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랴쿠지

일본 대표 고승 중 한 명인 사이초의 묘가 있는 정토원. 엔랴쿠지만의 수행 '12년농산행'이 여기서 진행된다.

나라, 교토 그리고 시가현에 있는 사찰을 소개해왔지만 기사가 나오기 전에 몇 번이나 등장한 사찰이 아마 엔랴쿠지(延曆寺) 밖에 없을 것 같다. 이번엔 드디어 엔랴쿠지의 차례가 돌아왔다.

내가 이 연재 원고를 쓰면서 고민하는 것 중의 하나가 등장인물에 대해서다. 한국의 독자 분들이 낯선 이름이 자주 나오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본 사찰, 나아가서는 일본 역사를 더 깊이 알려주려면 중요한 인물에 대해서는 ‘이 연재에서 일부러 등장시키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도지(東寺)를 소개한 기사에서 등장한 명승 구카이(空海)와 대칭으로 자주 나오는 이름이 엔랴쿠지를 창건한 명승 사이초(最澄)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인물이어서 일본 사람이라면 역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더라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유명한 스님이다.

도지 기사에서 말했듯이 8세기 말에 간무(桓武) 천황이 수도를 나라에서 교토로 천도했는데 천도 배경에는 정치적인 권력이 비대해진 기존 나라(奈良)의 불교 세력과 거리를 두고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천황이 기존 불교 세력이 더 이상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나라 사찰을 교토로 옮기지 않고 새로운 사찰을 만들려고 했다. 마침 그 때 등장한 사람이 사이초와 구카이였다. 두 분이 먼저 나라에서 공부한 후 산속에서 수행을 쌓고, 견당선을 타고 804년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각기 천태종, 진언종을 배웠다. 귀국한 후에는 천황의 지지를 받으면서 사이초는 천태종 사찰 엔랴쿠지, 구카이는 진언종 사찰 도지를 개창했다.

일본 천태종에 전하는 밀교를 태밀(台密)이라고 부르고, 도지를 본산으로 하는 진언 밀교를 도밀(東密)이라고 한다. 원래 천태종과 밀교는 다른 것이지만 사이초의 사상 자체가 밀교적이라서 사이초의 천태 교학에 대한 이해는 그의 밀교 세계관과도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경향을 사이초의 후계자들이 더 증폭시켰다. 밀교를 결합시킨 천태종은 진언종과 함께 귀족 사회의 지지를 받아 발전했다. 토착화시켜 일본화 된 밀교가 일본에서 이렇게 시작되었고, 중국이나 한반도와 다른 일본화 된 불교가 발전했다. 일본 역사 특히 헤이안 시대는 두 스님, 두 사찰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사이초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엔랴쿠지는 비와호 서남쪽에 위치한 히에이잔(比叡山) 산 속에 있다. 사이초는 767년에 히에이잔 기슭, 비와호 가까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래인계 씨족이라고 전한다. 12세 때 절에 들어가 14세 때 득도 수계해, 사이초(最澄)라는 법명을 받았다. 19세 때 도다이지 계단원에서 구족계를 받고 국가 공인 승려가 되었다. 어린 시절의 이력만 보더라도 그가 엘리트이고 뛰어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이초는 나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히에이잔에서 수행과 정진하였다. 그리고 천태종 가르침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788년엔 약사여래상을 본존으로 하는 일승지관원(一乘止觀院)을 지었다. 그것이 바로 엔랴쿠지 핵심 건물인 근본중당(根本中堂)의 시작이다. 그 때 불상 앞에 놓은 등불이 1200년을 넘어서도 여전히 켜져 있어 ‘불멸(不滅)의 법등(法燈)’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초가 몰두한 천태 법문에 대한 연구의 성과는 그의 강연을 통해서 그 우수한 내용이 알려졌다. 천황의 인정을 받은 사이초는 804년에 국비 유학승으로 당나라에 유학했다. 당나라 체류 기간이 9개월에 불과했지만 천태종을 비롯해 선종, 밀교 등 다양한 법문 전수를 받은 것이 오늘날 ‘일본 불교의 모산(母山)’이라고 불리는 엔랴쿠지의 기초가 되었다. 귀국한 후,  806년 조정의 인가를 받고 일본 천태종이 개종되었다.

사이초는 훌륭한 승려를 양성하기 위해 히에이잔에 대승계단(大乘戒壇)을 만들었다. 대승계를 받은 후, 산에서 12년간 수행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 곳에 상주했다. 그러나 나라의 기존 불교계는 심하게 반대했다. 출가와 재가 구별 없이 줄 수 있는 대승계는 구족계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기존 불교계 승려들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822년 그가 입적한 후에서야 사이초의 소원은 칙허로 내려져 마침내 이루어졌다. 다음 해엔 연호인 엔랴쿠를 딴 엔랴쿠지라는 칙액을 하사받고 사찰 이름이 엔랴쿠지가 되었다. 866년엔 ‘전교대사(傳敎大師)’라는 칭호가 추증되었다.

명승을 배출한 엔랴쿠지
일본 불교의 요람인 엔랴쿠지에서 일본 불교사상의 중요한 명승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사이초의 제자이자 천태종의 기초를 만든 엔닌(円仁, 794~864), 지난 회에서 소개한 미이데라를 재흥시키고 천태종을 한층 더 발전시킨 엔친(円珍, 814~891), 엔랴쿠지를 중흥시킨 료겐(良源, 912~985). 염불로 극락왕생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일본 정토 신앙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겐신(源信, 942~1017). 임제종(臨濟宗)의 에이사이(榮西, 1141~1215), 조동종(曹洞宗)의 도겐(道元, 1200-1253), 정토종(淨土宗)의 호넨(法然, 1133-1212),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신란(親鸞, 1173-1262), 일련종(日蓮宗)의 니치렌(日蓮, 1222-1282) 등 일본 불교의 중요한 종파를 개창한 스님들이 엔랴쿠지에서 많이 나왔다.

