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탁효정 지음|은행나무 펴냄|1만 7천원

“시대의 마음을 읽는 것이 역사를 통찰하는 가장 쉽고 재미있는 길”이라는 저자 탁효정의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는 왕 중심의 조선사 뒤에 가려진 왕실 여인들의 지성스런 불사를 소설처럼 생생히 재현한 일종의 역사책이다. 한낱 투기와 가십의 소재에 불과한 왕실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옛 사부대중의 자생적 개혁 의지와 지혜를 보여준다.

원당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간절히 비는 집’이다. 조선 왕실 사람들은 절을 짓고 그 안에 위패나 초상화를 모셔 자신만의 소원을 담은 공간을 만들었다. 주로 죽은 부모나 남편, 요절한 자식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건축된 원당은,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아들 회임을 발원하는 기도처의 성격을 띤다. 불교의 구도적 성격에 기복 신앙이 더해지고, 세종의 한글 창제로 불경이 대중화되면서 불교는 명실상부한 민중 종교가 되었다. ‘원당’이라는 말 자체는 낯설지만, ‘명당’이라던가 ‘영험한 기도처’란 익숙한 민중 신앙으로 지금껏 그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원당, 무언가를 간절히 비는 집
현재 남아있는 원당 많지 않아

이름 없는 무장에 불과했던 이성계가 역사상 가장 견고한 왕조라 평가받는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얼까? ‘상갓집 개’라는 하찮은 별명으로 불렸던 왕실의 먼 친척 흥선대원군이 권력 최상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신화와 같은 역사의 이면에는 ‘천하 명당’이 있다. 명당에 부모의 묘를 이장하거나 절을 세우고 성심으로 기도한 끝에 뜻을 이루는 것이다. 조선왕조사를 따라 명당을 읊다 보면 선조부터 순종까지 왕을 열넷이나 배출한 길지 동작동 화장사(현 국립현충원)가 등장한다.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를 이곳에 모셔 손자 하성군이 선조가 되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묻혀 그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가원수가 되었으니 왕을 배출하는 곳은 확실한 듯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 ‘명당’에 얽힌 아이러니들도 놓치지 않고 언급한다.

원당을 이해한다는 것은 명당을 파악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명당을 애타게 찾았던 그 시대의 간절한 기도, 그 욕망과 아픔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폭군’ 연산군과 광해군, ‘팜파탈’ 조귀인과 장옥정, ‘국모’ 명성황후 등 흔히 우리가 친숙한 별명을 붙여 부르는 왕실 사람들과 그 원당에 얽힌 사연들을 보면 그 호칭이 후대의 역사관, 즉 현재의 욕망과 아픔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역사서들의 일편지견에서 벗어나 세종의 독재 군주적 측면, ‘무능한 왕’이란 오명을 벗기 시작한 광해군의 콤플렉스, 공포정치를 펼쳤던 세조의 선업(善業) 등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그런가 하면 조선 시대 여성을 다룰 때마다 겪게 되는 고충도 털어놓는다. “여자가 사람이 아니었던 시대,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적 의미와 인간의 존엄성을 찾”는 일이 마치 목이 좁은 유리병에서 자란 새를 꺼내는 일 같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500년 역사를 가능케 했던 것은 어둠 속에서 촛불을 밝히고 치성을 올린 왕실 여성들의 불심이었고, 또한 역으로 500년간 이어져 온 왕실 불교는 왕실의 여성들이 막막한 삶 너머 내세를 상상하며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영겁회귀의 삶과 욕망, 죽음과 참회가 원당에 오롯이 깃들어 있다. 저자는 “한 사찰의 역사에는 수많은 인연과 수없는 마음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하나의 인드라망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찰 원당에 깃든 왕실 사람들의 기도에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이치를 깨닫는다.

내원당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창덕궁 후원.

현재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원당은 그리 많지 않다. 불교에 반감을 지닌 조선 유학자들의 방화와 잦은 외침, 일제강점기의 문화 정책, 한국전쟁에 의해 수많은 불교 유산들이 전소 및 훼손되었다. 원당의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의성 고운사의 연수전이다.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이 건물은 특이하게도 사찰 전각이 아닌 유교식 사당 형태로 건축되었다.

기로소(耆老所)는 정이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70세 이상 문신들의 친목 기구로, 왕과 함께 연회를 열며 회원 간 화친하는 곳이다. 유교적 효치주의에 기반을 둔 기로소가 자진해 사찰에 원당을 설치했다니, 왕비나 대비의 내탕금을 털어 예산을 마련한 조선 초중기의 원당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는 조선 후기의 불교가 더 이상 배척이 아닌 공존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전투에서 승군들의 활약과 전쟁 복구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불교의 사회경제적 기여를 인정한 것이다. 게다가 주자학 이데올로기가 더욱 공고해지면서 불교를 견제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승려들과 지적·문화적 교류를 확대해 갔고, 불교계 또한 유교와의 융합과 공존을 위한 접점들을 모색했다. 원당을 이해한다는 것은 조선의 역사를 다르게 보는 하나의 창을 내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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