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소와 목동 이야기 中

정신이 탕진되도록 혼 힘을 다해 소를 얻었지만/ 완강하고 힘이 장사라 다루기 어렵다   
때로는 가까스로 고원(高原)에 오르고/ 혹은 뭉게구름(煙雲) 깊은 곳에 빠지기도 한다.
 -제4 ‘득우(得牛)’, 마침내 소를 붙잡다

동자는 미처 날뛰는 소를 잡기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자칫 소의 힘에 질질 끌려가겠군요. 검은 소를 잡아 길들이기는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군요. 아직 부단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곽암선사의 〈십우도송〉 의 제4단계는 ‘득우(마침내 소를 붙잡다)’입니다. 이는 보명선사의 〈목우십송〉의 ‘초조(初調, 길들기 시작하다)’의 단계와 유사합니다.

십우도의 검은 소는 無明의 나
습관 길들여져 업장 속에 살아
소 이끄는 동자, 반야지혜 상징
업력과 지혜 맞대결 비유한 도상


“나에게 고삐가 있어 곧장 코를 뚫었고/ 한번 돌아 달아나면 아프게 채찍을 더 하네/ 이전의 졸렬한 습성 고르고 제재키 어려워/ 오히려 목동은 힘을 다해 이끄누나”라는 내용입니다. 마침내 소를 확실하게 붙잡는 장면을 소의 코에 고삐를 꿰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제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내 안의 ‘소’를 길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소’로 착각하고 있는 한, 진정한 평화는 없습니다. 〈십우도〉에 등장하는 소는 무명으로서의 ‘나’, 즉 존재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까 ‘존재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간단한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나는 없다’라는 무아(無我)의 진리를 말합니다.

존재를 ‘나’라고 철석같이 믿고 평생을 달려왔는데, 그게 아니라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입니다. 이 몸과 감각, 그리고 생각이 ‘나’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나’일까요. 사실 ‘나’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십우도가 제시하는 ‘나’라는 존재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따라가 봅시다.  

업에 휘둘릴 건가, 지혜를 밝힐 건가
곽암선사의 서문에는 “오랫동안 야외에 파묻혀 있던 그 소와 오늘에야 만난다. 수승한 경치에 마음 뺏겨 뒤쫓기 어렵고, 소도 무성한 초원이 그리워 견디기 어렵다. 완강한 마음이 매우 세고 야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다. 유순함을 얻고 싶다면, 반드시 채찍으로 다스려라”라고 합니다.

세세생생 쌓아온 번뇌 업장(業障)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또 현생에서 더욱 강화시켰으니 습관의 힘이 보통 강한 게 아니군요. 그래서 ‘고원(高原)’의 높은 경지에 오르기도 했다가 다시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연운(煙雲)’ 속에서 떨어져 헤어날 줄 모릅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이미 몸과 마음에 배어있는 습관은 바로 나를 무너뜨립니다. 습관적 반복으로 길이 아주 잘 닦여 있어, 조그마한 자극에도 바로 그 길로 직행합니다. 이것을 업의 힘 ‘업력(業力)’이라 합니다. 업력이 치성할수록 고통은 배가 됩니다.

업력에 휘둘려 평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깨달음과 계합하여 자유를 얻을 것인가. 깨달음과 계합하지 못하고 검은 소(무명)로 분리되어 있는 한 영겁의 윤회를 면치 못한다는군요. 인간의 고통은 ‘근원적 분리’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아담과 이브도 낙원에서, 분별심을 일으키자마자, 바로 추방되었습니다.

‘고(苦)’는 범어로 두카(duh-ka)인데, 이러한 불완전함에서 오는 고통은 ‘근원적 분리’에서 비롯됩니다. 본래 하나였던 것이, 무명으로 인해 ‘나’라는 이원적 관점을 갖게 됩니다. 이원적 분리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고통의 강도는 심해집니다. 무명과 업력에 의해 분리되어 날뛰던 것(소)이 자각의 힘으로 드디어 회광반조합니다.

소의 고삐를 틀어잡는 것은 ‘반야지혜(동자)’입니다. 반야지혜는 다시 근본 자리와 계합하도록 소를 이끕니다. 십우도에 묘사된 소의 모습을 보면, 초반부에는 온통 검은 색의 몸을 하고 있다가 중반부터 소가 점점 하얗게 변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업장까지 다 털어버렸을 때는 소의 꼬리까지 말끔히 하얘집니다.

검은 소가 하얀 소로 변해가는 것은 번뇌업장이 소멸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행 단계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서는 소와 동자가 모두 사라지고 덩그마니 일원상(一圓相)만 남게 됩니다.

검은 소는 무명을 바탕으로 미쳐 날뛰는 오온(五蘊)입니다. 무명을 ‘어리석음(癡)’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많은 어리석음 중에서도 가장 큰 어리석음이 ‘나’라는 착각입니다. 진리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홀연히 일어난 것을 분별하여 스스로 ‘나’라고 여기는 원초적 미혹입니다. 미혹이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을 말합니다.

