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사 가는 길

인도의 옛 도시 라즈기르, 왕사성이라고도 부르는 이 도시를 다섯 봉우리의 산이 둘러쌌다. 오대산이다. 월정사가 있는 강원도 오대산의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어떤 이는 주장한다. 오대산은 청량산으로도 부른다. 이름이 다르지만 근본을 따지면 문수신앙이란 같은 갈래에서 나왔다. 문수산, 길상산, 오대산, 청량산, 사자산도 각각 이름과 위치가 다르지만 문수보살이라는 같은 문화적 갈래에서 나와 공간적으로 확산된 산이다.

문수보살 기운서린 성산

장인봉은 보살봉으로 불려

가을명소 속 불교명찰 눈길

문수신앙이 널리 퍼진 우리나라는 오대산의 원래 이름인 청량산이 전국 각지에 퍼져 있다. 경북 봉화의 청량산, 인천 청량산, 경기 안성 청량산, 남한산 청량산, 경남 창원 청량산, 전북 완주 청량산, 고창 청량산이 그것이다.

청량리 유곽들이 헐리고 그 자리에 초고층 주거단지가 들어선다는 소문이다. 물론 손꼽는 명산이라는 봉화 청량산도 산불이 나서 순식간에 폐허로 변할 수 있다. 실제로 청량산 청량사가 폐사됐던 전력이 있으니, 퇴계 이황이 노래한 ‘청량산가’와 더불어 무상을 실감할 뿐이다.

청량산 열두 봉우리(六六峯)를 아는 이

나와 흰 갈매기뿐

흰 갈매기야 말하겠느냐

못 믿을 것이 복숭아꽃이로다

복숭아꽃아 물 따라 가지 마라

배 타고 고기 잡는 이 알까 두렵구나.

청량산이 세상에 알려져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 자신이 누리는 즐거움이 사라질까 염려한 이황의 시도 불타오르는 우리나라의 가을을 극복하진 못했다. 가을이면 세상의 모든 산이 단풍으로 물들지만 청량산의 가을 단풍처럼 눈이 부시지 않기 때문이고, 그걸 알고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황의 청량산 사랑은 그의 호 ‘청량산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청량산에 자주 올랐던 건 에베레스트에 오른 힐러리처럼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청량산이 가문의 산으로, 5대 고조부 이자수가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받은 봉산(封山)이었다.

이황은 부패하고 문란한 조정과 싸우는 대신 초야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그런 그에게 조정은 기이하게도 중요한 관직을 차례차례 하사했다. 정권의 고비 때마다 그랬고, 그랬기에 조정과 초야의 청량산을 큰집과 작은집 드나들 듯했다. 이황은 도산서원을 마련하기 전까지 ‘청량정사’라는 집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지금도 청량사 부근에 남아 있다.

청량산이 퇴계학의 성지로 후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연유이다.

이황이 청량산에 빠져 살았을 무렵 청량사는 어땠을까. 청량사는 우리나라의 적지 않은 절들이 그렇듯이 창건주가 원효 대사라고도 하고 의상 대사라고도 하는 절이다. 당시 33개의 부속건물을 갖춘 대사찰이었으나 조선조에는 유생들의 탄압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유리보전(琉璃寶殿)과 응진전(應眞殿)만 겨우 살아남은 폐사로 전락했다. 청량사가 그나마 명맥을 이은 건 송광사 16국사의 마지막 스님인 법장 고봉선사의 중창 덕분이었다.

입석에서 등산로를 따라 30분 정도 오르면 절벽에 기대앉은 응진전을 만난다. 절벽의 담쟁이가 타들어가는 밧줄처럼 붉었다. 전각에 가까이 가니 열린 문 사이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이 보인다.

보라, 6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두 사람의 사랑은 응진전을 배경으로 단풍처럼 타오른다. 그 어떤 사랑도 신화가 될 수 없는 요즘 세태 때문인지 응진전을 떠나는 발길이 무거웠다.

산안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천천히 계곡을 떠다녔다. 그 모습이 경상도 한량들이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추는 학춤 닮았다. 안개가 끼지 않는 날, 어풍대에서 김생굴 사이에서 V자를 그리는 골짜기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깊고, 벼랑에 뻗어 내린 울긋불긋한 단풍까지 더해져 지독한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김생굴은 통일신라 서예가인 김생이 수학했던 바위굴로 경일봉 아래 있다. 평민 김생은 이 굴에서 10년 동안 글씨를 연마했다. 김생굴에서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김생체의 힘찬 기운을 담은 폭포가 벼랑을 타고 떨어진다. 신분을 극복한 당대의 명필 김생이 쓴 불경 40여 권을 청량산 연대사(蓮臺寺)란 절이 보관했었는데, 어느 땐가 수수께끼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청량산에는 김생 말고도 신라의 최치원과 관련된 유적이 산재한다. 최치원이 수도했다는 풍혈대,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을 마시고 총명해졌다는 총명수가 그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총명수는 내려다보기조차 민망한 탁류로 변해버렸다.

