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청계사 입구의 단풍 풍경이 가슴에 찡하게 다가온다. 멀리서 보면 붉은색, 노란색, 갈색 등이 한 색으로 묘합(妙合)되어 보이고, 가까이 보면 각각 다른 색의 저고리를 입고 바람과 함께 춤추고 있다. 단풍 색깔의 어울림이 다른 듯하면서 같고, 같은 듯하면서 다르다. 소나무는 최초의 엽록체를 포기하지 않고 초록을 고집하고 있고. 원효 스님의 화쟁사상을 풍경화로 그리면 이런 단풍의 모습이 아닐까?

20여 년 전 학생들과 답사여행 중 설악산의 단풍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공원을 관리하고 안내하는 분의 이야기가 새삼 기억난다. “설악산은 거대한 정원이에요. 저절로 아름다운 단풍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정원사의 도움이 없으면 아름다운 단풍을 만들 수 없어요. 태양도 정원사이고 비도 정원사예요. 많은 정원사 중에서 제일 중요한 정원사가 사람이에요. 이제 학생 여러분은 설악산의 정원사가 되는 자세를 가져야 해요.” 그때 참으로 멋지게 말씀하시는구나 감탄하였다.

방영준 성신여대 명예교수.

좋은 정원은 정원사 능력에 달려

내버려 두지 않고 스스로 책임져

 

현대 위기는 기계적 접근서 비롯

선의 갖고 ‘정원형 지성’ 키워야

 

대한민국·조계종 새 출발 다짐

위대한 정원사 거듭나기 위해선

서로 예의 갖추고 신뢰 쌓아야

그 후 나는 단풍을 보면 정원과 정원사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했는데, 지금은 더욱 의미 있고 매력적인 단어로 인식하고 있다. 그 계기는 에릭 리우와 닉 하나우어가 공저한 조그마한 책자 <민주주의 정원 (The Gardens of Democracy)>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정원과 정원사’라는 은유를 통해 민주주의가 꽃피고 경제적 번영을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인류가 겪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도구로 ‘기계형 지성’과 ‘정원형 지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기계형 지성은 합리적인 동물로서의 인간과 완벽한 방정식으로 운용되는 세계를 믿는다. 반면에 정원형 지성은 비합리적이지만 선의를 가진 인간과 생태계로서 변화하고 살아 생동하는 세계를 믿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다양한 위기는 기계형 지성의 산물이라고 보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원형 지성을 제시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세상을 하나의 큰 정원으로 보면서 정원사의 자세와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훌륭한 정원사는 절대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자신의 정원에 대해 책임을 진다. 날씨와 환경의 변화를 미리 예측하고, 뿌린 씨앗을 살피고 비료를 주고 토양을 관리한다.

또한 흙을 갈아엎고 여러 식물을 바꿔가며 심기도 한다. 따라서 훌륭한 정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고 정원 공동체를 위한 따뜻하고 강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붓다의 연기 사상을 응용한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에 금방 공감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리라. 정원은 바로 ‘연기의 광장’이고 훌륭한 정원사는 연기의 지혜를 깨닫고 이를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보살임이 분명하다. ‘정원형 지성’은 바로 연기법의 사유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이제 대한민국은 새로운 텃밭을 일구고자 하고 있고, 조계종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어떤 정원을 만들 것인가는 바로 정원사의 자질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매우 특이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 위 책의 저자들은 ‘위대한 정원사’가 되기 위한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예의를 잃지 말자”는 것을 마지막으로 넣고 있다. 예의는 진정한 시민의식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예의는 시민사회의 형성에 있어 가장 생명력 있고 유연한 힘으로써 서로에 대한 신뢰를 낳는 원천이라고 본다.

지금 한국사회는 서로의 폐부를 찌르는 칼날 같은 용어와 행태들이 난무하고 있다. 예의 없는 정원사가 싸우고 있는 한 아름답고 멋진 정원을 어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찬란한 가을을 보내면서 새삼 아름다운 단풍을 만드는 정원사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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