엔랴쿠지는 사찰 규모도 크고 불상, 불화를 비롯한 문화재도 많이 갖고 있지만 엔랴쿠지의 가장 귀중한 보물은 역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이초가 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에 ‘가장 큰 재산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국보는 무엇인가. 국보는 즉 도심(道心)이고, 도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국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귀중한 보물이라고 해도 표면적이고 형태만 갖고 있다면 국보가 아니다. 도심을 갖는 진정한 국보라면 비록 한구석에 있어도 천리(千里)를 비출 수 있다.”

엔랴쿠지 역사는 빛나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10세기에 귀족을 받아들이고 고승으로 대접을 해서, 기진을 받는 것이 관례화 되었다. 이런 식으로 힘을 갖게 된 대표적인 사찰이 고후쿠지와 엔랴쿠지였다. 세력이 강해지면 어두운 점도 생긴다. 엔랴쿠지 승병(僧兵)들이 천태종 분파(分派)나 다른 종파의 사찰을 공격했다. 햐쿠사이지 기사에서 말했듯이 엔랴쿠지는 16세기에 오다 노부나가에 저항한 다이묘와 친교가 깊어서 사찰이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불타버렸다. 정치적인 것까지 많이 관여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어두운 면이 있는 것도 역사의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기서 명승들이 배출되고 지금도 일본을 대표하는 사찰이라는 것을 엔랴쿠지를 찾아가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엄격한 수행
엔랴쿠지는 또 다양한 수행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센니치카이호교(千日回峰行)’와 ‘12넨로잔교(12年籠山行)’라는 엄격한 수행이며 수행을 달성하면 신문 기사에 나올 정도다. 천일회봉행은 그 이름대로 천일에 걸쳐 히에이잔을 돌면서 정해진 많은 예배 장소에서 예배하는 수행이다.

수행승이 7년간 1000일에 걸쳐 답파(踏破)하는 거리는 지구 한 바퀴에 상당하는 약 4만km에 달한다. 올해 9월 천일회봉행을 달성한 40대 승려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달성한 승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16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51명이 천일회봉행을 회향했다.

천일회봉행이 동적인 수행이라고 하면 12년농산행은 정적인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12년농산행은 사이초의 묘가 있는 정토원(淨土院)에서 진행된다.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12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사이초 초상화 앞에 공양을 올리고 엄격히 정해진 근행(勤行)을 한다. 정토원 안팎에의 청소도 철저히 해야 되고 그 엄격함이 청소 지옥이라고 불릴 정도다. 에도시대 이후 117명 중 81명이 달성했는데 도중에서 병으로 죽은 승려가 적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엔랴쿠지에서는 또 일반인도 좌선, 사경(寫經) 등을 할 수 있다.

엔라쿠지 답사 안내

히에이잔 엔랴쿠지는 히에이잔에 있는 경내 약 500헥타르에 점재하는 약 150개 당탑의 총칭이다. 당탑이 주로 도도(東塔), 사이토(西塔), 요카와(橫川) 3곳에 나눠져 있는데 넓어서 자동차나 셔틀버스로 이동하게 된다. 셔틀버스는 12월초부터 3월 하순까지 운휴함로써 겨울에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는 어렵다.

대중교통으로 엔랴쿠지에 갈 방법이 3가지가 있다. JR교토역에서 버스 이용. 에이잔 전철 야세히에이잔구치(八瀨比叡山口)역에서 내리고 케이블카 이용. 시가현 게이한 사카모토(坂本)역에서 내리고 15분 정도 걸어가서 케이블을 타면 도도 지역 가까이에 도착한다.

도도 지역엔 엔랴쿠지 핵심 건물인 근본중당이 있다. 작년부터 약 10년간이 걸릴 대수리가 시작되어 건물 외관을 제대로 볼 수는 없지만 안에 들어가 배관할 수 있다. 도도에 있는 국보전에서는 엔랴쿠지가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사이초의 묘가 있는 정토원은 사이토 지역에 있다. 요카와 지역에는 엔닌 스님에 의하여 9세기 중반에 개창된 요카와중당(橫川中堂)이 있다. 현재 건물은 20세기 후반에 재흥된 것이다.

일반 안내서에 거의 안 나오지만 엔닌은 신라와 깊은 인연이 있는 스님이다. 그는 838년에 당나라에 갔는데 체류기간을 더 연장하려고 했으나 못 했다. 그 때 장보고가 창건한 산동성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 묵었던 엔닌의 소원을 이룬 사람이 바로 장보고였다. 덕분에 엔닌이 약 10년간에 걸친 구법(求法)의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요카와중당 옆에 있는 적산궁(赤山宮)엔 신라명신(新羅明神)이 모셔져 있다. 또, 도도 지역에 있는 무수루(文殊樓) 옆에는 장보고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념비가 있다.

마지막으로, 3곳이 다 숲속에 있어 조망이 좋지 않다. 하지만 사이토 지역과 요카와 지역 사이에 있는 미네미치(峰道)는 조망이 좋고 비와호가 잘 보인다(셔틀버스 정류장이 있음). 식당과 매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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