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생을 받는 것이란

菩薩思惟。受生者有二種樂。一者救生樂。二者解脫樂。我云何捨二種樂取一種樂。菩薩思惟。一切凡夫盡共有一切種智性。一切種智凡夫易得。以是故我愛凡夫不愛解脫。菩薩思惟。隨有苦?生處悲心得生悲得增長。以是故。我愛有中。菩薩語悲心言。汝使我得?淨增長。使一切生盡得?淨盡得增長。菩薩語悲心言。生在苦百千苦之所逼迫。今日使生必得安樂與我成辦此事。菩薩語悲心言。生愛所縛死所攝。見世間無歸無依救生故受種種苦。菩薩思惟。我愛大丈夫。見有生墮在苦中捨涅槃樂。安樂生自勉勵此事。菩薩思惟。向救生得無生忍決定智得授記別。得授記別者我今供養恭敬。菩薩思惟。佛得遍淨眼。使我現前合掌請佛。願授我記。

번역|보살은 생각하기를, “생을 받는 것에 두 가지 즐거움이 있나니, 첫째 중생을 구제하는 즐거움이요, 둘째 해탈의 즐거움이라. 내가 어찌 두 가지 즐거움을 버리고 한 가지 즐거움만 취하랴” 합니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일체 범부는 모두 일체 종류의 지혜 성품이 있어 일체종지를 범부가 쉽게 얻나니, 이로써 내가 범부를 사랑할지언정 해탈을 사랑하진 않으리라” 합니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고통 받는 중생이 있는 곳을 따라 자비심으로 생을 받고 자비심을 증장시키리니 이렇게 내가 중생을 사랑하리라” 합니다. 보살이 자비심으로 말하기를, “그대가 나로 청정함을 증장시키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다 청정을 얻게 하며 다 증장시키누나” 합니다. 보살이 자비심으로 말하기를, “중생이 고통 받되 백천의 중생이 고통과 핍박을 받는데, 오늘날 중생으로 하여금 반드시 안락을 얻게 하며, 나와 더불어 이 일을 분별케 하리라” 합니다. 보살이 자비심으로 말하기를, “중생은 애욕에 얽매인바요 죽음에 끄달린바라. 세상을 보건대 귀의할 데가 없거늘 중생을 구제하려는 것은 가지가지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는 대장부를 사랑하노라. 중생이 고통 가운데 빠진 것을 보면 열반락을 버림이라. 중생의 안락을 위하여 스스로 이 일을 권면하노라” 합니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중생을 구제하려 무생법인을 얻되 결정코 지혜로 수기의 기별을 얻으리라. 수기의 기별을 얻은 이를 내가 지금 공양하고 공경하리라” 합니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 두루 깨끗한 눈을 얻으셨으니 나로 하여금 현전하시는 부처님을 청하여 합장하게 하시고 나에게 수기하여 주시기 원합니다”라고 합니다.

해설|중생에게 생을 받는 다는 것은 괴로움일 것이다. 그러나 보살에게도 괴로움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중생의 생은 ‘애별리고’와 ‘원증회고’와 ‘구부득고’와 ‘오음성고’인 사고(四苦)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보살은 태어난다는 것에서 괴로움 보다는 ‘중생을 구제하는 즐거움’과 ‘해탈의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즐거움을 말한다. 네 가지 괴로움인 사고(四苦)인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괴로움’, ‘미운 이와 다시 만나는 괴로움’,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 ‘색,수,상,행,식에서 생기는 몸과 마음의 고통’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그러니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과 염려도 따라붙을 겨를이 없다.

그리하여 보살은 스스로에게 자비를 가르치면서, 스스로 가지는 발원의 힘으로 산다. 발원품이 바로 이런 내용이었다. 스스로 열반락에 들려 수행하는 게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려 무생법인의 원력을 세운다. 보살에게 무생법인은 ‘불생불멸’의 이치를 깨닫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발원이다. 다시 태어나야만 중생을 구제하는 즐거움을 맛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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