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현대불교
상단여백
HOME MANDALA 테마인
“문화재는 ‘민족魂’, 그래서 모으고 지켰죠”테마人- 정각 스님 (고양 원각사 주지·중앙승가대 교수)
  • 글= 신성민 기자·사진= 노덕현 기자
  • 승인 2017.08.14 10:07
  • 댓글 2
정각 스님의 연구실은 각종 도록과 연구서적이 빼곡히 차 있다. 이곳에서 스님은 학문과 수행에 매진한다. 스님이 들고있는 책은 최근 동국대에서 발간한 〈원각사의 불교문헌〉이다. 이 책에는 스님이 그동안 모은 불교문헌들이 망라됐다.

고양시 식사동(食寺洞)은 이름부터가 불교와 연결돼 있다. ‘밥(食)’과 ‘절(寺)’이 조합된 지명으로 예전엔 ‘박적골’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고려 공양왕이 몸을 피해 이곳에 숨었고, 사찰의 승려들이 몰래 밥을 날라다 주면서 유래된 지명이다.

지금은 동국대 일산불교병원이 들어오고 도시 개발이 이뤄지고 있지만, 예전에는 조용한 전원 마을이었다. 이곳에는 식사동을 대표하는 사찰, 원각사가 있다.

원각사는 문화재나 불교 문헌과 관련된 지자(知者)들에게는 유명한 곳이다. 최근에는 동국대 불교학술원(원장 정승석)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사업단과 함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사업단 고문헌 도록 1, 원각사의 불교문헌〉을 출간하기도 했다.

문화재 수집·보존에 앞장
출가하면서부터 문화재 관심 가져
학인 시절 대구 봉산동 돌며 수집
불교 문헌·고지도·도자기 등 모아
“聖寶, 본 자리 있어야 의미 커져”
문화재위원·중승대 교수 활동 매진

불교 문헌·지도는 ‘민족혼’
동국대 불교학술원 1년 조사 끝에
소장 문헌 483종 612점 도록 망라
<능엄경>서 언해 필사 나와 ‘이슈’
고지도, 中·日 역사공작 막는 자료 
최근에는 목판 태극기 수집 시작해

도록에 수록된 문화재는 483종 612점으로 방대하다. 조사 기간만 1년이 걸릴 정도였다. 발간 당시 정승석 동국대 불교학술원장은 “원각사 소장 불교문헌은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책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간기가 충실히 남아있는 선본(善本)들이 많다”며 “이번에 출간한 도록은 수록된 문헌들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불교 고문헌의 역사와 서지사를 파악할 수 있는 지침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방대한 불교 고문헌들은 사찰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모두 성보 수집·보존에 원력을 가진 한 스님에 의해 이뤄진 결과물이다. 바로 원각사 주지 정각 스님이다.

정각 스님은?조계총림 송광사에서 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87년 송광사에서 보성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90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91년 통도사 강원을 졸업했으며,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4년 범어사에서 무비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전강했다. 법주사 포교국장, 중앙승가대 불전국역연구원 간사, 조계종 포교원 포교연구실 연구위원을 역임했다.현재 중앙승가대 교수, 고양 원각사 주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매장문화재분과), 일산서부경찰서 경승위원장로 활동하고 있다.

성보 문화재, 출가 때부터 관심
〈원각사 불교 문헌〉을 조사해 도록을 만들게 된 계기를 가장 먼저 물었다. 스님은 바로 “종립학교 동국대에서 제안했기 때문”이라고 즉답했다. 사실 스님의 고문헌 수집은 잘 알려져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에서도 도록 샘플을 가져와서 문헌 조사와 도록 제작을 제안했지만, 종립학교인 동국대가 더 낫다는 판단에 응했다는 것이다.

“20년을 모으다 보니 제법 양이 많더군요. 한번은 조사·연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동국대가 조사를 요청했고, 또한 모든 유물을 아카이브에 공개한다고 해서 응했습니다. 문화재들을 사진 촬영하는 데만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죠. 그래도 의미 있는 연구사업이었습니다.”

도록에 수록된 문헌 양만 600점이 넘는다. 이는 모두 스님의 강사료, 책 인세 등을 아껴 모은 것이다. 정각 스님은 출가 초기부터 성보 문화재와 사적 등에 관심이 많았다. 관심은 이내 원력과 학문으로 다가오게 됐다.

