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마침내 큰 위험을 입게 됩니다. 두 기인한 운명이 은밀하여 이미 운명이 쫓아와 다시 기이함을 얻었습니다. 연당(蓮堂)엔 비 자욱하나 난실엔 사람조차 고요합니다.

마침내 19년의 깊은 연모와 막혔던 생각이 환하게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삼일 밤낮을 지내는 동안 오직 합하께서 버려두지 않았고 또한 저도 의지한 바가 오래되었습니다. 정의(精義)를 펴심에 이르러 공손히 현리(玄理)를 말씀드림에 말은 높되 요지가 있고 말이 달변이며 이치에 밝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바다처럼 가슴이 넓고 아는 것이 맑아져 어지러움이 스스로 안정되어 마음을 비우고 들은 것을 참학하게 합니다. 날마다 궁구하여 몸이 피로한 줄도 모르고 밤이 방해해도 눈에는 졸음이 없어지니 어찌 다만 십년 독서보다 나을 뿐이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몇 백 생을 배워야 능히 무량(無量)한 반야에 이르며 생사 중에 스스로 무(無)를 발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의 지혜는 깊은 믿음에서 일대사를 얻은 것이니 인연입니다. 교(敎)에 일항사(一恒沙)에 대해 말하셨는데 모든 여래께서 발한 보리심입니다. 정법으로 능히 멸하고자할 때에는 이 대승으로 비방을 일으키지 않다고 한 말이 있으니 믿음을 얻어야 마음이 즐겁습니다. 또 말하길 보리 숙연이어야 반야의 지력에 오른다고 하였으니 재관(宰官)을 시현(示現)한 것입니다. 몸에 숙습(夙習)이 농후해지면 부귀에 농락되지 않고 육바라밀과 사무량심을 염염히 공을 세우고 늘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으며 오래도록 이 말을 외웠습니다.

지금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세간의 진노(塵勞)에 이끌려서 이리저리 돌아다녀 쉴 수가 없습니다. 그를 위해 한번 말하매 정수(精修) 증오(證悟)의 문하에서 마침내 은연히 안으로 탄식과 답답함을 간직함으로부터 스스로 말과 동작에 드러납니다. 제 생각으론 여기에 이르러 짐짓 의심이 나는 것은 무슨 이치입니까. 무릇 닦아서 증득한 이후 믿음과 즐거움이 생겨 잊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수증(修證)의 문을 경험하지 않고 억지로 말함으로부터 믿음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즐거울 수 있으며 그 잊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미덥고 즐거우니 또한 잠시도 잊을 수 없습니다. 설령 돌아가지 않으면 휴복하지 못합니다. 그 기필하기를 참을 닦은 것이며 참으로 증득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아는가. 만약 선종의 문하에서 무수(無修)로서 닦으며 절증(絶證)하여 증득하니 무수(無修)이기 때문에 바로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며 절증(絶證)했기 때문에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즉 불심을 드러낼 수 없으니 깨달음으로서 바로 드러낼 수 없는 부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草衣沙門意洵 謹再拜上書
兵相閤下 昔在洛下 從海老師 始聞閤下有高情遠志 卓然絶俗離群 深懷一識之願 中年又會洪道人於雲山 自其有受提?之敎 以得今吾之勝 於是重結 前願彌加欽景 雖導心之路已熟 惟得意之緣未遇 竟被浩劫 密邇二奇之命 旣赴命 又得一奇 蓮堂雨鎖 蘭室人靜 遂使一十九年之沈戀滯想 豁?頓除 三晝夜中 豈惟閤下之不遺 抑洵之所待有舊矣 至於垂演精義俯陳玄理 語高而旨 辭達而理明 令人直得胸海寬淨識瀾自安 所以虛心參聽 日有窮而身不知疲 夜有?而目不交眠 豈止勝讀十年之書而已哉 不知 幾百生中學 般若來能於無量 生死中自發無 師之智 深信得個一段大事因緣也 敎中有言 於一恒沙 諸如來所發菩提心 能於正法欲滅之時 於此大乘不生誹謗 得信樂心 又曰 菩薩夙乘般若智力 示現宰官 身以夙習濃厚 不爲富貴之所籠絡 於六波羅密四無量心 念念策勳 念念成就 未嘗斯須暫忘 久誦此言 今見其人 然猶以世間塵勞之牽緣 不能旋駕休復 爲之一試 於精修證悟之門 遂隱然內自貯歎凝憂 有以自發於語言動作之中 愚意至此 竊有疑焉 何則 凡修而證得 然後方有信樂而不忘者 如未有經修證之門 强自爲言 信且不可得 而?其樂乎 ?其不忘乎 旣信樂之 又不斯須暫忘 雖不旋駕未休復 其必曰 眞修了 眞證了也 何以知其然也 如禪宗門下 以無修而修 絶證而證 無修故直見自心 絶證故見心 卽佛心不可見 以悟爲見佛不可 卽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신위가 그린 ‘묵죽도(지본수묵, 95.6x42.4cm)’.

알려진 바와 같이 신위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이다.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렸으며 시문에도 출중하여 시·서·화 삼절로 칭송된다. 특히 부인이 돌아간 후 불교에 심취했던 그의 삶은 수행자와 같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1831년 8월에 쓴 초의의 〈북선원으로 자하도인을 찾아서(北禪院謁紫霞道人)〉에 “신위는 연단한 전 학사인 듯, 범궁에서 향 사르는 대승의 선객이라(秘閣丹鍊前學士 梵宮香火大乘禪)”라고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아울러 이 편지에는 신위에 대한 초의의 흠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 지를 짐작하게 한다.

무엇보다 그가 “마침내 19년의 깊은 연모와 막혔던 생각이 환하게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삼일 밤낮을 지내는 동안 오직 합하께서 버려두지 않았고 또한 저도 의지한 바가 오래되었습니다”라고 한 점이다. 이는 초의가 신위를 만나길 염원한지 19년 만에 신위를 만난 이후에야 그에 대한 연모와 만나지 못해 답답했던 마음이 눈처럼 녹아 버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초의가 북선암으로 신위를 찾아간 것은 1831년 8월이다. 그러나 이 편지의 내용 중에 “19년의 깊은 연모와 막혔던 마음이 사라졌다”고 하니 1830년 상경하여 1833년경 대흥사로 돌아가 이 편지를 보낸 것은 아닐까. 더구나 그가 북선암에 신위를 찾아가 3일간을 머물며 “정의(精義)를 펴심에 이르러 공손히 현리(玄理)를 말씀드림에 말은 높되 요지가 있고 말이 달변이며 이치에 밝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바다처럼 가슴이 넓고 아는 것이 맑아져 어지러움이 스스로 안정되어 마음을 비우고 들은 것을 참학하게 합니다”라 하였다.

이들은 서로 불교의 깊은 세계를 유영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초의는“날마다 궁구하여 몸이 피로한 줄도 모르고 밤이 방해해도 눈에는 졸음이 없어지니 어찌 다만 십년 독서보다 나을 뿐이겠습니까”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신위에게 선종의 “무수(無修)로서 닦으며 절증(絶證)하여 증득하니 무수(無修)이기 때문에 바로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며 절증(絶證)했기 때문에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는 불교의 묘리를 설파한 정황도 밝혀진 셈이니 자료의 중요성이 더욱 돋보이는 순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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