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암사에서 비로사 가는 길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소백산 비로봉 중턱에 있는 비로사. 비보사찰을 세운 선조들의 지혜에 참배객들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느림의 상징, 소백산자락길

사찰 세워 逆地를 吉地로

선조들 지혜에 고개 숙여져

 

서울서 영주로 내려오는 고속도로에서 수없이 많은 ‘속도규제’ 표지판을 보았다. 속도를 내도록 만들어 놓고 속도를 규제하는 이런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궁극적으로 정지 상태를 소망하는 것이 모든 고속도로의 존재 이유 같았다.

그러나 내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소백산자락길에 들어서면서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처럼 뻥 뚫린 고속도로 위에서의 견딜 수 없는 금지증후군이 숲길로 나를 이끌었다는 것을.

소백산자락길은 소백산 산자락을 에둘러 충북 단양과 강원도 영월, 경북 봉화를 잇는 길이다. 이 길은 행정적이지도 산업적이지도 상업적이지도 않은 도로이므로 자동차가 다닐 이유가 없다. 따라서 속도규제 표지판을 볼 일도 없고, 중형차나 외제차를 만나 피해줘야 할 일도 없다. 이 길에서 흔히 보는 나무와 풀은 언제 봐도 그 자리에 멈춰 있을 뿐이므로 한껏 늑장을 부리는 여행자의 걸음이 그리 낯설지 않다. 소백산자락길에서는 빨라 봐야 계곡을 타고 흐르는 시냇물뿐이지만 느림의 미학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사람에게는 이조차도 너무 빠르다.

차 없는 길, 특히 어둡게 썬팅한 차 안에서 운전대에 매달린 박쥐인간이 없는 길이라야만 길다운 길이라 주장한다면 차에 대한 원초적 혐오를 의심할 텐가? 덕수궁 돌담길이 차도로 변하지 않은 게 다행인 세상에서 소백산자락길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길을 빼앗은 게 어찌 자동차뿐인가. 컴퓨터와 스마트폰도 길을 해킹하는 자들이다. 길을 가다 보면 스마트폰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는 신자들을 무수히 만나는데, 다행히도 소백산자락길에서는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다. 대신 쭉쭉 날아간 창처럼 하늘에 닿은 전나무와 계곡을 따라 힘차게 흐르는 시냇물이 우리 마음을 뚫어놓는다.

소백산 자락길은 모두 12자락인데, 가장 멋진 자락길을 꼽으라면 단연 1자락길, 그 가운데서 비로사에서 시냇물을 따라 초암사로 이어지는 길이다. 내가 불자라서가 아니라 이 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단언컨대 엄지를 추켜세울 것이다.

차를 타고 왔다면 배점 주차장에 세우고 내려야 한다. 그때부터 죽계구곡과 더불어 사과나무 길이 열려 초암사로 향한다. 소백산에는 사과나무가 많다. 소백산에는 또 희방사ㆍ부석사ㆍ보국사ㆍ초암사ㆍ구인사ㆍ비로사ㆍ성혈사 등 절 또한 많다.

울창한 나무로 대낮에도 어두운 소백산자락길.

‘소백산엔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 어느 숲길에 돋아난 팻말에서 김승혜라는 향토시인은 노래하고 있었다. 줄곧 푸른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길을 지나왔기에 시가 쏙 들어왔다. 그런데 사과, 하면 뉴턴의 사과 아닌가. 시인은 푸른 사과에서 절을 보았지만, 내 눈엔 절과 더불어 구도자도 보였다. 푸른 사과가 땅의 중력을 이겨내고 다 익을 때까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야말로 구도자의 그것 아닌가. 땅만 사과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다. 뉴턴의 통찰은 사과도 그 질량만큼 땅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는 데에 이른다. 다만 그 힘이 약해 땅에 떨어질 뿐인데, 소백산엔 사과나무가 많아 땅을 끌어당기고, 수많은 구도자의 깨달음의 힘으로 소백산을 번쩍 들어 올릴 것도 같았다.

김정호가 쓴 지리지인 <동국지지(東國地誌)>는 ‘이 산은 수도하고자 하는 자가 살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사과나무의 힘 아닐까.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기술한 대목이 나온다. 소백산을 처음 본 술사 남사고가 말에서 내려와 넙죽 절하며 내뱉었다는 감탄사다.

