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무에서 실과가 무르익어야 만 가지 맛이 납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여러분! 그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신다면 어떠한 생각이 드십니까? 아까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이 집에 태어났다가 저 집에 태어나고 저 모습으로 태어났다 이 모습으로 태어나고 합니다. 이렇게 둥글리면서 끝 간 데 없이, 종점이 따로 없고 시발점이 따로 없이 돌아가면서 자기 마음 씀씀이에 의해서, 생활에 의해서, 행동에 의해서, 욕심에 의해서, 자기가 모습을 자꾸자꾸 바꿔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한다면 그 모두가, 애벌레든 짐승이든 할머니든 할아버지든 애든 어른이든, 남의 집의 아버지든 남의 집의 할아버지든 남의 집의 자식이든 어찌 내 자식이 아니며 내 부모가 아니며 어찌 그것이 내 생명이 아니며 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한번 이런 점을 마음 깊이 생각해 보셨는지요. 예전에 나도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3년 동안을, 거리로 다니는 애들을 쫓아다니면서 포장마차에 들어가서 국수를 서로 사 먹으면서 한 3년 그렇게 쫓아다녀 봤습니다. 낮에는 여러분하고 있으면서 저녁나절이 되면은 그 사람네들을 한번 검토해 본 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못 얻어 오고 훔쳐 가지고 오지 않으면 막 피가 나도록 매를 맞고 양냥이뼈가 어그러지도록 매 맞는 애를 봤습니다. 그 추운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가지고 들어가면 되나.’ 하고 어느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손을 혹혹 불면서 깡통을 옆에 놓고 돈을 세는 걸 봤습니다. 돈을 세어서 얼마는 다른 데 넣고서 고거 몇백 원 남는 것을 입이라도 축이려고 주머니에다 넣는 걸 봤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 새끼들이 남의 새끼입니까? 언제 내 새끼가 될는지, 언제 내 부모가 될는지 모릅니다. 어느 누가 내가 아니겠으며 어느 아픔인들 내 아픔 아닌 게 어딨겠습니까? 그런 걸 볼 때 나는 걔 하나만 본 게 아니라 전체 벌레까지도 보면서 너무나 슬퍼서 울었습니다. 아마도 자기가 춥고 배고파 보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배고픈 줄도 모르고 추운 줄도 모를 겁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서 또는 잘못을 저지르고 죽어서 딴 모습으로 가면은 시궁창도 돼지우리도 좋은 집으로 보인다 이런 겁니다. 욕심이 꽉 찼으니 볏짚단도 금으로 보일 수밖에. 볏짚단도 금으로 보이고, 누렇게 마른 풀들도 금으로 방석을 해 놓은 건 줄 알아. 그러니 좋아서 그리로 들어가면 짐승이 되는 겁니다. 욕심이 많은 고로 눈이 어둡고, 그릇된 행을 저질러서요. 똑바른 밝은 눈을 갖는다면, 한마음의 청눈을 갖는다면 여러분은 조금도 잘못됨이 없을 겁니다. 진짜 자유인인 것입니다. 오늘 살아 있는 이 몸을 가지고 만약에 진짜 사람이 못 된다면 요다음 또 쳇바퀴 돌듯 어떠한 모습을 가지든 또다시 돌아가야죠? 그러니 몇 바퀴나 돌아왔을까요? 재밌는 얘기 하나 또 해 드릴까요? 잘 생각하세요.