지혜를 접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평생을 그리고 세세생생을 이 ‘나’라는 것에 홀려 갈팡질팡하며 지낼 수밖에 없답니다. 진여를 보지 못하고 ‘내가 있다’고 착각을 일으키는 것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고 합니다. ‘나’라는 미혹 속에는 근본 4번뇌가 있는데, 이는 아치(我癡)·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입니다. 이 네 가지 중에서도 아치(내가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이 가장 먼저입니다. 유식(唯識) 사상에서는 자아의식과 관련한 이것을 ‘말라식’이라고 하고, 이를 ‘말라식의 4번뇌’로 꼽고 있습니다.

‘득우(得牛 마침내 소를 붙잡다)’ 장면, 곽암선사 십우도송, 오산(五山)판본.

‘나’라는 아상의 실체
말라식이란 자기로서 의식하는 ‘자의식의 근원’을 말합니다. 표층에 떠오르지 않는 마음으로 자나 깨나 항상 활동합니다. 아라한과를 증득해야 비로소 소멸한다고 하는 군요.

요코야마 코이치의 〈유식이란 무엇인가〉에 나타난 정의를 요약하자면, 말라식의 실체는 아뢰야식의 견분(見分)을 자기라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말라식은 유신견(有身見, 살가야견)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라식(제7식)의 나’와 ‘의식(제6식)의 나’는 어떻게 다를까요? ‘말라식의 나’는 ‘①임운(任運 자연스럽게 작용함) ②일류(一流 항상 똑같은 존재방식임) ③항상속(恒相續 항상 계속 작용함)’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의식의 나’는 ‘①의식적 작용 ②나라고 생각하기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여 그때그때 다르다 ③항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성질을 갖습니다. 여기서 임운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무의식적 무의도적 생득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식적으로 컨트롤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의식 넘어 무의식까지 볼 수 있어야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수행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네요.

임운하는 말라식을 관조하면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됩니다. 항상 내부로 향해 ‘나’라고 집착하는 말라식이 밖을 향하여 일체가 평등함을 관(觀)하여야만 진정한 자타불이(自他不二)가 가능합니다. 미세하지만 집요한 이 말라식을 소멸시켜 평등성지를 얻지 않는 한 무루선(無漏善)은 없습니다.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갈애가 생기고(無明因愛),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업(業, 즉 오염된 업)이 생기고(愛因業), 업(오염된 업)을 원인으로 하여 (갖가지로 오염된 번뇌·삼계의 색경에 속박된) 안식(眼)이 생긴다(業因眼). 이식(耳)·비식(鼻)·설식(舌)·신식(身)·의식(意)도 또한 이와 같다.
- 〈잡아합경〉 제13권 제334경 ‘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

12연기의 가장 밑바탕에는 무명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온갖 잡염과 번뇌가 따라 붙어 허망한 세상이 만들어 집니다. 나만의 세상이 만들어집니다.

미국의 유명한 영성지도자 아디야 샨티의 저서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의 영문 원제는 〈The end of your world〉입니다. 내가 스토리로 만들어 놓은 나의 인생과 그것의 윤회의 종말이라는 뜻입니다. 태초의 나의 시작인 무명을 바탕으로 행(行)이 일어나고, 따라서 식(識)·명(名)·색(色·)6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가 진행됩니다.

〈아비달마법온족론〉‘연기품(緣起品)’에는 “어떤 것을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생긴다(無明緣行)고 하는가? 세존께서는 ‘무명을 인(因)으로 하고 무명을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일어난다’고 하셨다. 이 탐냄·성냄·어리석음의 성품을 바로 무명연행(無明緣行)이라고 한다. 삿된 소견·삿된 생각·삿된 말·삿된 행위·삿된 생활·삿된 노력·삿된 기억·삿된 선정을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생긴다(無明緣行)’고 한다”고 합니다. 무명의 마음이 인연하고 속박하여 만들어낸 세상은, 지혜의 마음을 밝히지 않는 한, 바로 진짜라고 착각하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만들어 놓고 다시 그것을 보는 양자가 모두 무명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채찍과 고삐를 쉼 없이 사용해 곁에서 여의지 말라/ 그대가 한 걸음씩 티끌 속세로 들어감이 두렵다/ 그러나 끌어내 길들이니 순화되어/채찍과 고삐 쓰지 않더라도 스스로 사람을 따르네”
-제5 ‘목우(牧牛) 소를 길들이다’

곽암선사 십우도송 서문에는 “생각(前思)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뒤에 상념(想念)이 따르니, 깨달음(覺)으로 말미암아 진실함(眞)을 이루고, 미혹(迷)됨으로서 망상(妄)이 된다. 경계(境)로 말미암아 있음(有)이 아니니, 다만 자심(自心)에서 일어남(生)을 본다. 고삐를 굳세게 끌어당기고 헤아리지 마라”라고 합니다. 이제 오온이 어떻게 연쇄적으로 작용하여 덩어리 망상으로 떠오르는 지를 보게 됩니다. 이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구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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