청량산은 안개가 자주 출몰하는 산이다. 주세붕이 쓴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서 ‘수목과 안개가 서로 어울려 마치 그림 같은 풍경’이라고 묘사했거니와, 자소봉으로 오르는 산길은 올 때마다 항상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에 넋이 팔려 길을 잃은 듯 걷다 보니 어느새 자소봉 앞이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철계단을 밟아 보살봉이라고도 부르는 자소봉에 올랐다. 북쪽으로는 소백산이 있는 백두대간이 시야에 닿고, 동으로는 일월산, 남으로는 축융봉이 마주 보이는 봉우리이다. 일찍이 주세붕이 묘사한 풍경도 고스란히 발아래 펼쳐진다.

줄지어 선 봉우리는 물고기의 비늘과 같고, 층층이 늘어선 벼랑은 꼿꼿하기만 하여 정녕 단아하고 곧은 선비와 같다.

응진전이 있는 금탑봉, 김생굴이 있는 경일봉뿐 아니라, 공민왕이 쌓은 청량산성이 있는 축융봉, 의상이 수도했다는 장인봉, 외장인봉, 자소봉, 선학봉, 자란봉, 연화봉, 연적봉, 향로봉, 탁필봉 등 ‘육육봉’이라 부르는 12개 봉우리의 이름을 주세붕이 모두 지었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주세붕을 빼놓고 봉화 청량산을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

유감스러운 건 이데올로기가 자연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주세붕은 불교를 극도로 혐오하여 불교적인 징표를 드러냈던 봉우리 이름을 모조리 유교식으로 바꿔버렸지만, 산 이름 자체는 개명하지 못했다. 문수보살의 청량산은 보현보살의 아미산, 관음보살의 보타낙가산과 함께 인도의 대표적인 성산으로 꼽는다.

풍기 군수 주세붕이 문서에서 모조리 지워버렸어도 사람의 입은 여전히 장인봉 대신 의상봉, 자소봉 대신 보살봉이라 불러 불교를 상기한다.

자소봉에서 잠시 쉬고서는 탁필봉으로 건너갔다. 거대한 입석들이 삐죽삐죽 돋아난 봉우리다. 생긴 모습이 붓끝을 모아 놓았대서 필봉이라 하는데 역시 주세붕이 지은 이름이다.

탁필봉에서 연적봉을 거쳐 뒤실고개 쪽으로 향한다. 뒤실고개 능선에서 직진하면 하늘다리가 나타나고, 왼편으로 하산하면 청량사 코스다.

뒤실고개 능선을 지나면 자란봉이다. 자란봉 건너편은 선학봉, 이 두 봉우리 사이에 하늘다리가 놓여있다. 2008년에 완공된 청량산 하늘다리는 길이가 90m로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악현수교량이다. 등산객들이 몰리는 가을에는 아무리 조심스레 걸어도 다리가 출렁거리고, 그 바람에 하늘다리 위에서는 비명과 웃음이 그칠 새 없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게 하늘다리는 하나의 선택이다. 멀리서 온 외지인이라면 하늘다리 앞에서 선택은 하나 더 늘어난다. 하늘다리를 건너 선학봉과 장인봉을 가기엔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다시금 길을 권하겠다. 순전히 불교순례를 위해 청량산에 왔다면 되돌아서 청량사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라고. 물론 청량산에서 가장 높은 장인봉에 오르면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 줄기를 눈에 담을 수 있다.

선택은 나도 해야 했고, 나는 청량사를 향해 내리막길을 걸었다. 청량사가 열두 봉우리로 둘러싸여 연꽃의 꽃술 자리에 자리 잡았다는 비유를 어디서 들은 것도 같다. 청량사는 내청량사와 외청량사, 두 곳으로 나눠 부른다. 내청량사는 연화봉 아래 유리보전이 본전이고, 외청량사는 금탑봉 아래 응진전이 본전이다. 이 두 절은 꽤 거리를 두고 떨어진 건, 그 사이에 있던 전각들이 역사적 시련을 겪어 폐사됐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변한다지만,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의 가을이다. 2012년 가을, 청량산이 가을의 명소임을 청량사도 아는지 사중 곳곳에 심어 놓은 단풍나무가 불꽃나무가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걷는길 : 입석 - 응진전 - 어풍대 - 김생굴 - 자소봉 - 탁필봉 - 연적봉 - 자란봉 - 뒤실고개 - 청량사

거리와 시간 : 8km 안팎으로 3시간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