두 가지 여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 한 점을 주니까, 그 고기 한 점을 보고서 고기로 보았습니다. 한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고기가 고기로 보이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 한 점을 주니까, 고기로 보는 게 아니라 사생(四生)의 그릇으로 보았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사생의 그릇, 즉 소 한 마리로 보았다 이 소립니다. 소 한 마리로 보이니까, 그 고기 한 점이 소 한 마리면은 사생으로부터 모든 생명체들이 그렇게 많은 숫자가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생각 하나에 수십억이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고기 한 점이. 그래서 그 고기 한 점을 딱 보는 순간에 소로 몇 바퀴나 돌았는지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소로만 몇 바퀴 돈 게 아닙니다. 짐승으로 얼마나 돌았으며, 얼마나 쫓고 쫓기고 먹혀 왔으며 이렇게 돌아왔는가 하는 걸 한눈에, 한 찰나에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탁 입에다, 보는 순간 벌써 자기는 요리를 해치워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소 한 마리를 탁 해치워 버린 겁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한 생각을 잘못하느냐 잘하느냐에 의해서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잠재의식 속에,

카세트에 얽히고설킨 게 그냥 몰락 벗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소 한 마리를 잡아먹고 치워 버렸으나 자기가 됐더랍니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죠. 소 한 마리를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았죠? 이걸 깨닫지 못하고 이론적으로만 알아선 안 됩니다. 소 한 마리를 다 먹고 보니까 자기가 돼 버려. 자기가 됐으니깐 두드러지지도 않았지? 자기가 또 거기서 소 한 마리를 꺼내니깐, 소를 꺼내도 소가 아니라 이제는 사람을 꺼내는 겁니다. 사람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이 됐으니까 사람으로 생산을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소를 넣었는데 사람으로 생산이 돼서 나왔습니다. 사람을 꺼냈어도 소의 사생이 든 그릇이나 사람의 그릇이나 똑같이 그 사생은 마찬가지나, 차원은 사람이라고 하는 거하고 짐승이라는 거하고는 달라. 소라 하면은 새끼를 두 마리도 낳고 세 마리도 낳고 그럴 수 있지만 사람은 드물어. 자식을 하나밖에 안 낳아, 90% 100% 다. 그렇지만 그런 습성이 있기 때문에 쌍둥이로 낳는 사람도 있긴 있지.

내가 나라는 습성, 각각. 한마음에 모든 것이 돌아간다는 이치를 모르고 각각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숫자를 많이 낳죠? 알도 많이 낳고 새끼들도 많이 낳고, 이런 거는 벌써 내 마음속에 흐르는 피의 그 생명들이 내가 나라고 하고 싸우면서 서로 나오거든. 서로 나와! 양보심이 없어! 양보심이 없으니깐 그냥 나올 수밖에. 다섯도 좋고 넷도 좋고 열도 좋아. 그러나 인간이라 하면 양보성이야. ‘당신에게 모든 걸 다 주리다’ 하는 양보성이 있어. 그래서 불성이라 할지라도, 다 같은 생명이라 할지라도 독특한 생명이다 이거야. 고등 생명이다 이거야. 고등 동물이다 이거지. 생명은 다 마찬가지지만 차원이 말이야.

내가 어디로 끌고 가는지 모르겠네, 말을. 사방팔방으로 길이 있어서 이리로도 들어갔다가 저리로도 들어갔다가 이러거든, 그냥. 그러니, 하하하, 양해하시고 깊이 잘 들어 주세요. 그 뜻만 알면 되니까요. 나는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기웃거리면서 얘길 하더라도 듣는 여러분이 잘 들으셔야 합니다. 골목골목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전력에 바로 전부 가설이 돼 있으니까요. 그걸 법망이라고 한답니다. 이 공중의 법망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잘 들으세요. 어느 골목을 들어갔었는지 모르겠네요. 하하하.

그래서 생명 자체가 그렇게 묘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을, 한 생각을 잘못하느냐 잘하느냐에 의해서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잠재의식 속에, 카세트에 얽히고설킨 게 그냥 몰락 벗어지는 겁니다. 벗어지느냐, 더 지지하게 짊어지고 다니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뭐가 그렇게 원통해서 놓지 못하십니까? 우리가 뭐가 원통합니까? 이 몸뚱이가 공(空)해서 한 찰나에 살다가 한 찰나에 구름이 흩어지듯 흩어지는 몸뚱이, 내일 죽으면 어떻고 오늘 죽으면 어떻습니까? 나라는 욕심 때문에 모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라는 욕심 때문에. 나라는 욕심이 없다면 싱그럽게 사실 수 있을 텐데, 한 찰나 찰나 사람이 넓게 볼 수 있고, 넓게 들을 수 있고, 넓게 일할 수 있고 지혜의 샘물은 골목골목에서, 그 샘물이 말입니다, 솟아 흐르듯이 좋은데 말입니다. 싱싱하고 좋은데. 이걸 모르시고선 자꾸 몸 하나에 끄달리니 전체에 끄달릴 수밖에요.

