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무소유〉를 소유하려는 세상

법정 스님이 입적하시고 난 뒤 나는 나름대로 근신하는 기간을 보냈다. 스님을 생각할 때마다 허허롭기 그지없었다. 좀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한 자책 때문이었다. 편지라도 자주 할 걸 후회도 들었다. 스님의 숨결이 묻은 흔적들을 살펴보니 꽤 됐다. 인도나 미국에 가시어 보낸 엽서, 간디 기념관에서 사 오신 원숭이상, 강원도 오두막에 사시면서 ‘천식 때문에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까지.

가장 애틋한 물건은 스님께서 겨울내의를 보내주셔서 돌아가신 아버지께 드린 일이다. 아마도 스님께서는 내의를 여러 벌 선물 받아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하셨을 것이다. 스님은 무엇이든 하나만 소유하셨다. 두 개를 가지고 있는 것은 군더더기라고 했다.

“원고를 쓰기 때문인지 만년필을 좋아하지요. 그런데 누가 선물해서 만년필이 두 개가 됐어요. 두 개가 되다 보니 한 개를 가지고 있을 때보다 살뜰함과 고마움이 사라져요. 그래서 선물한 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만년필 한 개를 다른 이에게 주어버렸지요.”

일러스트 정윤경.

최소한의 것만 소유함으로써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홀가분해지자는 것이 ‘무소유’의 요지였다. 그런데 스님이 입적하시고 나자, 스님의 〈무소유〉는 경매에 나와 놀랄 만한 액수로 거래됐다. 창원에 사는 사촌동생도 〈무소유〉를 구할 수 없겠냐고 내게 전화를 했다. 내가 법정 스님 제자이니 〈무소유〉 책을 몇 권쯤 보관하고 있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한 권도 없었다. 〈무소유〉는 〈영혼의 모음〉이란 책에서 가려 뽑아 편집한 책이었다. 나에게는 〈영혼의 모음〉이 있기 때문에 굳이 〈무소유〉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무소유〉를 갖고자 하는 소유의 광풍은 이제 잦아진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씁쓸하다.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담긴 〈무소유〉가 소유의 대상이 되었으니까. 사람들은 왜 〈무소유〉를 소유하고 싶어 했던 것일까. 가지고 싶어 하는 것과 읽고 싶어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러한 심리상태는 무엇일까. 스님은 현대인들의 소유지향적인 마음이 〈무소유〉에서 위안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현대로 올수록 사람들은 ‘소유’를 강요하는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무소유〉란 책을 낼 때는 ‘무소유’란 개념이 없었지요. 또 ‘무소유’를 정신적인 가치로 알아주지도 않았어요. 책 제목을 지을 때 출판사 사장이 난색을 표했는데 내가 우겨서 정한 제목이에요.”

스님은 또 ‘베푼다’는 말보다는 ‘나눈다’라는 말을 즐겨 쓰셨다. 베푼다는 것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주는 행위이고, 나눈다는 것은 잠시 맡아 지닌 것을 되돌려주는 행위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말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르다. 베풂은 상하관계이고, 나눔은 수평관계이다. 그리고 돌려준다는 것은 상하나 수평이 아닌 인연을 따르는 수연행(髓緣行)이다. 우주적 관계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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