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음을 꾸짖지 않는다

원학스님 펴냄|모과나무 펴냄|1만 8천원

중국 남송시대 야부선사 착어와 송 번역

1996년 첫 출간 이후 윤문 보완해 개정

〈금강경야부송〉을 삼이원학(三耳圓學) 스님〈사진〉이 번역 해설해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음을 꾸짖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한국 불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중 하나가 〈금강경〉이다. 이 내용을 선적 체험에 의한 견해를 붙이고 경전의 뜻을 정형화된 선시로 읊은 야부선사(冶父禪師)의 착어(著語)와 송(頌)이 〈금강경야부송〉으로 전해진다. 이는 그 뜻이 높고 깊어서 예로부터 선학을 공부하는 수행자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수행 지침서가 돼왔다. 야부선사의 생몰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다만 남송(南宋) 시대의 인물로서 정인계성(淨因繼成, 1101~1125)의 법을 이어 임제(臨濟)의 6세손이 된다.

원학 스님은 〈금강경야부송〉을 번역 해설하면서 인간이 당면한 고뇌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많은 지식이 아니라 ‘참지혜’라고 강조한다. 〈금강경〉은 중국불교에 있어서도 수많은 고승들이 주석을 달아 연구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설서가 나와 있다.

특히 금강경 해설서중 가장 어려운 것으로 알려진 야부송. 원학 스님이 1996년에 이어, 20년만에 다시 번역할 정도로 이 책에 천착하는 매력은 무엇일까? 우선 스님은 두 번에 걸쳐 출판하게 된 과정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도, 활자로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첫 출간 당시에는 가리방으로 긁어서 펴냈습니다. 그걸 전국 강원에 다 보내줬지요. 지금 기억하는 첫 출간 시기는 1996년보다 훨씬 이전입니다. 책을 펴내기 전, 범어사 강사시절 야부송의 내용만 뽑아서 기록하고 가르쳤지, 번역이 제대로 안됐었죠. 그래서 언제 기회가 된다면 번역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조계종 중앙종회 사무처장을 할 당시인 1996년에 갑자기 사정이 생겨 사표를 내고 조그만 암자를 지어놓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하루 30~40매에 해당하는 양을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1년만에 그 책을 완성한 것이 첫 출간입니다. 그 시절에는 한문을 많이 쓰던 시절이다 보니 한문 모르는 사람은 사실 이 책 읽기가 힘들었죠. 이후 강남 봉은사 주지 시절과 주지직을 내려놓고 나서도 금강경 야부송 법문을 한 2년동안 했죠. 신도들에게 인기가 많아 현대인들이 읽기 쉽게 고쳐서 다시 출판해야 겠다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이어 원학 스님은 20년 전 번역하고 지금 번역할 때 맛이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금강경의 내용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다가, 20년만에 다시 번역하니 금강경 내용을 정말로 모두 체험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금강경〉하면 모든 사람이 그 내용을 어느 정도는 알잖아요. 내가 이번에 다시 느낀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과 수보리의 대화가 다양하게 나오지만 간결히 줄여서 할 수 있는 내용이 뭘까 생각해 봤죠. 첫째는 긍정, 두 번째는 부정, 세 번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이름만 존재한다는 걸로 압축할 수 있었어요. 예를 들면 세계라 하면 세계가 아니고 이름만 세계일 뿐이고, 중생이라 하면 중생이 아니고 이름만 중생일 뿐이라는 것이죠. 이 말을 뒤집으면 현실의 세계, 즉 중생의 입장에서 보는것이 차이점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인 중생의 입장에선 중생이 중생이지 왜 중생이 아닙니까? 세계서 지위가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권세가 다르고 살아온 형태가 다 다른데 어떻게 이것을 아니라고 할 수 있겠냐는 것이죠. 그런데 그 다양한 현실속의 중생이라 우리가 이름 붙였지만, 부처의 세계서 보면 본래 다 부처다 이것이지요. 본래 부처지, 중생이라는 그 어리석음이 있다는 것은 부처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누군가가 이름 붙여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것도, 중생이 스스로 중생이라고 하는것도 아니고 부처가 스스로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중생과 부처를 나누게 됐을까요?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속에서의 차별이죠.

여기 있는 모든 것은 다 이름이 있습니다.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컵이 있지만, 이 컵이 없어져도 컵이라는 이름은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원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이름을 남겨야 할까요? 당연히 좋은 이름을 남겨야 겠죠. 역사 속 위인, 군자라는 분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계속 남겨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좋은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원학 스님의 〈금강경〉 법문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면 우리가 중생도 부처도 아니지만, 삶을 살아갈 때 마지막에 정말로 오랜 역사 속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이름으로 남아야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일러주셨고, 그 법문에 야부 스님이 송을 붙인 것이 야부송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뚜렷이 알 수 있습니다. 권력은 순간이죠. 영원한 것은 아름다운 이름이 남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중생의 입장도 되고 부처의 입장도 돼 봐야지, 어느 한쪽만 고집하면 안되죠."라고 강조했다.

주변으로부터 정인군자(正人君子)란 말을 듣는 원학 스님은 삼국유사의 성지 인각사 주지 를 맡고 있다. 종무행정의 이력도 화려하다. 조계종 총무원 재정국장, 문화부장, 총무부장, 중앙종회 사무처장, 제 10,11,12,15대 중앙종회의원, 봉은사, 조계사, 봉국사, 진주 연화사, 대구 용연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특히 2009년 총무부장을 맡았을 때 스스로 '삼이(三耳)'란 호를 지었다. “총무원 소임은 봉사하는 자리. 즉 머슴살이와 같은데 귀 밝은 머슴이 되기 위해서는 귀가 세 개쯤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2015년 봉은사 주지 소임을 끝으로 현재는 시골 암자서 다도회 모임을 주관해 매주 토요일 강의와 함께 인각사 일연선사의 복원 불사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각계 다인(茶人)들과 함께 초의문화제를 창립 발기해 초의선사의 다도정신을 계승하였고,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을 번역 해설한 〈향기로운 동다여 깨달음의 환희라네〉를 2014년에 출간했다. 1996년도에 번역 해설한 금강경 야부송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음을 꾸짖지 않는다〉를 윤문 보완해 이번에 개정 출간 했다.

이 책 제목인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음을 꾸짖지 않는다〉는 야부선사의 게송 가운데 지불책우(智不責愚)라는 말에서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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