지금 여러분이 사는 겁니까? 여러분 몸속에 수만 생명이 들어 있으면서 오르락내리락, 피를 통해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고 살 속에도 오르락내리락하고 돌고 있는데 여러분이 이렇게 움죽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시나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제일이라고 할까요? 그 중생들이 다 받쳐 줘서 내가 이렇게, 부처가 떡, 눈코가 의젓하게 달리고, 손발이 턱 있어서 평발을 해 가지곤 턱 딛고 다니면서, 그래 내가 제일이라고 하시겠어요? 누가 지금 그렇게 딛고 다니게 해 드리는데 상구보리라고만 하시겠습니까? 하화중생은 모르고요?

내 몸뚱이가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는 거고 부처가 있기 때문에 내 몸뚱이가 있는 겁니다. 내가 사는 거, 이것이 내가 태어난 태초고, 나로 태어난 이 몸뚱이가 있기 때문에 이게 화두지 남한테 ‘무(無)’ 자 화두를 받는다, ‘이 뭣고’ 화두를 받는다 해서 실과를 익게 할 수 있을까요? 남한테서 따 온 실과는 무르익지 못합니다. 딴 나무에서 따 온 실과이기 때문에, 제 나무에서 익지 못한 실과이기 때문에 이것은 시고 떫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냥 썩습니다. 내 나무에서, 잘났든 못났든 내 나무에서 실과가 무르익어야 만 가지 맛이 납니다. 만 가지 요리를 할 수가 있고요. 그러니 얼마나 좋은 법입니까. 그 도리를 아신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의 법을 그대로 쓰시고, 유의 법이 둘이 아니게끔 쓰시는 까닭에 이름해서 보살이라고 하고, 이름해서 법신(法身)이라고 하고, 이름해서 부처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지난번에 미국에 갔었습니다. 여러분한테 얘기도 차분하게 못했지만, 앵커리지에 처음에 가서 보니까 사는 게 너무도 급급하고 여유가 없었습니다. 부부지간에도 하루 종일 나갔다가 아침에 퇴근을 하고, 부부가 다 밥벌이를 하니까.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침에 나갔으면 저녁에 들어와서 같이 오순도순 애들하고 밥도 먹고 그래야 사는 맛이 있지 않습니까? 이거는 애들 따로 남편 따로 아내 따로….

그러니 내가 보기는 여유가 없어 보였습니다. “당신네들은 이럭하고도 살고 싶소? 아니, 산다고 하오? 바쁘다는 생각이 안 들고 편안하오?” 하니까. “편안치는 못합니다.” 그래서, “그래도 부부지간에 애들하고 이렇게 하는데 참, 이것도 살맛나는 살림인가?” 내가 이러니까. “여기서는 이렇게 살아야만 하니 어떡합니까? 내가 아침에 밤일을 하러 나오면 남편은 낮에 나가니 일주일에 두 번 만나기 어렵답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또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다가도 낮에 같이 일을 나갈 수도 있고 밤에 또 같이 나갈 수도 있고 이렇답니다. 그러니 참, 나는 그렇게 좋은 줄 모르겠더라고요, 촌놈이 돼서 그런지.