“20년 전 강원에 있을 당시 방학이 되면 대구 봉산동 골목을 둘러봤습니다. 봉산동은 대구 지역서 고서와 골동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모여있는 곳이죠. 골목을 다니다가 가게 한켠에 불교 경전이 널부러져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를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성보는 사찰에 있을 때 본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중한 성보들이 원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사비를 모아 하나씩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출가 후 20여년 동안 동국대서 강의하고 받은 강의료, 글을 써 받은 원고료, 저서 인세 등을 모아 불교 문헌 등을 구입했다. 그렇다고 욕심은 내지 않았다. 여건이 안돼 구입할 수 없으면 없는 대로 뒀다.

“좋은 문헌, 자료가 있더라도 가격이 너무 높으면 구입이 어렵죠. 좋은 자료는 언제나 그에 걸맞는 사람을 찾아가더군요. 그래도 굳이 수집을 못해 아쉬운 문헌이 있다면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정덕본입니다. 보물 중에 보물인데 가격이 너무 높게 책정돼 있더군요.”

그래도 스님이 소장하고 있는 불교 문헌은 서지학적으로 가치가 높은 문화재가 다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묘법연화경(언해) 권 1, 4(보물 제1010-2호)〉이다. 이는 세조가 설치한 간경도감에서 만든 경전으로, 초기 한글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간경도감에서 만든 책들 중 유일하게 변상도까지 남아있는 책이기도 하다.

지난 조사과정에서는 세간을 놀라게 한 필사가 발견되기도 했다. 2015년 12월 원각사 소장 〈능엄경〉을 조사하던 동국대 불교학술원은 “1461년 이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필사 글씨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발견된 원각사 〈능엄경〉의 한글 글씨는 가느다란 붓을 이용해 초서체로 썼으며, 반치음과 옛이응 등 15세기 한글의 특징이 남아있었다.

“1401년 태조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에게 〈능엄경〉을 간행하도록 명령합니다. 왕위를 물려주는 조건일 수 있겠죠. 이방원은 아버지의 명령이자 부탁을 받아들여 당시 명필로 이름을 날린 성총 스님에게 글을 쓰게 하고 이를 판각해 〈능엄경〉을 간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능엄경〉 여백에 한글 언해본에 해당되는 여러 필사 기록이 남아 있었죠.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한글 글씨는 국보 제292호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1464)’입니다. 현재 여러 국어학자들이 해당 글씨를 연구 중인데 〈능엄경〉언해가 간행된 1461년보다 오래된 것이 밝혀진다면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이 발간한 〈원각사의 불교문헌〉.

문화재, 민족혼 일깨우는 중요한 자료
정각 스님은 불교 문헌만 모으지 않았다. 오히려 세간에는 고지도를 수집하는 스님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008년에는 독도가 명시된 프랑스 지도를 찾아 대중에게 공개했다. 당시 공개한 지도는 1732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J.B.B.D'Anville)이 제작한 중국전도로, 독도가 당시 우산국(독도의 옛 지명)의 중국식 발음 ‘Tchian-chan-tao’으로 울릉도 ‘Fan-ling-tao’와 함께 동해안 바로 옆에 표시돼 있다.

스님이 소장하고 있는 고지도는 약 200여 점. 우리나라가 최초로 소개됐던 지도, 동해가 최초로 표기된 지도 등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들을 모았다. 그 중에는 최초로 ‘꼬레아’라는 국명이 표기된 것으로 알려진 1594년 프란치우스가 제작한 세계지도가 있다. 국내엔 경희대 박물관과 스님만 소장하고 있는 희귀한 자료다. 이 같은 지도를 모아서 지난해에는 봉은사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스님과 지도라니 그다지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밖에 없다.

정각 스님의 설명은 이렇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 출신 관륵 스님이 일본에 지도 제작법을 전수했으며, 이를 토대로 유추했을 때 삼국시대부터 지도 제작에 스님들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고지도 수집의 조금 더 직접적인 계기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컸다.

“10여 년 전에 중국 동북공정과 일본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해 표기 등이 문제됐죠. 이를 전후로 고지도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사찰에서 살고 있는 수행자지만,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역사 자료를 발굴해서 정리하는 것이 나라의 정체성 내지 당시 중국과 일본의 문화적 침탈에 대응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각 스님은 최근에는 태극기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민족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이 들어서다.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목판 태극기들이 있습니다. 현재는 이 태극기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들 태극기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입니다. 우리 민족혼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이 담긴 역사적 유산들이죠.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신부되려다 출가… “카스탈리엔 찾고 있죠”

나는 신부가 되려고 했다
가톨릭 집안 출신으로 신부 지망
철학 공부하며 ‘삶의 본질’ 의문
“나만의 카스탈리엔을 찾고 싶었다”
송광사서 출가…수행·학문 정진

오직 일념으로 정진할 뿐
‘나의 길을 잘 가고 있나’ 매일 경책
학문 성과, 문화재 도록 정리 과제
“대중 함께 할 박물관 건립 꿈꿔”

정각 스님이 봉은사에서 대중들에게 법문하고 있다.

