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길상사 가는 길

자야 김영환의 또 다른 모습인 길상사 관음보살상. 종교화합을 위해 가톨릭 신자가 성모마리아를 닮은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다지만, 오히려 김영환의 애뜻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의 길을 또한 나는 걷고 싶다. 본래 절이나 교회를 찾는 사람의 마음이 그리 갈급하지 않으니, 길에서 게으름을 피운들 그 모습이 그리 어색할 리 없다. 발길 닿는 곳마다 꽃 피고 물 흐르는 길을,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간다면 직장에 출근하려고 지하철을 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방랑자 기다리는 애닳픔

자야 김영한을 빼닮고

설법전 밑 보살상에 남아

원통사 앞에 흐르는 백사실계곡

연애도 방랑과 같으니 남녀 사이에 무슨 목적이 개입하면 제아무리 빛나는 황금도 차가운 돌로 변하고 만다.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에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사랑만이 순수했던 방랑으로 오래, 소중히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그렇다. 길상사(吉祥寺) 를 찾을 때 당신은 이리저리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의 행로를 밟아야 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왜 쓰였는지 알면 길상사로 가는 길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당신은 그때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그림자와도 같은 연인을 데리고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백석의 나타샤가 길상사에 살았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영한이다.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을 어디서부터 추적할까? 나는 그 출발지를 창의문으로 잡았다. 인조반정의 통문이며 피로 얼룩진 역사의 현장을 출발지로 삼은 것이 유감이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피만큼 순수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창의문 역은 서울의 비원인 ‘백사실계곡’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거장이다. 서울의 동쪽, 혜화문 밖에 있는 길상사를 가는데 왜 창의문에서 내리고 구불구불한 백사실계곡으로 가야 하는지 물을 텐가? 미리 말했듯이 아름다운 방황에 몸을 맡기는 것이 내 취향이다. 기왕이면 백석이 김영한에게 보낸 시에서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에 방황하면 좋다.

김영환이 거주했던 길상헌

동양방앗간과 환기 미술관 사이로 난 좁은 길이 백사실계곡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전형적인 서울의 옛 골목길에서 커피 볶는 냄새가 난다. 백석과 김영한이 지금의 연인이라면 커피집에 들러 아메리카노나 카푸치노를 시켰으리라. 그러나 옛사람 백석은 눈 내리는 창문 곁에서 찻잔 대신 소주잔을 들고 있었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시에서 나타샤라고 부르는 김영한의 또 다른 애칭은 자야(子夜)이다. 국경의 전쟁터로 나간 남편을 그리는 사부곡인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子夜五歌)에서 따온 이름이다. 함경도 함흥에서 만난 영어교사 백석과 김영한은 단번에 눈이 맞았다. 백석은 그때 이미 긴긴 이별을 예감한 듯 자야란 이름을 붙여줬다.

백석과 자야의 사랑은 세속의 방해를 받는다. 백석의 아버지는 가문을 내세워 기생인 자야와의 결혼을 극구 반대한다. 자야가 진향이라는 기명을 조선 권번에 입적한 건 아버지의 파산 때문이다. 16세 때 일이었다.

총명한 진향은 창과 궁중무를 조기에 전수받는가 하면, 조선어학회 신윤국의 후원으로 일본에 유학한다. 신윤국이 일경에게 붙잡혀 함경남도 흥원 교도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때였다. 진향은 그 길로 흥원 교도소를 찾았지만 다른 교도소에 이감된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깊고 맑은 눈에 독한 소주를 붓는 청년 백석을 처음 만난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자야가 사랑한 건 그런 백석이었다. 이북이 주거지인 백석은 어느 날 기별도 없이 자야를 찾아와 하룻밤을 뜨겁게 묵어갔다. 다음날 함흥으로 떠나면서 백석은 미농지 봉투를 남긴다. 자야가 뜯어보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가 나왔다.

