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무엇에 탄식하는가

愛悲品第二十
若人不知身心常極苦所縛。則不能知他心中苦。無悲者無惡不作。若見他衰禍心不調軟。此人名極惡行者。若有重恩者何時能念。臨死之人雖有美藥以極苦。極行惡。無福德者得慈悲甘藥作極苦想。若人巨富多饒財寶。但自食취不與他人人所呵。雖有智慧多聞若無悲心。亦人之所譏呵。若見苦惱生難得悲心者非功德器。猶如破器不任盛水。有悲心者見苦生雖不能救濟。可不能歎言苦哉生。見生貪欲瞋에愚癡所病。生老病死之苦常苦之所惱逼。怪哉生墮是大苦。世間生身苦心苦。常結業之所破壞。嗚呼怪哉。世間生逼迫之苦。何有菩薩而不生悲。身住於流沒生死無窮可畏大苦海。


번역|애비품 제20
만약, 사람의 심신(心身)이 극심한 괴로움에 얽힌 줄 모르고 남의 마음에 괴로움도 능히 알지 못하면 자비심 없는 자이며, 악을 짓지 않음이 없습니다. 만약 남의 어려움을 보고 마음을 부드럽게 쓰지 못하면 이 사람을 극악한 사람이라 합니다. 만약 거듭 은혜로운 이라면 언제나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종에 있는 사람이 비록 좋은 약이 있어 극심한 고통을 벗어나려 해도 악행이 극심하면 복덕이 없는 이며, 자비의 감로 약을 얻어도 극심한 고통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거부에다 재물이 넉넉해도 자기만 먹고 타인에게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비난하는 바가 되듯이, 비록 지혜 있고 아는 게 많아도 만약 자비심이 없다면 역시 사람들의 지탄을 받습니다. 만약 고뇌하는 중생을 보고 자비심을 갖지 못한다면 공덕의 그릇이 되지 못하나니, 마치 깨진 그릇에 물을 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비심 있는 이라면 괴로운 중생을 보고 비록 구제할 수 없어도 중생에 대해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중생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병에 걸렸음을 보고 생로병사의 고통과 늘 괴로움에 얽혔음을 보면 “괴이하다. 중생은 큰 고통이 따르는구나. 세상의 중생은 몸과 마음의 고통에 항상 묶이고 업으로 무너지는 구나. 오호, 괴이하다” 합니다. 세상의 중생이 핍박 받는 고통에 어찌 보살이 자비심을 내지 않겠는지요. 몸은 생사에 달려가고 휩쓸리는 데 머무니 한없이 두려운 큰 고해(苦海)입니다.


해설|같은 하늘, 다른 모습이 우리네 살이다. 때론 소나기처럼 같은 장소에서 소잔등이 갈리듯 젖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사람도 같은 사람이지만 얼굴모양과 피부색이 다르듯 그 업식(業識)에 따라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고 생각하는 모양도 다르다. 문화는 나라와 인종과 생활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그 천차만별의 국토마다 천차만별의 부처가 출현하였으며, 또 그 국토의 차이에 따라 중생이 살았다.

이러한 차이와 차별의 세계에서 불이(不二)는 무엇일까? 어떤 이에게는 차별 없음을 강요하는 것이 부처님이나 보살이 말하는 자비라는 이름의 정신적 폭력은 아니던가?

“네 배부른 것만 생각하지 말고 배고픈 이를 생각하라”고 강요하는 건, 온갖 희생을 감수하며 아끼며 모았던 재물을 한 순간 헛것으로 치부하는 가진 자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괴로운 중생을 보고 같이 괴로워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하는 건,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여야만 하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에게는 더할 수 없는 폭력이 된다.

이쯤 되면 이제 선과 악은 가름할 길 없는 수렁이다. 이제 인생은 완벽한 고해(苦海)다. 사람은 진흙소가 되어 쉴 수 없는 세상에 던져져 쟁기질을 해야만 한다.

‘오호, 괴이하다(嗚呼怪哉).’ 세상의 중생은 고통에 묶이고 업에 무너지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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