이에 나는 생각한다. 남사고가 말한, 사람을 살리는 산이란 어떤 산일까? 사과나무뿐 아니라 산에 깃든 잡초와 잡초에 떨어진 빗방울에도 절이 깃들고 구도자가 깃들어 우주의 중심이 되는 그런 산이다.

명산의 조건으로 예나 지금이나 산세를 으뜸으로 치고, 거기에 풍수를 논하지만 때때로 꿈보다 해몽인 경우도 없지 않다. 해발고도 4,000km가 넘는 티베트를 보라. 물 한 동이 구하기 어려운 땅임에도 깨달음을 품고 사는 수도승이 많은 건 풍수가 나빠서인가. 아프리카 사람이니까 스키나 봅슬레이를 탈 수 없으려니 단정하는 사고방식이야말로 편견이 아닐 수 없다.

길지가 있으면 역지(逆地)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땅을 좋고 나쁨으로 분별하기보다 나쁜 땅을 좋은 땅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옛사람 도선 국사의 생각이었다. 나쁜 땅에 절을 세워 재앙을 막겠다는 의도에 앞서 사람의 몸에 쑥을 놓고 뜸을 뜨듯이 땅의 상처를 치료해주자는 것이 비보사찰(裨補寺刹)의 참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든 진리는 사과와 땅처럼 상대적인 듯싶다. 소백산자락길은 이황과 주세붕, 안향과 안축 등 영남의 선비들이 거닐었던 길이다. 소백산 밝은 정기가 그들의 학문에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들의 학문이 소백산을 드높였다고도 볼 수 있다.

소백산자락길도 상대적이다. 시냇물과 길이 나란히 걷거나 헤어졌다 걷기도 하고, 시냇물이 길 위를 걷거나 길이 시냇물 위를 걷기도 하는 길이니 말이다. 그러자니 데크로 된 다리의 계단을 쿵쾅쿵쾅 밟거나 징검다리를 건너려 겅중겅중 뛰거나 양팔을 벌려 외나무다리를 위태로이 걷기도 하지만, 그중 죽계1교를 건널 땐 묵언을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 다리 건너에 초암사(草庵寺)란 절이 있기 때문이다. 초암사에 들렀을 때 대부분은 돌거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를 떠먹으러 우르르 몰리지만, 순례에 나선 사람으로선 의당 상륜부 없는 신라의 삼층석탑에 합장 삼배부터 해야 할 일이다.

초암사에서 잠시 쉬었다 다시 이어지는 숲길은 나무들이 워낙 울창해서 한낮인데도 어둑신하다. 벌써 해가 지려나 시계를 내려다보게 하는 길이었다. 수년 동안 통행이 금지된 길이라 시냇물 소리는 우렁차고 간간이 보이는 못은 깊고 푸른 에메랄드빛이었다. 그 금지의 시간 너머에서 석륜사로 가려고 시냇물을 건너는 퇴계 이황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어느 날 소수서원을 나온 이황은 국망봉 아래 있는 석륜사를 찾아갔고, 소백산을 샅샅이 유람할 요량으로 거기서 사흐레 머물렀다. 석륜사는 기록에만 자취를 남겼을 뿐 지금은 소백산에서 보이지 않는 절이다.

갑작스런 폭우로 낙과한 소백산 사과들.

초암사에서 국망봉까지는 4.4km였다. 비로사(毘盧寺) 가는 길은 등산로와 자락길로 나뉘는 갈래에서 3.4km를 더 가야 한다. 퇴계가 그 자락길, 달밭골을 지나 비로사로 하산했다는 길로 나도 걷는다. 비로사에 가까워지자 잣나무 숲이 쭉쭉 뻗은 수직의 세상이다. 퇴계의 시대에도 잣나무 숲이 있어 땅에 촘촘히 깔린 잣잎이 지친 다리를 위로했던가.

걷는길 : 배점분교 주차장 - 죽계구곡 - 초암사 - 달밭골 - 비로사 - 삼가리 주차장

거리와 시간 : 12.6km, 4시간 3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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