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평범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에 대해서다. 둘이 아닌 하나를 거리를 넓혀 속세(俗世)와 속세를 저버린 뜻으로 과대포장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출가 수행자는 항시 우월한 존재로, 재가 수행자는 열등한 무리로 묶어두는 잘못을 불러들이고 있다.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닌 하나의 오늘의 현장을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출가자(出家者)인 스님과 재가자(在家者)인 신도가 둘로 나뉠 수 없는 하나의 불제자(佛弟子)집단이다.

출·재가, 나뉠 수 없는 불제자 집단
차별없는 평등의 수행체로 거듭나야


우월과 열등의 선입견이 허락되지 않을 뿐더러 옷의 색깔과 모양의 형상에 따라 귀의처(歸依處)와 귀의자(歸依者)로 정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불교에서는 마치 봉건시대의 계급사회처럼 출가수행자는 높은 곳에 재가수행자는 낮은 곳에서 헤매는 해프닝을 연출하고 있다. 젊은 스님은 설법할 때 높은 법상(法床)에 오르는 것이 일상화 되어있고 학덕 깊은 노 교수는 서 있는 자세로 설법해야 하는 이상한 나라의 말뚝 박힌 모습이 정례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찰에서 어떤 행사를 치룰 경우에도 젊디젊은 주지 스님은 당연하게 독상을 차지해 식사하고 노 보살과 늙은 거사는 대중과 어울려 좁게 앉아 한 끼니를 스스로 찾아 챙겨야한다. 거기다가 스님의 설법엔 삼귀의(三歸依)와 청법가(請法歌)등이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 있지만 교수나 거사의 설법에는 복잡한 절차가 싹 뚝 잘려 간소하게 가볍게 치러진다.

법당 안에는 주지스님이 앉는 전용방석이 색깔과 크기가 다르게 촌티 나게 버티고 있고 신도는 주지 스님께 삼배(三拜)하는 습관이 질기게도 관행처럼 정례화 되어 있다. 귀의삼보(歸依三寶)에서 귀경삼보(歸敬三寶)로 공감대를 넓혀 가야한다.

대접받는 문화가 뿌리를 깊게 내려 스님들은 의례히 받는 체질이 속물근성으로 굳어지며 미안함과 감사함, 고마움을 잊고 있다. 시대에 뒤진 마인드(mind)가 사찰 에서는 살아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부처는 깨달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출가자나 재가자는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같은 길의 불제자(佛弟子)이다. 승가(僧家)의 의미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니의 집단을 칭함이다.

남자 스님과 여자 스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가 차별과 우열이 없이 하나의 수행집단으로 화합과 평등을 지향하며 행복과 자유의 실현을 실천하는데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섬겨야할 신(神)이 없고 구원을 약속하는 메시아(Messiah)가 없다. 당연히 신(神)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체 따위가 있을 수 없고 화복(禍福)을 해결하는 해결사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자존심 없이 떳떳치 않게 사찰경제를 앞세우며 운명론적으로 기우는 기복신앙을 상품화 한다든지 주술적 부끄러운 몸짓으로 신앙을 거래하는 일은 없었는지 살피고 또 살피며 뼈를 깍는 자가 반성이 있어야한다.

무당들이 부처님의 형상을 모셔둔 곳을 법당이라 부르지 않고 단순하게 불당이라 칭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찰의 법당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 게하는 가르침이 울려 퍼져야 이름 그대로 법당이 되는 것이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내용의 영험설화를 언제까지 풀어대며 당당치 못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 해당 사찰과 스님들에게 묻고 싶다. 비구(比丘)는 법(法)을 찾아 수행하는 무소유(無所有)를 의미한다. 비우고 버리며 개운하게 나누는 삶을 실천해야한다.

한 평생을 수행했다는 스님들이 명예 부근에서 얼씬거리고 모으고 챙기는 일로 헐떡이며 흔들린다면 이들 무리는 해탈은 커녕 속물근성 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제도 받아야할 업덩이 중생일터.

비우면 편안하다. 버리면 개운하다. 나누면 기쁘다. 이 평범한 일상의 즐거움으로 신도들과 맞절하며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닌 하나로 살 일이다. 꾸미고 드러내며 감추는 일이 줄어들게, 진솔하게 당당하게 개운하게 행복과 자유 누리며 살 일이다. 발길 닿는 곳이 정토(淨土)일 수 있게 오늘의 주인공으로 남도 속이고 자신도 속이는 생각의 윤회를 줄이며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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