애들도 그냥 한국말을 하는데 반말을 해요. 아예 반말이에요. 그걸 어떻게 말을 해야 되죠? 외국말이 반말이라고 그래야 되나 한국말이 반말이라고 그래야 되나? 하하. 그저 모두 반말이에요. 모두 한국말을 하면서도 반말을 해요. 외국 사람이라면 그건 그렇다고 보지만 아, 이건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하는데 그렇게 반말을 하니 그게 되겠어요? 그래서 한국 사람이라면 지조가 있어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 본위를 따라서 지조가 있어야지 그렇게 지조가 없어서 쓰겠느냐고 그랬습니다. 그게 왜 지조가 없느냐고 합디다. 그래서 아니, 늙은이를 봐도 “이랬어, 저랬어” 하고 애를 봐도 “이랬어, 저랬어” 하니, 이게 있을 수가 있느냐 이거야. 이런 지조가 없는 사람이 어딨느냐고 그랬습니다. 한국 사람 중에 이런 지조 없는 사람 난 못 봤다고 그랬죠. 그랬더니 그게 습관이 돼서 그렇답니다. 그러니까 “그걸 하나하나 고쳐 나가려면 스님이 오래 계셔 주셔야 될 겁니다.” 이러는 거라. 아니, 스님이 그걸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말을 가르칩니까?

그랬는데 거기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아, 그런데 미국 사람이, 거짓말 보태서요, 100명입니다. 그럼 50명이죠? 하하하. 그렇게 왔는데 거기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외국 사람이 몇 명도 어려울 텐데 한 50명이 왔다고 합디다. 모두 합해서 그저 한 60명, 70명 되는데 말이에요, 통역해 줄 사람이 있어야지요. 영어는 잘하는데 말입니다. 불교 용어를 모르니까 내 말을 받아서 통역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또 쉽게 말을 하는데도 그래요, 글쎄. 어렵게나 뭐 말합니까, 어디? 내가 본래 그렇게 거드름 피우는 한문을 모르기 때문에 더군다나 아주 쉽죠. 아, 그랬는데 통역을 해 주지 못하게 되니까 어떡합니까? 그래서 옆의 사람한테 나는 그냥 한국 사람만 듣게 할 테니 너는 책을 읽고 종이에 써 가지고 영어로 하라 그랬죠. 아, 그럭할 수밖에 없죠. 어떡합니까?

그래서 잠깐 하고 나왔는데 이 외국 사람들이, 나는 키가 작고 외국 사람들은 크지 않습니까? 이걸 어떡합니까, 또. 아, 나오는데 보니까 그 사람들 어깨에도 차지 않는 겁니다. 하하하. 한편으로는 생각하니 참 기가 막힌 일이지마는 그래도 조그마한 고추가 매운, 톡 쏘는 기운이 있으니 ‘너, 맛 좀 봐라.’ 그랬죠. 그랬더니 아니나 달라요? 아, 키스를 하려고 덤비지 않습니까. 하하하. 아, 이 머리가 빡빡 깎였으니까 키스하기 얼마나 좋습니까? 머리가 있으니 걱정입니까? 그냥 내려다보고 키스하면 됐지. 하하하. 참, 우스운 일이 많죠? 그래서 이 머리는 피하고 미국 여자들하고는 여기 이마에다가 했죠, 할 수 없이 여기다가.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속에서 웃음이 나고 한편으로는 참, 종류라는 게 어떻게 이렇게 여러 가지로 돼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도 뭐, 키 큰 사람 부럽지도 않았지만 그 사람네들도 키 작은 거 부럽지 않았을 겁니다. 역시 피차에 마찬가지니까요. 하하하.