원통사 앞에 흐르는 백사실계곡 시냇물

백사실계곡에는 꼭 들러봐야 할 곳이 두 군데 있다. 오랫동안 백사 이항복의 별서로 잘 못 알려진 백사실과 일붕선교종에 속한 현통사란 절이다. 빈 연못을 거느린 백사실은 60년대만 해도 동네 아이들이 누각에서 숨바꼭질을 했었다. 불과 100년도 넘지 않은 시간이건만 주춧돌만 남긴 채 사라져버린 것이 언제였는지 동네 사람들은 도통 기억이 없다. 추측만 무성할 뿐 누가 살았던 집인지도 알 수 없다. 집주인은 도심의 무릉도원 백사실계곡에서 영주에 버금가는 지위였음이 틀림없다.

백사실계곡을 빠져나와 북악산에 오른다. 팔각정은 예나 지금이나 서울 시내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길상사가 있는 자리도 눈어림할 수 있었지만 나의 방랑은 구부러지거나 휘어진 길을 더듬는다. 숙정문이 있는 쪽으로 내리막길을 택해 삼청동으로 간다. 도성의 북쪽 대문이라 하여 북문이라고 불렀던 문이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두막의 북한말에 살자고, 백석은 마르크 샤갈의 풍경화처럼 노래한다. 시를 읽는 순간 자야는 한 마리 흰 당나귀처럼 응앙응앙 연애지상주자의 백석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에 빠졌으리라. 둘은 만주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려 했으나 자야의 마음은 이내 돌아선다. 더 이상 백석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았다. 둘 사이에 보이지 않은 선이 그어진 셈이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실제로도 휴전선이 그어졌다.

자야는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훗날 대원각이란 요정으로 이름을 남긴 청암장이란 한식집을 운영했다. 대원각의 절정기는 제3공화국이었다. 숱한 정객의 취흥과 밀담이 오가고, 더는 격을 갖춘 기생이라 부를 수 없는 화류계 여자들의 웃음이 만발한 그곳에서 그녀의 재산은 불어났다. 그러나 자야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이면 연민과 그리움에 식음을 끊는 순애보를 보였다.

길상사는 순수한 사랑과 정치적 향락, 남북분단이라는 현실을 함께 그러안고 살아야 했던 김영한이 우리 사회에 기부한 선물이었다. 요정이 절집으로 변한 모습으로도 그 경계가 궁금해진다. 잘 알려지다시피 그 경계엔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있었다. 1995년 김영한은 당시 시가로 1,000억 원에 이르는 7,000여 평의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보시했다. 백석에 대한 완전한 사랑을 무소유로 완성한 것은 아닌지 이 대목에서 생각하게 된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은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대원각의 본체였던 극락전에서 새로 지은 전각인 지장전으로 가는 길은 작은 개울을 건넌다. 그 다리 건너에 자야가 거처했던 오래된 집 길상헌(吉祥憲)이 있다. 그 집에서 자야는 자주 꿈을 꾸었다. 백석이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천연덕스레 말한다. 여보, 나 잠깐 나갔다오리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돌아온다. 여보, 나 다녀왔소.

길상사 가는 북악산 길에서 보이는 숙정문

1999년 11월 14일 그녀는 육신의 옷을 벗었다. 죽기 하루 전날 그녀는 목욕재계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묵었다. 세속의 옷을 벗은 그녀의 몸은 다비했다. 첫눈이 새하얗게 도량을 장엄하던 날 길상헌 언덕에 뿌려졌다.

길상사 설법전 밑에는 ‘관음보살상’이 일주문을 향한 채 홀로 서 있다. 머리에 쓴 연꽃을 빼면 다른 절에서 보아온 보살상과는 영 딴 모습이다. 작은 얼굴과 가녀린 허리, 긴 치마를 입고 있다. 길상사 개산 당시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가 만들어 봉안했다는 석상이다. 가톨릭의 성모상처럼 보이는 이 보살상은 종교 간 화해의 염원을 담긴 관음상이라는데, 자세히 보니 젊고 어여쁜 자야를 쏙 빼닮았다. 나는 안다. 김영한보다는 자야가 방랑자 백석을 기다리는 데 훨씬 더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것을.

걷는길 : 경복궁역 3번 출구 - 창의문 - 백사실계곡 - 북악산 하늘길 - 호경암 - 숙정문 - 길상사

거리와 시간 : 7km 정도, 3시간 예상 (휴식 시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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