정신적 이상향을 찾아서…
불교 문헌을 열정적으로 모을 수 있다는 것은 이에 대한 애정과 향학열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출가하기 전 정각 스님은 신부 지망생이었다.  

스님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다. ‘소(小)신학교’로 불리는 성신고등학교를 거쳐 가톨릭대에 입학했다. 당시 성신고는 신부가 되기 위한 사람들만 입학하는 곳이었다. 얼마나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을 진학하고 공부를 하면서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학교 1, 2학년에 철학과 라틴어 등을 배우는 데, 이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 문제를 천착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스님은 부친에게 임범재 교수가 있는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에 진학하겠다고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스님은 자취를 하면서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민중미술을 선도한 장경호, 소설 평론가 장석주 등과 친하게 지냈다. 스님은 이내 친구들은 있는데 자신에겐 없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자기 자신의 내면 속 이상향이었다. 정확한 목표가 없던 것이다.

그러던 중 스님은 헤르만 헤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유리알 유희〉를 읽게 된다.  〈유리알 유희〉는 ‘카스탈리엔(Kastalien)’이라는 미래의 이상향에서 2400년경에 쓰여졌다는 설정을 해놓고, 이보다 약 200년 전에 존재하였던 카스탈리엔의 유희의 명인(名人) 크네히트를 회상하며 서술하는 형식을 취한 정신문화사적인 미래소설이다. ‘카스탈리엔’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교육주와 같은 이상향이다. “카스탈리엔이라는 이상향이 나아갈 곳”이라는 결심이 들었다는 것이다.

“‘카스탈리엔’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를 고민했죠. 그러다 막연히 동양 정신의 정수를 가진 사찰, 불교에서 ‘카스탈리엔’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사찰이라곤 중고등학교 때에 1번 다녀온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냥 택시를 타고 기사 아저씨께 가까운 절에 데려달라고 했죠.”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이 안암동 개운사였다. 택시에서 내리니 스님 두 분이 걷고 있어 곧바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두 스님은 송광사로 입산 출가하라고 했다. 그리고 곧장 출가를 했다. 출가의 인연을 맺게 한 두 스님은 이제는 사형이 된 정인 스님과 덕수 스님이다.

송광사에서 출가 생활을 시작한 스님은 오래된 인연을 찾은 듯했다. 불교 수행과 학문에 매진했다.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4년엔 범어사에서 무비 스님을 법사로 전강했다. 특히 문화재 부문에 있어서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로 인정받아 최근에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매장분과)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정각 스님은 일산신도시 포교에 매진했다. 사진은 원각사 신도들과 찾은 쿠시나가르 열반당.

오로지 정진하고 정진하고
정각 스님은 1995년 일산 신도시로 왔다. 탄현 지역서 법당을 열어 신도시 포교에 매진했다. 식사동에 본원을 건립한 것은 6년 전이다. 탄현 법당은 현재 포교당으로 활용 중이다.

20년을 넘게 신도시 포교 일선에서 활동 중인 스님은 스스로를 ‘부족한 안내자’라고 말한다.

“스스로가 불교 수행자로서 과연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돌이켜 보면 아직 제대로 된 길을 찾지 못한 부분도 많습니다. 제가 길을 알아야만 대중에게 알려줄 수 있습니다. 더 정진하고 정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포교를 위한 계획들은 하나하나 세워놓고 있었다. “모았던 문화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수장·전시할 박물관 건립 추진할 계획입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또한 불교학 체계 안에서 정리가 잘 안된 이론들을 꾸준히 정리할 계획도 있습니다.”

인터뷰 말미, 스님에게 “이상향 ‘카스탈리엔’을 불교에서 찾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스님은 “물 속의 물고기는 자신이 물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답했다. 공간에 들어오면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불교라는 이상향을 만났다는 말이기도 하고, 끝없이 찾아가야 할 목표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스님은 ‘정진 중’이다. 정진 또 정진.

글= 신성민 기자·사진= 노덕현 기자  motp79@hyunbul.com

<저작권자 © 현대불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글= 신성민 기자·사진= 노덕현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2
전체보기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