그러고 나와서 이제 음식점에 갔습니다. 아, 그런데 음식점에 데리고 간 한국 사람더러 하는 소리가, 그 사람은 우리보다 키가 컸습니다. 그랬는데 뭐라 그러느냐 하면 음식점 주인이 미국 사람인데 당신 조카들이냐고 그러거든요. 아, 이거 또 낭패 아닙니까? 거기는 머리를 깎은 사람이 없으니까. 승려라는 것도 모르는 그런 처지에서 볼 땐 그럴 수밖에요. 아, 조카들이 한국에서 왔느냐고, 코리아에서 왔느냐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그이가 또, 그 뭐라고 말을 합니까? 스님네들을 모르니까요. 듣고선 우리를 안내하던 그 사람이 우스워 죽겠다고 해요. 우리는 그 소리를 못 알아듣고 말입니다, “뭐라 그래?” 그러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아, 그러니, 허허허, 얼마나 우습습니까. ‘야, 머리를 깎고 조그맣고 그러니까 조카들인 줄 알았구나!’ 하하하.

그럭하고 한 가지 또 우스운 게 뭐냐 하면은, ‘혜월’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미국 닥터 ‘웨이버’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한테 아침에는 6시부터 6시 반까지 좌선을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정각 6시면 오는 거예요. 그런데 앉아서 좌선을 하다가 뒤를 돌아다보고 싶어 돌아다보니까 글쎄,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리를 쪽 뻗고 어깨를 이렇게 올리고서는 앉아 있습니다. 그 긴 다리를 쭉 뻗고요. 하하하. 아휴 참, 그 꼴이라니 그거 참 볼 만하더군요.

그렇지만 몸뚱이는 그렇게 뻗었다 할지라도 뻗은 사이가 없고, 마음이 아리따웁고 그렇게 알려고 애를 써 주는 그 마음씨가 고왔단 말입니다. 그래서 쳐다보고선 싱긋이 웃고는 이렇게 고개를 돌리면서 참 좋았습니다. 왜 기뻤느냐? 비록 다리가 아파서 구부릴 수가 없어서 뻗었으나 마음으로서는 내가 꼭 저 법을 배워야겠다는 그 일념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차를 갖다 주는데 찻잔을 이렇게 보면서 먹고선 (양손으로 몸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려 보이시면서) 이렇게 해 가지고선 뒤를 이렇게 손을 (오른손으로 똥을 누듯이 보이시고) 이렇게 해 가지고 이렇게 해 버렸더니, 먹고 싸는 걸 (오른손 주먹으로 입을 짚어 보이신 후, 똥을 누듯이 보이시고) 말하는 건 줄 알았어요. 하하하. 그래 먹고 싸는 걸 알았으니 그쯤 알렸으면 되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인간은 먹고 싸는 거다.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일체 만물, 일체가 다 먹고 싸는 거다. 그러니 여기다가 많이 두지 말아라. 이렇게 싸 버려라.” 이랬거든요. 그랬더니, 그것이 아주 좋다는 겁니다. “하!”(양 손으로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이러면서 아주 스님네들이 좋다고 이러면서, “하!”(양손으로 몸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려 보이시며) 이러면서 이러면서, 이러면서(오른손으로 똥을 싸듯이 보이시며), 하하하. 그리고 그 큰 몸에 과일을 아침 여섯 시면은 꼭 서너 개씩 담아서 들고 옵니다, 꽃도 들고 오고.

내년에는 한국에 나온다고 합디다. 그러니 미국 사람들이 몇이나, 대여섯 사람 올는지 몰라도 나온다고 그러니까 나오라고 그랬지 어떡합니까? 오지 말라고 그럴 수가 있나요? “한국 구경 했느냐?” 그러니까, 거기 있는 사람 통역을 들이대서, 한국 구경 했느냐니까 “나는 한국 구경 한 번도 못했다.” 그래요. 이 자리에 나서 이 자리에 그냥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랬어요. “당신네들보다 우리가 낫다.” 그랬어요. 나는 그래도 여기 왔지 않느냐 이거야. 하하하. 그러니깐 그렇다고요, 우스워 죽겠다고. 그리고 거기 설산을 구경시켜 주는데, 우리 저 앞산 보여 주는 것밖에 안 돼요. 그것도 좋다고요, 아이구, 넓기는 하지만 그것도 좋다고 구경을 시키는 거예요. 차를 타고 올라가면서 보니까. 그런데도 그 사람은 그냥 환희심이 나서…, 구경시키는 게 좋아서. 그래서 ‘이다음에 한국에 오면 너 설악산 한번 구경해 봐라. 네가 놀라서 자빠질 거다.’ 속으로 이러고 했죠. 하하하.

