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사이로 기웃기웃 보이는 한가위 달이 밝고 크신 모습이 아니다. 열흘의 긴 휴일이 주어 졌지만 어떤 예비적 공포에 싸여 찜찜한 불안이 서린 연휴기간이었다. 마치 온 몸에 미열을 느끼는 기분이다.

북한은 또 다른 신형 ICBM 발사를 준비하고 있다 하고, 트럼프 미대통령은 ‘지금은 폭풍전야의 고요’라고 하면서 대북군사행동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 모두가 국가와 국가 간의 갈등관계에서 나오는 고통들이다.
휴일 기간에 영화 ‘남한산성’을 봤다. 관람 내내 답답한 마음과 분노가 일렁거렸다. 그 분노는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왕과 위정자에 대한 분노이다.

임진왜란 때 왕과 위정자에 느낀 분노가 새삼 기억난다. 그렇게 부끄럽게 왜란을 겪은 조선이 왜 지속되어야 하는가? 새로운 개국의 기운은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 국가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이 다시 일어난다.
 

연휴기간 관람한 영화 ‘남한산성’
내내 답답함과 분노가 일렁였다

영화서 청나라 앞잡이의 한마디
“조선서 노비는 사람이 아니다”
‘국가란 무엇인가’는 정치학 난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서
저자는 정치적 마음 수행을 강조
수행을 통해 정치 바로 세워야



국가를 지킨다는 명분아래 만들어진 만리장성에 얼마나 많은 민중들의 슬픔과 비극이 쌓여 있을까. 그 만리장성이 지금은 사람들을 감탄케 하는 관광상품이 되어 있으니 이를 어쩌라.

‘국가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정치학의 제일 큰 난제이다. 국가의 문제는 우리 삶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실천적인 물음이다. 국가가 도덕적인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이며, 또한 국가 권력의 행사는 어떻게 정당하게 실천하느냐가 중요한 물음이다. 그러나 오호 통재라. 역사상 도덕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한 국가가 얼마나 있었던가?

‘남한산성’에서 조선이라는 국가에서 제일 고통을 당한 사람이 대장장이 ‘날쇠’이다. 명분과 절의를 강조하는 잘난 정승은 ‘날쇠’에게 남한산성의 임금을 구하라는 칙명을 성 밖의 근왕군에게 전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긴다.

그러나 오히려 근왕병 지휘관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를 겪는다. ‘날쇠’가 죽임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말했듯 벼슬아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나라군의 통역을 맡고 있는 정명수는 조선 사람이 왜 청나라의 앞잡이가 됐느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조선에서 노비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이 글을 쓰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감동 받아 신입생의 ‘정치 교육론’에 교재로 썼던 책 파커 파머(Parker Palmer)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의 내용이 생각난다. 민주주의의 마음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가 저자의 문제인식이다. 파머는 내면과 외면을 분리시키는 생각이 오늘의 정치와 민주주의를 왜곡시키는 뿌리라고 보면서 일종의 정치적 마음수행을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자아와 세계라고 이해하는 모든 것이 마음이라고 불리는 중심부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자신이 아는 바에 따라 인간적으로 행동할 용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용기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기백 이상의 것을 뜻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음이 무너지고 찢어질 때 체념하지 않고 자아의 중심을 붙들 수 있어야 한다.

당위와 현실 사이의 비극적 간극을 가슴에 품고 견디는 ‘비통한 자들(the broken hearted)’이 되면서도 ‘부서져 열리는(broken open)’ 마음이 요구된다. 그래서 선악의 구도가 명확하지 않고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내면 풍경을 응시하면서 그 ‘애매함과 긴장’을 끌어안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적 연대와 공공적 책임을 배양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아름다운 나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리라.

파머는 붓다의 정치철학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공부를 하는 수행자가 정치와 민주주의를 바로 세운다. 마지막 영화 장면, 살아남은 ‘날쇠’는 풍구를 돌리면서 쇠를 달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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