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즐거움 가운데 제일은

菩薩思惟。我甚畏諸有。以悲心救生故樂處諸有。悲心語菩薩言。我使汝處生死終不放汝。何以故。報恩故。菩薩思惟。解脫樂度生尙不欲食。悲心遮我使不得食。況生死不堅牢樂。菩薩思惟。一切樂中第一佛說涅槃。是涅槃雖樂我智不欲去。所以智不欲去者悲和合故。菩薩思惟。我今敬尙涅槃。所以者何。涅槃中無生老病死故。涅槃雖樂悲心所牽。生故而不得去。悲心是諸佛之母。是以不捨向於涅槃。若涅槃就我猶尙不證。況棄生而向涅槃。菩薩思惟。我欲向涅槃。悲是佛母就我與乳。云何捨去無上菩提。設當不與生利樂我亦不求。況復涅槃。菩薩思惟。不應向涅槃捨無歸依生故。悲心故使我不證涅槃。涅槃是盡生邊。若無生者何能救拔生。

 

번역|보살은 생각하기를, “내가 유위법을 두려워하지만 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제하므로 유위법을 즐거워하리라” 합니다. 보살이 자비심으로 말하기를 “나는 그대 있는 곳에서 생사를 마치고 그대를 놓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과보를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해탈락(解脫樂)으로 중생을 제도하려 늘 탐식하지 않으리니, 자비심을 막는다면 나는 먹지 않을진대 하물며 생사의 견고하지 않은 즐거움이리오” 합니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일체 즐거움 가운데 제일이 부처님 설하신 열반이니, 이 열반이 비록 즐거워도 나는 지혜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지혜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자비와 화합하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내가 지금 열반을 숭상하나니 어째서 그런가 하면 열반 가운데는 생로병사가 없기 때문이니 열반이 비록 즐거워도 자비심에 매인바라. 중생을 위하여 떠나지 않거니와 자비심은 모든 부처의 어머니라. 이로써 열반으로 향하는 것을 버리지 않되 만약 열반을 성취했어도 오히려 증득하지 못한 듯 여기리라. 하물며 중생을 버리고 열반으로 향하랴” 합니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내가 열반으로 행하려 하나 자비가 불모(佛母)가 되어 나를 거두고 내게 젖을 주시거늘 어찌 무상보리를 버리고 떠나겠는가. 중생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으리니 하물며 다시 열반이겠는가” 합니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응당 열반으로 향하되 귀의하지 않는 중생을 버리지 않으리니 자비심 때문에 설령 내가 열반을 증득하지 못해도 열반은 생명이 다하는 것인데 만약 생명이 없다면 어찌 중생을 구제할 수 있으리오” 합니다.

 

해설|부처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천수경〉에는 ‘불모대준제보살’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의 명호 가운데 하나다. 불모는 부처를 낳고 양육하는 부처의 어머니며, 〈준제경〉에서는 청정성을 불모의 성품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제바보살은 자비를 불모로 삼아 설하고 있는데, 진정한 청정성은 계행에 있는 게 아니라 자비를 바탕으로 한 자비행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계행도 자비의 바탕에 서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결론에 쉽게 도달한다. 그래서 중생을 향한 자비 앞에서는 열반도 부질없고, 해탈락도 부질없다.

그렇다면 누가 불모대준제보살의 행을 하는 이인가? 당연히 중생을 부처로 키우는 이들이다. 수행자들은 스스로 부처의 제자로서 자부심을 가지되, 자칫하면 때달아 부처가 될 존재로서의 아만심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공양을 받으려고만 하고, 행은 따르지 못하면서 거만하게 가르치려 한다. 이런 수행자를 받아주고 존경하며 따르는 이들은 누구였던가? 결론은 자명해진다. 스스로 자고한 생각에 빠진 수행자는 중생이 되고, 그 중생을 자비롭게 섬기는 불자가 바로 ‘불모대준제보살’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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