그리고 거기서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있는데 어느 스님이 초청을 해서 그 절에 가서 설법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께서, 스님이니까 공안을 가지고 공부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또 거기 주장자가 기다란 게 있습디다. 법상이 이렇게 얕은데, 거기 안 올라간다고 그러니까 굳이 큰스님이 거기 올라가셔야 된다고 올라가라고 그러는 겁니다. 크지를 않아서, 작으니깐 다행이죠. 책상 같은 데 올라가기에는. 하하하. 그래 덩그머니 홀랑 올라앉아서 그 기다란, 나보다 더 큰 주장자를 가지고 한 번 (오른손 주먹으로 내리쳐 보이시며) 내리쳤죠. 하하하. 치곤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도량에서 스님들이 사는데, 예전에는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래서요?” 그러거든요. 그래서 “이 동네 사람이 항상 소를 가져가 논을 갈아 줬는데 아, 몸이 아파서 논을 갈지 못한다고 통지가 왔으니 너, 소를 가지고 와서 우리가 쟁기를 메고 논을 갈아야겠다.” 하고 주지 스님이 했답니다. 그러니까 “네, 그래서요?” 그러거든. 그래서 그랬죠. “그래서 제자를 한 명 보냈더니만 아, 제자가 가서 영 소를 가져오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그래 나중에 빈손으로 왔기에 물었더니 “오다가 하도 배가 고파 동네 사람을 모아 놓고선, 네 기둥을 박고 네 다리를 매 가지고선 홀딱 다 구워 먹었습니다.” 하는 게 아닙니까. 구워 먹고서는 절에 어슬렁어슬렁 왔으니까. “그래서요?” 구워 먹고 오니까는, 소는 안 가져오고 여태 뭐하고 있다가 이제 오느냐고 그러는 바람에, 올 때 하도 배가 고파서 동네 사람 모아 놓고 다 먹었다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구워 먹었느냐 그래서 풀 갖다가 모아 놓고선 구워 먹었다고 했거든요. 그러면서 네 기둥을 박고 네 발을 매고선 거기다가 나무를 쌓고선 구워 먹었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한 사형이 있다 하는 소리가 아이구, 이제는 큰일 났다고, 응? 그래, “동네에서 소 구워 먹었다고 고을에서 그냥 발칵 소문이 나면 이거 큰 문제가 생긴다고 그냥 막 팔딱팔딱 뛰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래서요?” “그래서 뛰니까, 또 사형이 하나 있다 하는 소리가 ‘아, 좀 이르면 어떤가?’ 하거든요. 그런데 또 한 스님이 있다 하는 소리가 ‘아, 그럼 좀 더디면 어떤가?’ 그러거든요. 그러니 만약에 여러분이 그 자리에 계신 스님이라면 뭐라고 말씀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까, 그렇게 대답을 못한 그분이 그냥, 그냥 고개를 숙여 보이시며 아무 소리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 여러분 중에서 거기의, 그 도량의 스님이시라면 뭐라고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그 소 구워 먹은 거 말입니다. 그런데 스님은 또 구워 먹었다는 놈은 누구고 좀 이르면 어떠냐고 했고 좀 더디면 어떠냐고 했으니 그건 무슨 까닭이냔 말입니다. 그 무슨 까닭일까요? 여러분이 만약에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뭐라고 했을까요? 즉 말하자면 은사 스님으로 거기 계셨더라면 뭐라고 칭찬을 해 주셨을까요, 야단을 쳤을까요? 어떠한 말을 했을까? 어떠한 대답을 했을까?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게 무슨 연고입니까?

질문하실 거 없습니까?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칠까요?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7년 11월 15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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